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0. 동의보감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올랐다 유네스코가 7월 31일 한국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렸습니다. 동의보감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올린 까닭을 보면 16세기 말까지 펴낸 주요 동양 의학서를 집대성했으며, 중세 아시아의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살필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고,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 및 보급에 이바지했음을 꼽지요. 또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지역에서 당시 나온 어떤 의학서보다 체계적이며, 인용한 출처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우리나라는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의궤와 함께 모두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되었지요. 오른 수량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습니다. 현재까지 세계기록유산은 193건이 인데,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 슈베르트 악보 모음집, 카리브해 노예 기록유산, 안데르센 원고 필사본과 편지, 코페르니쿠스 자서전 등이 있습니다.
1629. 격조 있는 음식문화를 말해주는 떡살 흰떡 곧 절편을 만들고 참기름을 발라 고운 무늬를 찍어 넣었으니 떡살 하나에 고소함 가득 묻어납니다. 그 절편에 무늬를 찍어내는 도장판을 떡살이라고 하는데 떡본 또는 떡손·병형(餠型)이라고도 하지요. 떡살은 재질에 따라 단단한 소나무·참나무·감나무·박달나무 등으로 만드는 나무떡살과 사기·백자·오지 같은 것 등으로 만드는 자기떡살이 있습니다. 떡살 무늬는 주로 부유하거나 오래 살 것을 비손하는 뜻의 수복(壽福) 글씨무늬를 비롯하여 십장생(十長生)과 봉황·국수무늬, 잉어·벌·나비·새·박쥐 등의 동물무늬와 태극무늬, 빗살 등의 기하학적 무늬, 만(卍)자 등의 불교적인 무늬와 꽃· 수레바퀴무늬 등 다양합니다. 옛말에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겨레는 떡 하나라도 보는 즐거움을 통해 구미를 돋웠지요. 그만큼 떡살은 우리 겨레의 격조 있던 음식문화를 말해줍니다.
1628. 일제강점기 때 남산 조선신궁 안엔 경찰관출장소도 있었다 일제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 신궁은 1925년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명치왕 등 일본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는 신들을 받들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조선신궁 안에는 본전, 중문, 사무소 등과 함께 경찰관출장소도 있습니다. 신궁은 종교시설물입니다. 그 종교시설물 안에 경찰관출장소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본 홍문당에서 펴낸 《일본통치하의 해외신사》란 책을 보면 일본 헌병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신사로 데려가 강제로 신사참배 시켰는데 이에 반발하여 온 나라에서 신사를 습격하여 부수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잇달았다고 합니다.
1627. 점잖은 선비 산행으로 여름을 나다 점잖은 옛 선비들은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났을까요? 종들처럼 훌렁훌렁 옷을 벗어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물에 발만 담그는 탁족(濯足)을 주로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겨레는 이열치열을 좋아한 사람들이어서 선비들은 산행도 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의 우두머리였고, 잘못에는 추상같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남명 조식(曺植, 1501~ 1572)도 1558년 여름날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여행을 떠났지요. 그 내용은 《두류산(지리산)유람록》에 나오는데 그들은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 기름떡 등의 음식과 구급약도 준비했습니다. 조식은 그저 산만 오르지 않고 지리산 곳곳의 유적들을 통해 역사 속 인물들을 생각했지요. 또 세금이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도 유람록에 썼습니다. 지리산 산행은 자신이 선비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재충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조식은 기행문 끝에서 지리산을 11번이나 올랐다고 말합니다.
1624. 유카타를 자랑스럽게 입는 일본 여성들 최근 일본 교토 여행을 했습니다. 그때 받은 큰 충격 가운데 하나는 10~20대의 일본 젊은이들이 일본 전통옷의 하나인 유카타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커플티 입는 것처럼 이성 친구와 손을 잡고 유카타를 나란히 입은 장면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심지어는 혼자서는 입기가 참 어렵다는 기모노를 입은 여성도 자주 눈에 띄었지요. 유카타는 일본 전통옷으로 기모노의 일종입니다. 주로 평상복으로 사용하는 간편한 옷이지만, 원래 일왕이나 귀족들이 목욕한 후에 입는 옷이었지요. 무로마치시대 말기에서 에도시대 초기에 이르러 민간에서도 유카타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나들이옷으로 입게 된 때는 메이지시대 이후라고 합니다. 우리 한복은 잊혀가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랑스럽게 입지요. 건강과 아름다움을 함께 아우르는 우리의 한복도 그렇게 인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1623. 치마에는 스란치마, 무지기, 쓰개치마도 있었다 한복 치마의 삼국시대 기록을 보면 상(裳) 또는 군(裙)으로, 조선시대 세종 2년에는 쳐마[赤]라고 나옵니다. 중종 때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츄마 상(裳)은 남자옷이며, 츄마 군(裙)은 여자옷이다.”라고 했지요. 치마의 종류는 참 다양한데 일상복인 겉치마 외에 조선시대 예복용인 스란치마·대란치마·전행웃치마가 있으며, 속치마인 대슘치마·무지기 등이 있습니다. 또 겉치마 위에 덧입는 행주치마, 바깥나들이를 할 때 얼굴을 가리던 쓰개치마도 있었지요. 한복 치마는 서양옷처럼 몸에 딱 맞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의 굵기와 키에 따라 융통성 있게 입는 형태이지요. 다시 말하면 날씬한 사람이나 뚱뚱한 사람이나 모두 껴안는 그런 옷입니다. 또 한방에서는 여자가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음으로써 펄럭이는 치맛자락으로 음습한 기운이 뭉치는 것을 소통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1623. "데이케어센터" 뭐하는 곳인지 아세요? 최근 서울시 노인복지과는 서울형노인복지 프로그램 중 를 만들어 오는 7월 15일 여러 곳에서 개소식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치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돌보는 사업을 하는 서울형 주간보호센터로 보이는데 기존의 '주간보호센터'와 차별화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지요. 하지만, 영어 대신 토박이말로 “어르신 돌봄집”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우리나라는 한글을 사랑하는 이들의 반대에도 2007년 7월부터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로 바꾸었지만 중국은 센터라는 말을 쓰지 않고 꼭 자기네 한자를 써서 중심(中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English education center”를 우리는 영어교육센터쯤으로 하겠지만 중국은 꼭 “영어교육중심(英語敎育中心)’이라고 쓰지요. 누가 과연 슬기로운 것일까요? 서울 지하철 승강장 비상전화의 , 또는 과 함께 비난받을 일이 아닐까요?
1621. 마음이 아플 때마다 만든 골무가 1,015개 평생 친구도 없이 오로지 옛 한복과 더불어 살아온 고 석주선(1911~1996, 전 단국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장) 선생은 다이아몬드를 팔아 헌옷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돌았다고 걱정하기까지 했다고 하지요. 선생은 생전에 방에 큰 거울을 놓고 그렇게 사들인 헌옷을 정성스럽게 손질한 뒤 꼭 옷을 입어보는 버릇이 있었답니다. 옷을 입어보며 그 옷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일생을 살았을까 생각하곤 했다고 하지요. 선생은 쌀알 크기만 한 바늘땀으로 누빈 여인의 누비저고리를 아름다운 한복의 백미로 꼽았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마음이 아플 때마다 골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무려 1,015개나 되었다고 하지요. 그렇게 아름답고 치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한복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나 봅니다.
1620. 파리를 사러 다니는 승목사를 아시나요? “무관 양 아무개가 공주목사가 되었는데 삼복에 파리가 많은지라 양이 이를 싫어하여 아전으로부터 기생과 종들에 이르기까지 매일 아침 파리 한 되를 잡아 바치게 하고 이를 독촉하니 위아래 할 것 없이 다투어 파리를 잡느라 쉴 겨를이 없었다. 이리하여 주머니를 가지고 파리를 사러 다니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을 파리 ‘승(蠅)’ 자를 써서 라고 불렀다.” 위는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글입니다. 용재총화는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白眉)라는 평가를 받지요. 또 고려에서 조선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지고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 ·문화 ·역사 ·종교 ·예술 등 당시 사람들의 삶을 골고루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구비문학(口碑文學) 연구 자료로 활용되지만,승목사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많으므로 이 무더위에 원두막에서 파리를 쫓으며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1617. 궁궐이나 왕릉에 있는 돌짐승을 아시나요? 경복궁 등 궁궐이나 왕릉에 가보면 돌짐승 곧 석수(石獸)가 있습니다. 특히 광화문 앞엔 해태란 상상동물이 있었는데, 이는 불을 막으려고 세워두었었다지요. 또 경복궁 영제교 근처의 석축 위에는 천록 또는 산예라 불리는 돌짐승이 물길을 통해 들어오는 악귀가 있는지 감시합니다. 물론 근정전 부근에도 많은 돌짐승이 있구요. 여주 세종영릉 등 왕릉 주변에는 사자, 양, 말 모양으로 만든 돌짐승들이 있습니다. 특히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국보 제162호 진묘수는 통로 가운데에서 밖을 향해 놓여 있었다지요.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습니다. 또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 있으며,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똥 싸는 구멍이 달렸을 정도로 사실적이지요. 이 돌짐승은 무덤 들머리에서 악귀를 쫓는 구실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