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도소리의 지존(至尊), 97세의 이은관(李殷官)명창이 살아생전 만나지 못하고 소리로만 대하던 배뱅 아씨를 만나러 떠났다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황해도와 평안도의 접경지대인 강원도 이천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소리를 좋아했고 10대에 가요 콩쿨대회에서 ‘사설난봉가’로 일등을 했다는 이야기, 민요를 좋아하던 자식을 위해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비싼 유성기를 사 줄 정도로 남다른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던 이은관의 부모이야기, 유성기 음반을 통해 박춘재의 소리를 많이 들었고, 친구를 따라 황해도 황주 권번을 찾아갔다는 이야기, 그곳에서 이인수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청년 이은관은 이인수 선생 앞에서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부른 민요가 서울지방의 창부타령이었다. 그쪽 지방은 황해도의 전통적인 소리, 즉 지금의 서도소리가 그 지역의 일반적인 소리였지 서울의 명창들이 즐겨 부르던 창부타령과 같은 노래는 잘 부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창부타령을 흐드러지게 부른 이은관에게 이인수 선생은 목소리도 좋고 재주도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가르쳐 줄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날부터 이은관은 선생 댁에 기거하면서 선생의 장기인 배뱅이굿도 배우고 서도의 다양한 소리도 배우기 시작하였다. 누구보다도 빨리 선생의 소리를 받아들였고 또한 잘 부를 수 있었던 원인은 이미 레코드나 유성기판을 수없이 들으며 익혀 두었던 소리들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선생의 소리를 따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습의 중요성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이은관 명창이 한창 공부를 할 1930년대 후반의 서도소리, 그 가운데 배뱅이와 같은 서도의 창극조는 김종조나 최순경, 이인수 등이 중심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순경은 그의 전성시대라 할 만큼 유명했다. 이에 견주면 그의 선생 이인수는 실력은 좋으나 매스컴을 타지 못해 이름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객관적인 소리 실력으로는 이인수를 높게 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그의 소리는 인받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김종조의 아버지 용강의 김관준으로부터 배뱅이굿을 배웠다고 전해온다.
청년 이은관이 그의 선생, 이인수로부터 소리를 어느 정도 배웠을 무렵, 선생을 도와 여기 저기 지방공연도 하면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선생은 황해도 황주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명창이어서 바쁘게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제자 이은관을 황해도 장현이라 하는 작은 마을
의 권번 선생으로 추천해 주었다. 배우는 일에서 이제 가르치는 소리선생이 된 것이다. 소리를 다 배워서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 되는 과정이 곧 배우는 과정이다. 그래서 남을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길인 것이다.
청년 이은관의 서도 소리는 나날이 익어갔다. 한 2년여 착실하게 소리선생을 하고 있었다. 권번 선생으로, 소리꾼으로 이은관의 이름이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동아 전쟁 [大東亞戰爭]이 터졌다. 이 전쟁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을 일본에서 이르던 말로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거짓에 지나지 않는 이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구미의 식민지 지배를 타파하고 아시아 제민족의 독립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전쟁이 점점 확대되고 보니 국내의 사정은 더 더욱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권번들이 다 없어지게 되었으니 소리를 배울 사람이 없어졌고, 그가 소리실력을 발휘할 기회도 잃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찾는 곳은 역시 고향땅이다. 유명한 소리선생이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향땅을 밟는 이은관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그가 살아 있다는 자체, 그것만으로도 무척 흡족해 하는 것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