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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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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년 동안의 역사, 조선왕조실록

[서울문화 이야기 25]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 개국부터 끝까지 정치, 외교, 군사, 법률, 통신, 종교 등 인간사의 모든 부분을 종합하여 기록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정확한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실록이 편찬되었지만 한 왕조가 조선왕조실록처럼 긴 시간에 걸쳐 풍부하고도 엄밀한 기록을 남긴 예가 없다. ▲ 《조선왕조실록》 표지들(왼쪽부터 태조실록, 중종실록, 광해군일기,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세종실록) 《조선왕조실록》은 궤짝에 담아 보관해왔다. 그리고 실록이 서로 닿는 것을 막도록 사이에 초주지를 끼워 넣고 악귀를 쫓는 붉은 보자기로 쌌다. 또 그 보자기에는 벌레와 습기를 막으려는 청궁, 창포 등의 한약재 가루를 담았다. 한 궤짝에는 15~20책을 담아 철저하게 봉인하고 자물쇠를 채웠다. 이렇게 자물쇠를 채운 왕조실록은 처음엔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사고에 보관했지만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를 뺀 나머지 사고가 모두 불타자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등의 산속 사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실록은 임금도 볼 수 없었으며, 실록을 관리하는 사람조

먹거리에 대한 올바른 상식

[서울문화 이야기 24]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배달겨레, 그들은 수천년 동안을 같은음식을 먹고 살았다. 물론 그동안 음식들고 부침이 있어 없어진 새로운 음식들이 태어나고 또 없어지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생긴 먹거리에 대한 상식들. 하지만 그런 상식이란 것도 엉터리가 많다. 무엇이 우리에게 바른 먹거리 상식인지 살펴볼 일이다. 밀가루는 우리의 주식이 아니었다 “밀가루는 예부터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빈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구황식품(救荒食品)이다. 게다가 밀가루는 서늘한 음식이기에 흡수가 잘 안 되고, 장에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장을 차게 해 좋지 않다. 또 밀가루가 기름과 만나면 장에 지방을 많이 끼게 하기 때문에 기름과 만난 밀가루는 더욱 피해야 한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그것은 우리 몸엔 쌀이 잘 맞는다는 말이며, 의학적으로 보면 성질이 따뜻하고, 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다.” ▲ 수제비, 밀가루 음식 한 한의원 원장의 말이다. 밀가루 음식을 가끔 먹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주식으로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이다. 더구나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땅과 기후에 토착화된 밀이 아닌 서양밀로 만든 밀가루는 우리 몸에 더 안 맞을 것이다. 더더구

부침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떡

먹거리에 대한 올바른 상식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 밀가루는 우리의 주식이 아니었다 “밀가루는 예부터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빈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구황식품(救荒食品)이다. 게다가 밀가루는 서늘한 음식이기에 흡수가 잘 안 되고, 장에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장을 차게 해 좋지 않다. 또 밀가루가 기름과 만나면 장에 지방을 많이 끼게 하기 때문에 기름과 만난 밀가루는 더욱 피해야 한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그것은 우리 몸엔 쌀이 잘 맞는다는 말이며, 의학적으로 보면 성질이 따뜻하고, 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다.” 한 한의원 원장의 말이다. 밀가루 음식을 가끔 먹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주식으로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이다. 더구나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땅과 기후에 토착화된 밀이 아닌 서양밀로 만든 밀가루는 우리 몸에 더 안 맞을 것이다. 더더구나 서양밀가루가 재배할 때의 농약뿐만이 아니라 배에 실을 때 살균제와 살충제를 섞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큰 문제이다. 몇 년이 지나도 벌레가 살 수 없는 밀가루가 과연 사람 몸에도 괜찮을까? ▲ 국수와 수제비, 밀가루는 서늘한 성질의 구황식품이었다. 또 다른 밀가루에 대한 상식을 더듬어 보자. 판소리

한국인의 얼굴은 원래 네모였다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식생활의 변화에 따른 얼굴 형태의 변화 한국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나? 특히 옛 사람들 단군조선시대,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땠을까? 궁금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전해지는 유물들을 통해 겨우 짐작할 따름이다. 충북 제천 점말에 있는 구석기 동굴유적인 용굴에서 출토된 뼈에 새긴 얼굴, 부산 동삼동 조개무덤(貝塚)에서 나온 조개껍데기, 그리고 강원도 양양 오산리에서 출토된 손으로 대충 눌러 만든 5센티미터 안팎의 흙으로 빚은 얼굴, 그리고 울산ㆍ고령 등 바위에 새긴 암각화에서도 옛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또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얼굴이라고도 하는 도깨비기와(귀면와:鬼面瓦)와 신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人面文圓瓦當), 역시 얼굴무늬 수막새 탐라인의 미소', 불교가 전래하면서 만들어진 숱한 불상과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다양한 인물상,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들,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불화(高麗佛畵)나 조선시대 초상화, 풍속화, 탈춤에서 쓰는 탈바가지, 장승 등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조를 만나게 된다. ▲ 한국인의 얼굴들(윗줄 왼쪽부터 시

녹차를 전통차로 착각하지 마라

전통차의 진실, 행복한 전통차 마시기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은 물론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가 무척이나 즐겼던 전통차는 삼국시대에 인도나 중국에서 들어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처음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지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처음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27대 선덕왕(632~647)이며, 처음 차 씨앗이 뿌려진 것은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에 대렴이 임금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가져온 씨앗을 지리산 부근에 심었다. 이것이 그동안 정설처럼 알려진 차 전래의 시작이다. 하지만, 최근엔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은 사대주의 시각이며, 실제는 그 이전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우선 일부 내용이 일연의 ≪삼국유사≫ 전한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89)이 금관가야의 왕비로 시집오면서 차씨와 차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또 같은 책에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 제사에 차(茶)를 제수품목에 넣은 것으로 나온다. 이해는 서기 661년으로 흥덕왕 3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게 한 육우(733~804)가 태어난 해보다 무려 72년이 앞선 것이다.

임금님 수라상과 백성의 밥상

[서울문화 이야기 21]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의 진귀한 음식들, 궁중 수라상 1) 초조반 탕약이 없는 새벽에는 죽상을 차린다. 죽은 계절에 따라 여러 가지 부재료를 넣고 끓인다. 왼죽(粒粥 입죽:불린 쌀을 통으로 쑤는 죽)흰죽전복죽원미죽(쌀을 갈아 싸라기로만 쑨 죽에 설탕ㆍ약소주를 타고 얼음으로 차게 식힌 죽)장국죽(쇠고기로 끓인 맑은 장국에 쌀을 넣고 끓인 죽)버섯죽잣죽타락죽(우유죽)깨죽 따위가 있다. 죽에 따르는 반찬은 젓국조치와 동치미나박김치마른찬간장소금꿀 등으로 간단하게 차린다. 죽은 병자음식이 아니라 몸을 보하는 음식이다. 2) 수라상 임금과 중전이 평소에 아침과 저녁으로 받는 밥상의 이름. 아침수라는 10시 무렵, 저녁수라는 저녁 67시에 올린다. 수라상에 밥은 흰쌀밥과 팥밥, 두 가지를 올리는데 팥밥은 붉은팥을 삶은 물을 밥물로 하여 지은 것으로 홍반이라 한다. 밥은 왕과 왕비용으로 곱돌솥에 안쳐서 화로에 참숯을 피워 짓는다. 수라상 원반에는 흰밥과 미역국을 짝으로 올리되, 팥밥과 곰탕은 책상반(冊床盤, 보조수라상)에 놓았다가 원하면 바꾸어 올린다. ▲ 수라상에는 흰쌀밥과 더불어 꼭 잡곡밥을 올려놓았다.(뉴스툰) 찌개는 맑은조치[조치:바특하게

술에 취해 그림을 그렸던 조선의 화가들

[서울문화 이야기 21] 김홍도, 신윤복, 정선 그림 속의 비밀들 4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김후신은 대쾌도(大快圖)를 그렸는데 만취한 선비가 흐느적거리면서 갈 지(之) 자로 걷고 친구들이 부축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대쾌도는 술 취한 그림이지만 이는 술 취한 사회를 비웃는 김후신의 뜻이 담겨 있음이 아닐까? 당시는 살벌한 금주령이 내려진 영조임금 시대였다. ▲ 김후신 대쾌도(大快圖), 자본담채, 33.7 x 28.2 cm, 간송미술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술을 빚거나 마시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던 시절, 하지만 금주령 앞에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던 것이다. 양반은 취하고 처벌은 백성이 받고, 그림 속 배경인 나무들이 이런 광경을 흘겨보는 양 묘사한 김후신의 번득이는 재치다.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들이 이렇게 술에 빠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술이 아니고는 붓을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술독에 빠진 화가들은 어쩌면 의식과 무의식 중 어느 한 쪽에서도 예술에 대한 영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 이경윤 수하취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