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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문화의 꽃 승정원일기, 일성록 그리고 의궤

[서울문화 이야기 26]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것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다.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임금 비서실 격이었던 승정원에서 처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취급하였던 행정 사무, 의례적인 것들을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하나의 속기록이다. 이 책은 나라의 중대사에서부터 의례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정원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을 만큼 방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펴내기 위한 첫 번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는 기록물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초부터 기록되었으나, 인조대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고 현재 남은 것은 무려 3,243권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승정원일기 인터넷판


승정원일기를 쓴 사람들은 승정원에 소속된 주서(注書)로 예문관 소속의 사관(史官)과 함께 임금과 신하들이 만날 때 반드시 배석하여, 그들의 대화내용을 기록했는데 일종의 속기사였다. 주서는 과거합격자 중에서도 특별히 웅문속필(雄文速筆), 곧 사람이 하는 말을 재빨리 한문으로 번역해서 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았고 승진에 특혜를 주기도 했다.
 

참고 : 승정원일기 누리집 -http://sjw.history.go.kr/main/main.jsp 
 

임금 언행의 기록 일성록(日省錄)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융희 4)까지 150년간 날마다 역대 임금의 언행을 기록한 책.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필사본으로 모두 2,329책이다. 규장각에서 편찬한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인 1752년(영조 28)부터의 언행과 동정을 일기체로 적고,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1779)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임금이 조정에서 한 갖가지 사실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것을 자료로 하여 1783년부터 작성을 시작해 1785년 1월 임금의 모든 일을 기록한 《일성록》을 처음 펴냈다. 증자(曾子)의 "하루 세 번 나를 돌이켜 살폈다."는 말의 뜻을 살려 《일성록》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연대기이며, 역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국장도감의궤≫, ≪화성성역의궤≫, ≪외규장각의궤≫(왼쪽부터)
 

궁궐 행사 기록의 모든 것, 의궤 

의궤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큰 행사가 있으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서 책으로 펴낸 것이다. 큰일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도록 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만들어졌다. 특히 임금, 출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의례를 기록했다. 먼저 탄생과정을 기록한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 태를 보관할 장소를 선정하고 태실(胎室)을 만들어 안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안태의궤(安胎儀軌)‘, 뒤에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면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를 기록했다. 그런 다음 혼인을 하게 되면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임금으로 오르면 태실을 태봉(胎封)으로 올리고, 주위 석물을 배치하는 과정을 기록한 ’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를 기록하며, 임금이나 왕비가 죽으면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로 마무리 했다.  

또 임금이 직접 농사짓는 친경의식의 절차 및 소요 물품 등에 대한 '친경의궤(親耕儀軌)'가 있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보인의궤(寶印儀軌)', '친잠의궤(親蠶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글 그 하나이다.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도쿄 증상사 

고려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불경을 집대성하여 펴낸 불경이다. 이 거대한 역사는 불교를 일으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뽐내고,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의 어려움을 없애고 지키겠다는 뜻에서 새긴 것이다. 

그런데 고려대장경이 일본 도쿄 도쿄타워 가까이에 있는 증상사(增上寺, 죠죠지) 안의 신(新)경장이란 건물에도 있다. 웬일일까?  

   
▲ 도쿄 증상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왼쪽), 노사신의 상소가 기록된 ≪성종실록≫

성종실록 183권, 16년(148년) 9월 16일 기록에 보면 노사신의 상소가 눈길을 끈다. “대장경은 이단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접한 나라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경 1건을 만들려면 그 경비가 매우 많이 들어서 쉽사리 조달할 수가 없습니다. 요전번에는 대장경이 나라에 무익하였기 때문에 왜인들이 와서 구하면 문득 아끼지 않고 주었으나 지금 몇 건 남아있습니까? 다 주고 나면 또 달라는 억지에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말하자면 싹 주어 버려도 아깝지는 않지만 한꺼번에 다 주고 나서 다시 달라고 떼를 쓰면 만드는데 돈이 드니까 대장경을 달라고 할 때마다 조금씩 주자는 말이다.  

이 무렵 일본은 무사들이 권력을 잡았던 시절로 그들은 자신들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절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래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면 으레 수준 높은 고려대장경을 달라고 졸랐다. 마침 불교를 천시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은 고려대장경을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하고 하나 둘 일본에 넘겼다. 물론 일본 사신에게 종이를 가져오면 찍어주겠다고도 했지만 일본 사신이 들고 온 종이는 워낙 조악해서 대장경을 찍을 수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게 해서 건너간 고려대장경이 이곳에 있게 된 것이다. 와서 달라 조른다고 덥석 내준 사람들이나 대장경 하나 못 만들고 80여 회(조선왕조실록 기록)나 대장경을 요구했던 일본 쪽이나 모두 '불심(佛心)'과는 먼 행동을 한 것 같다.
 

준의 위대한 학술서 동의보감

동의보감(東醫寶鑑)1610(선조 29)에 허준(許浚)이 왕명을 받아 정작(鄭碏), 이명원(李命源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펴낸 의서(醫書)이다. 내용은 5개 강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경편(內景篇) 6, 외형편(外形篇) 4, 잡병편(雜病篇) 11, 탕액편(湯液篇) 3, 침구편(鍼灸篇) 1권이다. 2224권의 33책은 탕액편으로 향약명(鄕藥名) 649개가 한글로 적혀 있어 국어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일부 사람들은 동의보감을 두고 표절했다며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하지만, 그들은 동의보감이 중국문헌을 인용할 때는 철저히 인용 표시를 했으며, 조선만의 것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독창적인 학술발전을 이루었음을 모른다. 표절한 것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오르게 할 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펴낸 뒤 청나라와 일본에서는 여러 번 번역해 책을 펴냈으며, 최근까지도 민국상해석인본(民國上海石印本대만영인본 등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판 원원통(源元通)의 발문에 이 책은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의 비급(祕笈)이라, 군명을 받으려 훈점(訓點)을 가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청국판 능어(凌魚)의 서문에는 이 책을 펴낸 좌한문(左翰文)에게 천하의 보물을 천하와 함께 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이를 보면 동의보감이 표절이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도 인정하는 위대한 책이라는 것을 증명된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이나 실은 동양의학의 보감이며, 동양의학의 백과전서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