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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신윤복, 정선 그림 속의 비밀들 1

[서울문화 이야기 18]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떤 이는 한국 문화를 중국의 아류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한복의 기원은 중국에 있다고도 말하며, 거문고도 중국에서 들어왔으니 중국 악기라 한다. 또 문인화가 중국에서 전래했으니 중국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차이를 모르는 소치다.  

1909년부터 1928년까지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독일인 안드레 에카르트는 고국으로 돌아가 1929조선미술사를 펴냈다. 독일어로 된 이 책은 8·15 광복 이전 한국 미술을 일본어가 아닌 외국어로 맨 처음 소개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미술의 특성을 서구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해방 전까지 세계인들이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조선 미술을 다음처럼 평가했다. 

   
▲ 열화당에서 번역해서 펴낸 안드레 에카르트가 쓰고 권영필이 뒤친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조선 사람들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고전적인 미술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장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의 미술이나, 감상으로 치닫거나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 미술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 문화가 중국의 아류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문화사대주의일 뿐이다. 이제 우리 조선의 그림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특징을 찾아보자  
 

정선의 산수화에는 조선만의 그림이 있었다 

한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내가 겸재 정선의 작품을 보기 전에는 조선의 그림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그림 중에 산수화가 가장 많은데 왜 조선의 산과 강과 사람은 없는지? 산수화는 전부 중국풍의 인물과 어느 지형을 그렸는지 알 수도 없는 진짜 그림 속의 그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서관을 들러서 겸재의 화첩을 감상했는데, 진한 감동과 충격을 느꼈다. ! 조선에 이런 화가가 있었구나!” 

그는 왜 그런 감동을 받았을까? 그는 사진과 함께 전시된 그림을 보니 정말 금강산이 거기 있었고 한탄강도 있었으며 인왕산도 그림 속에서 살아 있었다고 했다. 또 조선의 산하는 물론 갓을 쓴 양반과 서민의 모습까지. 17세기 조선이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 진경산수화  

정선(鄭敾, 16761759)은 중국의 기법을 그대로 답습한 그림은 우리 감정을 나타낸 우리 그림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의 산천을 두루 답사하고 그 아름다운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그림 기법을 창안하여 그렸다. 우리 산수를 소재로 하여 실제의 경치 그대로 그린 것으로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를 이끈 사람이었다 

   
▲ 겸제 정선의 <박연폭포(왼쪽)>와 <인왕제색도>

그러나 정선의 산수화는 그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다.
인왕산의 바위는 희게 그리지 않고 검게 그려 무거운 느낌을 강조한다.
폭포는 일부러 길게 그려 폭포소리가 훨씬 우렁차고 세차게 들리도록 했다. 진경산수화라 해서 무조건 있는 그대로가 아닌 오히려 느낌을 분명히 강조한다. 조선의 초상화가 극사실화지만 사람의 생각마저 그리려고 구도와 특징을 살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흉내가 아닌 차별화만이 진정한 예술이요 문화다.
 

곰보, 검버섯까지 죽기 살기로 그린 조선의 초상화

<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 >

극사실화 - 수염 한 올까지도 정밀하게 그렸고, 곰보, 검버섯, 사팔까지도 그대로 그렸다. 극사실화란 전신사조(傳神寫照)’곧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 생각을 그린다 - 극사실화지만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사람의 생각마저 그리는 것으로 구도와 특징을 잘 살리는 그림이다. 조선 대부분 초상화는 귀가 늘 당나귀 귀이고, 한쪽만 그렸으며, 눈은 정면을 바라보지만 코는 1/4쯤 옆으로 돌린 모습이다. 한국인은 코가 낮아서 정면으로 그리면 보기가 싫다나? 조선의 초상화는 정직하지만, 특징은 잘 살린다.



   
▲ 극사실화임을 잘 드러낸 <이채 초상(왼쪽)>과 사팔•살짝곰보•검버섯까지 그대로 그린 <체재공 초상>
  


임금 어진은 누가 그렸을까
? 

조선시대의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은 누가 그렸을까? 어진(御眞)은 임금의 얼굴 부분을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 1명을 중심으로 주관화사를 도와 옷을 그리고 색칠하는 1~2 명의 동참화사(同參畵師), 그림을 그리는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면서 영정 제작을 배우는 3~4명의 수종화원(隨從畵員)의 합동작품이다. 어진을 다 그리면 화원들은 벼슬이 오르거나 상을 받았다. 또 주관화사는 어용화사라는 이름을 듣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다. 이런 내용은 어진을 제작하는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에 나온다.

   
▲ 보물 제932호 <영조어진 (英祖御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