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창작국악극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 왔다. 이와 같은 국악극이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자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첫째는 극본의 소재가 건전하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점과, 둘째로는 어떤 어법의 성악도 그 뿌리는 전통음악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개인의 음악성을 살린 창작이나 창의력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자칫 뿌리 없는 어법 등을 차용해서 겉모양만 화려하게 꾸미는 예를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세 번째 조건으로는 등장인물들의 소리 공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이라는 점, 그리고 전문 연출가의 역할이 절대적이란 점을 강조하였다. 음악극은 여러 장르의 협업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이란 점에서 최고의 기술력은 배우들이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만들어 갖추고, 이러한 기술들을 조화롭게 디자인 하는 역할이 전문 연출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그리고 경서도 소리극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나 경기도, 또는 인천시에 경서도 소리를 기본창으로 하는 소리극단 하나는 설립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중재를 바란다는 점, 대형화보다는 소극장무대나 단막극 형태의 소규모 국악극의 활성화를 기대한다는 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뮤지컬 <캣츠>,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 <오페라의 유령> 등은 영국출신 프로듀서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영국에서 초연되었으며 전 세계인이 즐기는 뮤지컬이 된 점을 상기하면서 그 배경에 영국의 교육과 연극, 교육과 음악의 깊은 관계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랜 기간 국악극 활성화를 위한 필자의 제언에 공감을 해 주신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를 드린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보유자 최창남 명창의 공연 모습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 주에는 2014, 5월 31(토) 오후 3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열리는 최창남 경기명창의 개인발표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선소리 산타령의 예능 보유자이며 당대 최고의 경서도 민요의 기교를 자랑하는 최창남 명창이 일곱 번째, 개인 소리판을 준비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의학, 과학의 발달로 인생 100세 시대라는 말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 100세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질병이나 재해, 또는 사고로 60~70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인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건강하게 70을 넘기는 수명도 하늘의 축복일진대, 나이 80 넘어 개인의 소리발표회를 준비한다는 소식은 그저 우리를 놀라게 만들 뿐이다. 남들 같으면 신체의 조건이나 건강으로 인해 하던 일도 접어야 할 판인데,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마도 평생을 소리와 함께 살아온 자신감의 분출이 아닐까 해서 후배 국악인들이 본받아야 할 대표적인 귀감 사례인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목각(木刻)장인이 10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사람들이 그의 작업장에 가보니 앞으로도 30년은 충분히 작업할 수 있는 양의 나무가 창고에 그득하게 쌓여 있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아마도 그 목각의 대가는 그 재료들을 보면서 하루하루 할 일을 계획했을 것이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열정을 놓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마음은 청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70, 80살의 노인에게도 열정이 있다면 마음은 청춘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열정이 사라지고 할 일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한다. 몸보다도 마음이 가장 먼저 늙는 법이다.
오늘의 주인공 최창남 명창은 타고난 목과 소리속을 훤히 꿰는 현란한 기교로 경기소리의 멋을 들어내고 예술적 가치를 높여 온 너무도 잘 알려진 민요계의 거목이다. 해방 직전, 황해도 연백의 해남초등학교 시절, 어부들 속에 끼어 ‘배치기노래’를 부르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혼쭐이 났다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번번이 소리판에 끼어들 정도로 소리를 좋아했다는 사실부터가 소리꾼으로의 일생이 예고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해방 뒤 인천에 정착해서는 최경명, 양소운, 임명옥, 민천식, 신경문 등에게 서도소리를 배웠고, 이은관을 쫓아다니며 배뱅이굿도 익히다가 벽파(碧波) 이창배 문하에서 시조와 가사, 경·서도 민요, 12좌창과 입창 등을 착실하게 닦았다.
일찍부터 이름있는 명창들에게 소리를 익혀서일까? 타고난 목에서 뿜어 나오는 강유(剛柔)와 명암(明暗), 그리고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현란한 기교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그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일러 <소리의 마술사>라고도 부른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50~60대 명창 중, 최창남 앞에 소리를 다듬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내로라하는 국악인들과 함께 지방공연을 가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흥행도, 계약도 안 되었다는 김뻑국씨의 이야기가 최창남 명창의 소리가 어떠했는가를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꾸미는 경서도 소리 무대에 선생의 소리를 잊고 못하고 있는 많은 팬들이 앞 다투어 자리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무대가 자주 만들어 지기를 바라며 선생의 강건하심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