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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천마을 죠쟌케이의 작은 절이 눈 속에 묻혀 동화나라에 온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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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의 고장 답게 아침에 다시 찾아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눈길을 뚫고 누가 기도 하러 찾아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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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절의 내부에는 덩그마니 작은 부처님 혼자 계셔 협시불이 즐비한 한국 절 보다 외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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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전 앞에는 카가미모치(정초에 복을 비는 떡)가 놓여있다. 카가미 모치는 1월 초순이면 치우기 때문에 정초에만 볼 수 있으며 절이나 신사, 음식점, 호텔로비,가정집 등 일본의 새해맞이 풍습을 잘 보여주는 전통적인 설맞이 풍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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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불로 모셔진 부처님. 크기도 작고 철불이 그대로 보인다. 부처님의 형상은 반가부좌한 미륵 보살이다.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기자] 23살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치자키 우사브로(地崎宇三朗, 1869-1936)다. 그는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멀리 떨어진 도야마(富山) 출신으로 고향에서 일찍이 쌀장사를 크게 하다 경험부족으로 큰 실패를 본 뒤 춥고 연고도 없는 홋카이도 땅으로 건너 왔다.
이후 맨주먹으로 홋카이도에서 재기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 당시 홋카이도 개발 붐을 타고 건설, 토목 회사의 수요 폭발로 자신의 이름을 딴 치자키(地崎) 건설회사를 세워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는 당시 온천마을로 유명한 죠잔케이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고 오타루에서 죠잔케이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하여 일본에서 두 번째 유료도료를 놓는데 성공한다. 이 도로 개통으로 죠잔케이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신심이 깊은 치자키 씨는 홋카이도 개발과 도로 건설을 하다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고자 현재의 자리인 삿포로시 미나미쿠 죠잔케이 온천 3쵸메(札幌市南区定山渓温泉西3丁目) 에 작은 절 이와도관음당(岩戸観音堂)을 짓고 그들의 명복을 빌게 된다.
이와도관음당은 국도 230호선에서 쇼게츠그랜드호텔 교차점을 빠져 나오면 바로 길 옆에 있으며 현재는 교통안전을 기원해주는 절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절 안에는 33체의 관음상이 모셔져 있으나 일반에게 공개는 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공개하고 있다.
해마다 이곳 이와도관음당에서는 ‘관음대제’가 성대히 열린다.
홋카이도 죠잔케이 호텔에 여장을 풀고 카메라 하나를 들고 온천마을을 돌아보던 중 어둠속에 눈 덮인 작은 동화마을을 연상 시키는 집이 있어 다가가 보니 이와도관음당이었다.
▲ 고향 도야마에서 사업 실패 뒤 23살 청년 치자키 우사브로가 홋카이도 개발에 관여하여 성공한 뒤 건설, 토목 공사로 죽어간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절 이와도관음당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관음당은 절 간판도 없는 아주 소박한 모습의 절이었는데 밤 9시무렵이라 찾는 이도 없이 형광등 불빛만이 졸고 있었다. 경내에 들러 사진 몇 장을 찍고 밖으로 나오니 관음당 옆에 바로 무료족욕탕이 있었다. 사방은 껌껌한데 발을 벗고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하늘의 별이 시릴 만큼 푸르고 맑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23살 청년이 사업에 실패하고 건너와 불굴의 정신으로 일본굴지의 건설회사를 세우고 난 뒤 건설공사장에서 희생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이와도관음당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치자키 씨의 성공의 밑거름은 불심(佛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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