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성수 선생은 1920년 8월 18일 평북 신의주 고진면(古津面) 낙청동(樂淸洞) 102번지에서 한일현(韓一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정규(韓正奎)는 신의주 일대의 부호로 어릴 적 선생의 집안 형편은 꽤 부유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4년 3월 평북 정주(定州)의 명문 민족사립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수많은 애국청년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한 민족학교였다. 이곳에서 받은 민족교육은 훗날 선생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진영에 투신하고 일제에 온 몸으로 저항하다 순국하게 되는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은 1941년 일본 전수대학(專修大學) 경제학과에 유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초 선생은 학도병(學徒兵)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1943년 조선인학도특별지원병령(朝鮮人學徒特別志願兵令)을 발표하여 한국의 청년학생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후방에서 민족지성의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한 일석이조의 조치였다. 외형상으로 지원(志願) 형식을 취하였지만 실제로는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학교를 다녔던 선생도 여기에 예외일 수가 없었다. 1944년 1월 20일 선생을 비롯한 학병들은 평양50부대에 강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 입대한 학병들은 주로 평남북 출신이어서 동향이거나 또는 중학, 대학 동창 등의 관계로 구면인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남양군도(南洋群島)든 중국대륙전선이든 전선에 배치된 후 일본군을 탈출하자는 논의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 한성수
선생은 원래 일본군에 입대한 후 중국보다는 남양군도 쪽으로 배치되기를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능숙한 영어실력으로 미군 쪽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강제 입대하기 전에 부모와 아내에게 입대 후 일제의 제물이 되기보다는 죽어도 꼭 탈출하겠다고 언명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선생은 남양군도가 아니라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학병 청년들은 입대 23일 만인 1944년 2월 13일 군용열차를 타고 평양을 출발, 압록강과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2월 16일 중국 중부지역인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인근의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치중대(輜重隊)로 일종의 수송부대였다. 이때 함께 군용열차를 타고 온 평남북 출신의 학병들은 서주에서 다시 각 중대로 분산, 배치되었다.
선생은 일본군 부대에 배속된 후 일찍부터 계획하고 있던 탈출을 감행하였다. 1944년 3월 26일 일본군 배속 후 1달여 동안 기회를 엿보던 선생은 오건(吳健), 이종무 등 두 사람과 함께 탈출기도 세 번만에 목숨을 건 야간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탈출 시점이 야간인지라 이들 세 사람은 철조망을 넘은 후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그후 선생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로 갔고 오건(吳健)과 이종무 두 사람은 14개월 동안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보계수용소(寶鷄收容所)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1945년 5월 석방되어 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로 입대하였다.
선생의 일본군 탈출은 이 지역 학병 탈출로서는 제1차 탈출이었다. 그후 선생의 뒤를 이어 많은 한인 학병청년들이 탈출을 감행하였다. 서주에서 박영록(朴永祿), 백정갑(白正甲), 윤영무(尹永茂), 이영길(李永吉), 노능서(魯能瑞), 김우전(金祐銓), 장준하(張俊河), 윤경빈(尹慶彬), 인근 숙현(宿縣)에서 석근영(石根英), 김유길(金柔吉) 등이 단독으로 혹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 광복군 훈련 모습
선생이 배속되었던 서주 치중대만 보더라도 소속 부대의 학병 50명 가운데 22명이 탈출을 감행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탈출은 대규모였다. 더욱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은 이들의 탈출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탈출 후 일본군의 추격을 벗어나는 것도 목숨을 거는 모험이지만 최종적으로 광복군의 품에 인계되기까지에는 무수한 난관을 거쳐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일본군 탈출 후 천신만고 끝에 광복군과 접선된 이들은 마침내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안휘성 부양은 진포선(津浦線), 평한선(平漢線) 등 일본군 기간철도와 일본군 점령지역인 서주, 남경(南京), 개봉(開封), 한구(漢口) 등으로 포위된 지역이었다. 동시에 부양은 중일전쟁의 최전방지역으로 한국광복군이 만주나 한반도로 침투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기에는 최상의 지역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당정부의 피난수도였던 중경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운동의 염원을 안고 중국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정규군을 조직하여 대일전에 투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한계로 말미암아 줄곧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자체 정규군인 국군을 보유하게 된 것은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거 이후 8년간의 피난시기를 끝내고 중경에 안착하던 1940년에 가서였다.
1940년 9월 서양 외신기자들이 많이 모여 있던 중경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김구(金九)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및 중국 국민당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韓國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式)을 열었다. 행사를 개최하게 된 데는 미주에서 보내온 동포들의 성금에 힙 입은 바 컸다. 성립 전례식에서 광복군창설 선포문을 발표한 후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 국군으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처음 총사령부만으로 조직된 한국광복군은 그후 각고의 노력 끝에 총사령부와 3개 지대로 편제된 군사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경에 총사령부와 제1지대가 있었고 서안에 이범석(李範奭) 지대장의 제2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제3지대는 김학규(金學奎) 장군이 당시 최전선이었던 안휘성 부양에 파견되어 한인청년들을 대대적으로 초모한 결과 창설된 부대였다. 제3지대에 모여든 한인청년들 가운데는 우수한 인적자원이 적지 않았는데, 그후 이들 한인청년들은 광복군의 기간이 되었다.
선생은 광복군에 입대한 후 광복군 대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 한광반)에 입교하였다. 광복군 3지대는 그동안 지하공작을 통해 서주, 귀덕(歸德), 안경(安慶), 개봉(開封) 등 적 점령지구에 지하거점을 확보, 이를 기반으로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해 갔다. 이러한 지하조직망을 통해 적 점령지구내에 있는 한인청년들이 포섭 초모되었고, 1944년에 접어들면서 초모된 한인청년들이 부양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무렵 일본군 탈출병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한광반은 이와 같이 초모된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이 증가하게 되자,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다시 말해 안휘성 부양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광복군 제3지대가 설치 운영한 임시훈련소였다. 3지대 지대장 김학규는 중국군과 교섭하여 부양 근처의 임천(臨泉)에 있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제10분교에 한광반을 설치하였다. 초모해 온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을 이곳에 입교시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장준하, 김준엽, 윤경빈, 김우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1944년 10월 22일 학도병 출신 33명, 일반인 출신 11명 등 모두 48명의 교육생들은 한광반 제1기를 졸업하였다. 입교생 전원은 졸업과 더불어 중국군 소위의 임명장을 받았다. 한광반 졸업 후 졸업생들 가운데 장준하를 비롯한 36명은 중경으로 향하였으며 선생을 비롯한 12명은 현지 잔류라고 하는 전방근무를 선택하였다. 중경에 간 이들은 임시정부의 경위대(警衛隊)와 광복군총사령부에 근무하였으며, 일부는 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로 차출되어 미국 전략첩보기구(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공동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한편, 선생을 위시한 12명은 잔류하여 3지대의 기간요원이 되었으며 적 후방 활동 및 초모공작을 수행하여 많은 한인청년들을 초모하여 훈련시켰다. 초모공작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게 새로운 피를 공급해 주는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1945년 3월말 임시정부 군무부의 보고에 의하면, 3지대의 초모공작은 그 성적이 대단히 우수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한 학병 출신들은 광복 직전 중국전선에서 전후방을 막론하고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일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등 8, 15 직전 광복군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의 한인 부호 손창식을 방문한 직후인 1945년 3월 13일 선생은 동지 홍순명, 김영진, 박윤석, 허암 등과 함께 상해주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들에게는 일본 헌병들의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특히 선생은 일본군을 탈출했다고 하는 전력으로 인해 더욱 잔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하지만 선생은 끝내 광복군 관련 기밀을 말하지 않았다.
그후 선생은 일본군 7330부대 임시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비공개로 개정된 일본군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혹심한 고문으로 업힌 채로 출두한 선생은 지금까지도 광복군의 귀감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대에 함께 체포되었던 김영진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법정에서 일어 사용을 강력하게 거부하여 부득이 일본어 통역을 불러 와서야 재판이 속개되었다고 한다.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國語)를 쓰지 않는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너희들은 대일본 제국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라는 물음에도 선생은 태연자약하게,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미, 영, 중, 소 등 연합국의 합동작전으로 태평양 방면은 물론 인면(印緬)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참패하고 머지않아 무조건 참패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을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에 대해 일본군 군법회의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른바 선생의 죄목은 광복군 공작책임자이자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가담하여 활동했다고 하는 이른바 분적이적군기밀누설(奔敵利敵軍機密漏泄)과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동지들인 홍순명, 김영진 등은 3년 이상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들은 남경 일본육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선생은 이곳에 이송된 후인 1945년 5월 13일 참수형(斬首刑)을 당했다. 당시 일본군의 사형언도는 으레 총살형이었지만 한국광복군 공작책임자로 일본군을 탈출하였으며 군법회의에서도 일제에 강력하게 항거했던 선생에게는 불법적인 참수형을 가하였다. 나머지 동지들은 6월 하순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한편 선생의 처형 소식을 들은 김학규 지대장은 제3지대 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이호(全履鎬) 대원으로 하여금 상해로 잠입하여 선생이 체포되게 된 경위를 조사하는 한편, 밀고자에 대한 처단도 지시하였다. 하지만 전이호가 부양을 떠나 남경 방면의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로 출발하려던 무렵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일본 동경(東京)에 있는 우천사(祐天寺)에 송환되어 방치되어 있었다가 순국 후 26년만인 1971년 11월 20일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여기에는 같은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된 한인의 유골 봉환 운동을 벌이던 정기영(鄭琪永) 등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선생의 유해는 부산 청룡동산 공원묘역을 거쳐 대전현충원에 안장됨으로써 소망이었던 독립된 조국에 묻히게 되었다. 25세라고 하는 젊고 꽃다운 나이에 장렬하게 산화한 선생의 순국과 민족적 기개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귀감으로 오늘날까지 길이 남아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