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산 통도사 봉발탑 - 이 달 균 아하, 이제 보니 석가모니도 사람이셨군. 밥공양에 남루 걸치고 급히 뒷간도 가는, 배고픈 젊은 스님들 줄 지어 공양 간다. 밥그릇 닮은 탑이 이채롭다. 이 통도사 봉발탑(보물 제471호)은 석가모니의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인데 이런 모양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결국 부처님도 중생처럼 발우공양 시간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탑이다. 통도사는 스님들의 교육기관으로 선원(禪院), 율원(律院), 강원(講院)을 모두 갖춘 총림 사찰이다. 젊고 잘 생긴 학인스님들 용맹정진 도중 축구를 비롯한 놀이도 한다. 공양시간 잘 맞춰 가면 줄 지어 발우 들고 공양 가는 스님 모습 만날 수 있다. / 이달균(시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13년 전인 1906년 오늘(7월 22일)은 이인직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가 일간신문 ‘만세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날입니다. 우린 학생시절 학교에서 《혈의 누》가 신소설 첫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배웠고, “독서국민운동”이라는 블로그에는 2018년 1월 추천도서로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혈의 누》에는 작품 전반적으로 친일 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지요. 이윤옥 시인의 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2011》에는 “《혈의 누》 작가 이인직이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의 병합을 부추긴 일”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 이인직은 한말 을사5적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리는 친일파 이완용의 비서로 을사늑약의 막후 조정자로 실질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쓴 작품이니 작품 속에는 친일 사상이 흐르는 것은 분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또 “저는 이완용 수상을 만나서 빨리 거취를 결정하시도록 삼가 아뢰었습니다. 2천 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 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이 두 길밖에 따로 수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랜 동안 배달겨레가 전승하고 나라밖 이산(디아스포라)과 분단에서도 함께 향유해 온 아리랑. 이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르고, 2014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129호로 지정되어 우리 겨레는 물론 전 인류의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 아리랑은 영남지방에서도 끊임없는 전승이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대구의 배경숙 선생과 영남민요연구회가 그 주인공이다. 20일 저녁 5시 15분 ‘배경숙의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 음반 발매 기념을 겸한 아리랑과 함께 해온 15년 기록 재현무대가 대구 대명동의 대덕문화전당에서 펼쳐졌다. 배경숙 선생은 1997년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회장 정은하 선생의 문하로 소리에 입문, 이후 영남대학교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남지역 전래민요와 아리랑 연구가로, 구미의병아리랑 등의 작사 작곡자로, 전통음악 무대 기획 연출가로, 경산아리랑제와 같은 아리랑 컨텐츠 전문가로 활동해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배경숙 선생의 영원한 스승이며, 대구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연구가인 고 이재욱 선생에게 음반을 바치는 행사가 먼저 열렸다. 배경숙 선생은 이재욱 선생을 상징한 오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은 낱말풀이와 말밑(어원)을 적은 책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맥설(밀가루)을 진말(眞末)이라고 부른다. 사투리로는 진가루다. 면(麵)은 음식의 이름이다. 국수(匊水)는 사투리다.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정약용이 이렇게 쓴 까닭은 ‘면’은 반드시 밀가루여야 하는데, 조선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도 ‘면’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지요. 중앙아시아의 카프카스 지방이 원산지로 알려진 밀은 우리나라의 기후와는 맞지 않아 재배할 수가 없었기에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20세기 이전만 해도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밀가루로 만든 국수 대신 옥수수가루로 ‘억지국수’를 만들어 먹었으며, 옥수수 앙금으로 쑨 묵에 가까우면서 올챙이처럼 생긴 ‘올챙이국수’를 먹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부터 들여온 밀을 제분하는 공장이 평양과 인천에 들어서면서 밀국수를 먹을 수 있었지요. 그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으로부터 무상으로 밀이 들어온 덕분에 밀가루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고 일본에서 발명한 인스턴트 라면도 1963년에는 나라 안에서 스스로 만들게 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미국 워싱턴D.C. ‘한국전쟁기념공원’에는 민간인들이 지게로 탄약을 운반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무명옷 차림의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로, 최전방 전투지역에서 식량과 탄약 등 군수품을 져 날랐지요. 물론 정식 이름은 ‘한국노무단(KSC·Korea Service Corps)’이었지만, 지게 모양이 알파벳 A자를 닮았다며 ‘지게부대(A Frame Army)’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의 숨은 공신인 이 지게부대원들은 산에 오를 때는 보급품, 내려올 때는 부상병을 실어 날랐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만 전사자 2,064명, 실종자 2,448명에 이른다고 하지요. 문헌 기록을 보면 중국어 교본이었던 《역어유해(譯語類解, 1690년)》에는 지게의 뜻을 풀어서 ‘배협자(背狹子)’로 적었으며, 1766년에 유중림이 펴낸 《증보산림경제》에는 ‘부지기(負持機)’라고 나왔습니다. 지게를 뜻하는 말인 ‘지기’에 ‘진다’는 뜻의 ‘부(負)’를 덧붙인 말이지요. 무게는 5∼6㎏인 이 지게는 곡식을 비롯하여 나무ㆍ거름 등 사람의 힘으로 나를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 옮기는 데 쓰는데 건장한 남자는 한 지게에 50∼7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07년 7월 16일 매국노들이 주도한 내각회의에서 마침내 황제 폐위가 결정되었고, 이를 안 고종은 ‘짐은 죽어도 양위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버텼습니다. 그러나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이 수백 명의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고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지요. 고종은 계속 버티면서 황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궁내관들과 신하들을 배석케 했지만 송병준은 이들을 모두 물리쳤으며, 법부대신 조중응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전화선들을 모두 끊은 뒤 양위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새벽 5시에 이르러 고종은 황태자 대리 조칙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은 분명히 황태자 대리를 선언한 것이지 양위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제는 7월 20일 아침 9시 서둘러 양위식을 거행했지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즉위식인데 양위식은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내관이 이를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치른 엉터리였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종로를 비롯한 도성 곳곳에는 “임진난을 보라, 을미년의 일은 어떠했던가! 일본인의 포학은 그칠 줄 모르니 우리들의 도탄은 눈앞에 도달했다.”라는 전단이 붙기 시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코에 들어간 빨대로 괴로워하는 바다거북의 영상이 빠르게 퍼지면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나아가 환경을 생각하자는 운동에 힘이 실리고 있다. 물건을 사고 지나치게 포장된 상품의 포장지를 버리고 오는 운동인 ‘플라스틱 어택’.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 우리말을 아끼는 마음을 더해 ‘과대 포장 거부 운동’으로 부르는 것은 어떨까? 국립국어원은 지나치게 쓰고 있는 외국어를 알기 쉽게 다듬어 2019년 제2차 다듬은 말을 발표했다. 지난 2019년 4월 15일부터 2019년 5월 17일까지 ‘그로서란트’, ‘래핑 광고’, ‘클린 이팅’, ‘플라스틱 어택’, ‘플랜테리어’를 갈음할 우리말을 공모하였다. 국민이 제안한 다듬을 말을 바탕으로 말다듬기위원회에서 의미의 적합성, 조어 방식, 간결성 등을 고려하여 지난 6월 19일 다듬은 말을 뽑았다. 뽑힌 5개의 다듬은 말은 2주 동안 국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최종 결정되었다. 이번에 다듬은 말들은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다. - 매장에서 장보기를 마치고 바로 옆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재료식당(←그로서란트)이 인기를 끄는 공간이 되고 있다. - ○○구가 청사 내 엘리베이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는 책을 펴내기 위해 종이를 마련하고, 목판이나 금속활자를 만드는 일에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에 개인이 아닌 나라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나라 외에도 돈이 많은 가문들이 자체적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족보나 문집처럼 가문을 드러내거나 오래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 한해서 이루어졌지요. 그밖에 필요한 책이 있으면 빌려 보거나 아니면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책을 소장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20세기가 되자 발달된 서양의 인쇄기술이 들어오면서 전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책을 많이 찍어낼 수 있게 되었는데, 1905년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출판사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특히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불처럼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때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출판사들은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익히는 데 필요한 책들은 물론 애국심을 일깨워주는 역사전기물을 쏟아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에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발행 허가를 받은 책만 펴낼 수 있었고 그 결과 그 이전에 펴냈던 책들 가운데 상
인제 봉정암 5층 석탑 - 이달균 허위허위 설악 하고도 소청봉 올랐으니 암자만 보지 말고 석탑도 보고 가자 구름은 태산을 품고 산은 세상 품었는데 옛일 다 잊었다 하나 왕조마저 잊었으랴 거룩한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곳에 풍진에 마모된 역사 고려 숨결 깃들다 허위허위 소청봉 아래 해발 1,244m 높이의 봉정암 오른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이곳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보니 많은 이들의 기도처로 유명하다. 탑은 암석의 정상을 다듬어 모난 2단의 높고 낮은 탑신(塔身)받침을 조성하고 받침 밖으로 16판(瓣)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을 돌려 새겼다. 다행이도 결손 된 부분 없이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굽이굽이 설악산의 능선과 어울린 모양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 이달균(시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일찍이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도를 배워서 성인(聖人)의 정밀하고도 미묘한 경지를 엿보고,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하여 아주 오랜 세월을 통해 판가름 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호방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빼어난 글을 구사하여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 간의 세 가지 유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어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시문을 짓는 학문을 가지고 견주어 논의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이는 1814년(순조 14)에 펴낸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들어 있는 《일득록(日得錄)》의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 따르면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같은 우주 간의 유쾌한 일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시문을 짓는 정도와 견줄 수 없는 종요로운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득록》은 신하들의 눈에 비친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지요. 이 책은 정조 7년(1783) 처음 시작되었는데, 사관(史官)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