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창립되면서 각색이나 연출의 개념을 도입한 창극이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 1940년대 말 여성국극단들이 조직되면서 1950년대는 가히 국극의 시대라 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는 이야기, 1948년에 결성된 여성국악동호회의 주요 인물들로는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유앵, 신숙, 임춘앵, 등 그 외에도 많은 판소리 여류명창들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일본은 1913년부터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있었고 중국도 1927년부터 여성들만의 극단이 존재해 오고 있다는 점, 대표적인 창극단체로는 <햇님국극단>, <여성국악동지사> <낭자국악단> <여성국극협회> <우리국악단>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이들은 흥행이나 인기에 따라 대표자의 명의나 소속 단원들의 변동이 잦아 그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점, 임춘앵의 대표작품이었던 <목동과 공주>를 국도극장에 올렸을 당시 을지로 4가 일대가 교통이 마비되어 기마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대단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1950년대 여성국극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회고담 하나를 소개한다. 이 내용은 조영숙이 1958년 7월 월간 야담사와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당시에는 여성국극만 하면 돈을 모았습니다. 입장료는 2환을 받았는데, 마다리푸대에 넣고 발로 밟아 계속 다졌습니다. 밤새도록 숯불을 피워 돈을 다리미질해서 가방에 넣었는데, 돈이 든 큰 가방을 혼자서는 들지 못했습니다. 남자 두 명이 들었죠. 그런 가방이 하루에 세 개 되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여성국극의 기세도 50년대를 지나 60년대 초반 이후에는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무렵 국립의 국극단이 창단되면서 사설 국극단의 운영문제나 스타의 빈곤, 극본의 부재 등의 요인과 함께 영화나 TV 등 다른 대중 오락물의 증가가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다시 이 여성국극의 재활운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남북 정상회 담시 북한의 피바다와 함께 남한에서는 여성국극 <춘향전>을 공연한 것이나, 또는 금강산 관광개방 이후 <황진이>를 공연하는 등, 근래 여성국극에 대한 재건 활동이 부분적으로 일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재건 운동 역시 여성국극을 지켜온 관계자들이나 무대에 섰던 배우들의 의욕만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관련 단체나 정부기관, 기업의 관심이나 후원이 없으면 여성국극의 재건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작금의 현실일 것이다.
1962년 3월에는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국극단이 국립으로 창단되었다. 그 뒤 동 국극단은 1973년《국립창극단》으로 명칭을 바꾸어 재창단을 하게 된 것이다. 동 창극단의 설립은 판소리 음악의 일대 변혁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기실 국가에서 창극단을 설립한 것에 힘입어 판소리 음악은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한국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발판을 얻게 된 것이다.
동 창극단은 <춘향전>이외에도 전래하는 5바탕의 판소리를 창극화하였고, 또한 <강능매화전>을 비롯하여 <가로지기>, <배비장전>, <백운암>, <대업>, <광대가>, 등 야사나 설화,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창극이나 기타의 창작창극을 제작하여 고정관객을 확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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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창극단 <숙영낭자전>, 마당극 <양반뎐>,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 / 왼쪽부터 |
1980년대 말부터는 극장무대가 아닌 마당극 형태의 연희도 꾸준히 제작되었다. 무대극과는 달리 마당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주제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온 온 것이다. 또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도 초기,《국립국악원》의 <남촌별곡>이나 <시집가는 날>과 같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창작 경서도 소리극들도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창극 역사에 비하면 경서도 소리극은 너무도 늦게 선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창극에 비하면 경서도 소리극의 극적인 요소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도 국가 음악기관이나 지방정부의 음악기관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임의 단체의 힘만으로 종합적인 음악극을 제작한다는 자체가 상상 밖이었던 것이었다. 사정은 어렵다고 해도 창극을 통해서 확인한 것은 경서도 소리나, 정가를 기본으로 하는 소리극을 제작, 공연하는 것이 곧 이 분야 소리의 확산운동이라는 점에 공감대가 맞추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만은 않다. 주지하다시피 소리극이란 것이, 각 분야의 능력있는 전문가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제작이 되고 공연이 되는 것인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여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소리극의 무대화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국가나 지방정부, 혹은 뜻있는 제작자가 나타나기를 무한정 기다릴 수만도 없는 상황이어서 사명감을 지닌 명창들이나 단체들이 국가나 지방정부, 혹은 기업의 단발성 협찬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비를 들여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춘희, 백영춘, 임정란, 김혜란, 유창, 유지숙, 김경배 등을 비롯하여 경서도 소리의 명창들은 각각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의 이름으로 경서도 소리극을 제작 공연하면서 초창기 활동을 주도하였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