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요즘도 피의자 강제 심문을 하는 것이 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 걸 보면 피의자의 인권을 지켜나가는 일은 쉽지 않은 듯하다. 사실 인권 후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피의자나 죄인을 다루는 제도나 실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이 죄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살피게 한 일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매우 고귀한 것이었다. 심문 과정이나 죄를 기록하는 문자가 한자이어서 죄인의 인권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 가운데 하나이고 보면 세종의 인권 존중 자세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세종 14년인 1432년에 물리적인 힘으로 증거를 얻을 바에야 죄를 아예 주지 말라고 했다. 절대 억울한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해 11월 2일자 실록 기록에 따라 사건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세종이 좌대언 김종서(金宗瑞)에게 의금부에서 국문(중죄인의 심문)하는 김용길(金龍吉)김을부(金乙夫)매읍금(每邑金) 등의 죄상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김종서가 대답하기를 용길(龍吉)을부(乙夫) 등이 이르기를, 일찍이 밭을 갈러 가다가 문득 솥가마 따위의 물건이 숲 속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서 가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마는, 그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스타벅스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유달리 자국어로 된 간판을 허용한다고 한다. ▲ 영어보다 한글을 크게 써놓은 스타벅스 그뿐이 아니다. 스타벅스는 '훈민정음' 서문을 멋지게 새긴 선물용 상품까지 내놨다. 텀블러라 하여 뚜껑 있는 머그컵으로 한 시간 정도 보온보냉이 되는 제품이라는데 여기에 훈민정음 서문을 새긴 것이다. ▲ 스타벅스에서 내놓은 '훈민정음' 서문을 멋지게 새긴 선물용 상품 ▲ '텀블러' 상자 안에는 훈민정음과 훈민정음 서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설명해놓은 전단을 넣어 놓았다. 이런 스타벅스의 한글사랑이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지만 이곳의 커피 값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그저 단순한 상술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세종한말글연구소장] 5월 15일은 618돌 세종 탄신일이었다. 세종은 32년 나라를 다스리면서 사람 중심의 인문학과 과학, 예술을 꽃피웠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서양이 200-300년에 걸쳐 이룩한 온갖 문화와 과학 업적을 30여년 만에 해치웠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종의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어받기는커녕 일부에서는 깔보고 훼손하기까지 한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오목해시계(앙부일구) 복원품이다. ▲ 세종실록을 바탕으로 필자가 복원한 세종 때의 오목해시계 복원도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앞, 그 지하의 세종 이야기 전시관, 여의도 세종대왕 동상 앞, 경기도 여주 영릉 등 곳곳에 오목해시계가 복원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세종시대의 민본주의 과학 발명품이 아닌 엉터리 복원품이다. 세종은 다목적용 해시계인 오목해시계를 1434년에 설치하면서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각 표시를 동물신 그림으로 나타냈다. 이때는 한글창제 훨씬 전이었으므로 한자로 시각 표시를 했다면 한자 모르는 백성들한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1미터도 안 되는 2단 계단 위에 설치하여 어린 아이들도 볼 수 있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최만리[?-1445]를 대표로 하는 집현전 일부 학사들의 집단 상소는 정확히 1444년 2월 20일(이하 음력)에 올려졌다. 훈민정음 창제가 1443년 12월(정확한 날짜 모름)에 공개되었으므로 짧게는 두달 20일, 많게는 세 달쯤 뒤의 일이다. 같은 달 2월 16일, 세종이 최항과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한 지 나흘 뒤의 일이었다. 이 상소문으로 세종과 최만리는 명논쟁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상소문과 논쟁 과정이 고스란히 세종실록에 실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종은 막판에 화를 참지 못하고 7명을 옥에 가두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것을 후회해서인지 하루 만에 풀어 주었지만 끝내 정창손은 파직을 당하고 김문은 더 심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흔히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고 하지만 이때는 이미 창제한 뒤이므로 반포를 반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최만리는 비록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했는데 그의 반대 상소 덕에 창제 배경과 과정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세종과 세종을 지지한 정음학자들은 이 상소 덕에 반대 쪽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새 문자 해설서를 더욱 잘 쓸 수 있었을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기발한 정보 전달인가 천박한 지식인의 글장난인가? 당연히 뒤쪽이다. 정보를 정확하고 쉽게 빠르게 전달해야 할 신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한자를 가지고 한글을 파괴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세종 5년인 1423년은 세종이 임금으로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때다. 상왕인 태종이 1422년에 죽기까지 아버지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 5년은 세종의 재능을 시험이나 하듯 극심한 천재지변에 시달려야 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굶주리는 백성이 온 나라에 넘쳐났다. 함길도에서는 밀과 비슷한 흙으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참혹했다(세종실록 1423/03/13). 함길도의 화주에 흙이 있는데, 빛깔과 성질이 밀과 같았다. 굶주린 백성들이 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으매,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맛은 메밀 음식과 비슷하였다._세종실록 1423/03/13 즉위 때부터 몇 년째 이어지는 가뭄이었다. 세종은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 세종 5년 먹을 것이 없어 흙으로 떡을 해먹는 백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그림 이무성 한국 화가) 첫째는 위기 상황을 총체적으로 보고 거기에 맞게 적절하게 대응하였다. 1월 9일 충청도에서는 농사에 실패한 각 고을 사람들이 구걸하려고 다른 지방으로 떠돌았다. 그런데 각 지역의 관리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고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한글은 1443년 12월(음력)에 창제되고 1446년 9월 상순(음력)에 반포되었다. 북한은 창제한 날을 기리고 남한은 반포한 날을 각각 양력으로 바꿔 기린다. 그래서 북한의 조선글날(훈민정음 기념일)은 1월 15일이고 남한의 한글날은 10월 9일이다. 창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한글에 대한 기본 상식 또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퀴즈 28 문제를 마련해 보았다. * 맞춘문제 수: 25문제 이상 -아주 뛰어남 / 20문제~24문제 - 뛰어남/19문제 ~ 15문제 보통 / 14 ~10문제 - 노력 필요 / 9문제 이하 - 치열하게 노력 필요 ▲ 세종은 백성을 위해 쉽게 배울 글자를 고민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한글 기본 상식 짚어보기 0X 28문제 1. 세종이 우리말을 만들었다.( ) 2. 한글을 창제한 사실을 세종이 처음 알린 날은 1443년 12월(음력)이다. ( ) 3. 한글(훈민정음)을 일반 백성들에게 반포한 날은 1446년 10월 9일(음력)이다. ( ) 4. 한글은 조선시대 고종의 국문 칙령이 반포(1895년) 되기 전에는 공식문자(공용문자)가 아니었다. ( ) 5 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창제했다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모국어 교육은 모국어의 생명줄이다. 도대체 'Why'와 '왜'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왜'를 거부해서 얻고자 하는 why 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들이 선생님이 돼서 가르치는 모국어는 어떤 모국어일까. 영어 남용이 대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모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마저 모국어를 우습게 여긴다면 모국어는 누가 지킬까?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요즘 인문학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도 정작 대학가의 인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다. 강의와 이벤트 중심으로 이뤄지는 인문학 열풍은 인문학 위기의 또 다른 반증일지 모른다. 취업과 한줄 세우기식 대학 평가에 매몰되어, 대학의 본분을 읽어버린 대학에 대한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세종대학교는 철학과가 없고 역사학과도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그밖에 많은 대학들은 문예창작학과를 없앤 지 오래고 주시경을 낳은 배재대학교도 국어국문학과를 없앴다. 인문학 분야는 취업이 안 된다고 경쟁률이 줄어들고 있고, 국제화라는 미명 아래 영어 파시즘이 강의와 논문을 지배하다 보니 한글과 한국어 관련 학문이 죽어가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람의 위기, 더불어 배려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위기를 뜻한다. 인문학은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는 학문으로 인문 정신 곧 사람다움의 뜻을 담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뼈대는 사람답기 위해 주고받는 배려와 소통의 언어학, 상상의 나래를 통해 서로 다른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총체성으로서의 더불어 문학, 왜 그래야 하는지를 따져 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근본을 따지는 상생 철학,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흔히 세종은 10여년의 비밀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한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사내 연구원이 지적(홍사내, 2013.11.9., 세종은 언문 창제 작업을 언제부터 했을까? 얼레빗 )했듯이 그런 추정은 대체로 옳다고 본다. 본격적인 연구 기간을 말한다면 그런 추정이 맞지만 실제 새 문자에 대한 고민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감을 글쓴이는 김슬옹(2011).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개정판)》. 지식산업사, 1장, 2장에서 밝힌 바 있다. ▲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 김슬옹, 지식산업사 훈민정음 창제 17년 전인 1426년 10월 27일(세종 8년) 세종이 법은 함께 하는 것(人法竝用)임을 강조하며, 법률문이 복잡한 한문과 이두(한문을 우리식으로 일부 고친 표기체)로 되어 있어 문신조차 알기 어렵고 더욱이 배우는 학생들은 더욱 어려움을 지적했다. 법률문과 같은 꼭 필요한 정보의 소통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훈민정음 창제 11년 전인 1432년 11월 7일(세종 14년)에도 보인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식 한문체인 이두문으로 번역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문제를 의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