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회루에 많은 들비둘기가 깃들고 있으므로 더렵혀져서 칠을 다시 해야 하는데, 이 폐단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철망(鐵網)’을 만들어 둘러친다면 만드는 공력은 쉽지 않겠지만 한번 만든 뒤에는 비둘기가 깃들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칠을 해야 하는 비용도 덜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종실록》 중종 15년(1520년) 12월 18일 치 기록입니다. 경복궁에 가서 근정전을 바라다보니 실록에서 말한 철망 그물이 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시(罘罳)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위 《중종실록》처럼 ‘철망(鐵網)’ 또는 승망(繩網)이라는 말로 등장합니다. 이는 새들이 건물에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참새와 같은 새들이 드나들면서 싸는 똥은 보기에도 안 좋을 뿐 아니라 강한 산성이어서 목조건물에는 치명적인 나쁜 영향을 주지요. 그래서 처마 밑에 ‘부시’를 쳐 새들이 드나드는 것을 아예 막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해, 새가 둥지를 틀면 구렁이가 이를 잡아먹어 살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가 집을 못 짓게 하여 궁궐에서 살생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뜻도 함께 있지요. 또 본 건물의 좌우 긴 집채인 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6월 21일 ‘하지’, 일년중에 제일 해가 긴 날입니다. 그 까닭을 아십니까? 하지라는 것은 태양이 지구의 북쪽으로 가장 만히 올라올 때요 따라서 북반구에서는 태양에 쪼이는 시간이 일년중 가장 길게 되고 밤이 가장 짧게 되는 관계상 요새는 여덟시가 지나도 어둡지 안코 아츰에도 일즉 밝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동아일보 1936년 6월 28일 치 기사로 어린이에게 하지를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열째인 ‘하지(夏至)’입니다. 하지 무렵에는 가뭄이 심하게 들기도 하고, 곧 장마가 닥쳐오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일손이 매우 바쁩니다. 누에치기, 메밀 씨앗 뿌리기, 감자 거두기, 고추밭 매기, 마늘 거두고 말리기, 보리 수확과 타작, 모내기, 늦콩 심기, 병충해 방재 따위는 물론 부쩍부쩍 크는 풀 뽑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남부지방에서는 단오 앞뒤로 시작된 모심기가 하지 무렵이면 모두 끝나는데, 지금은 많이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지요. 조선시대에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6월 22일(토) 낮 2시부터 박물관 강당에서 스물세 번째 ‘책사람’ 강연을 진행한다. ‘책사람’은 책을 대출하고 열람하듯이 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강연 형식으로 열람하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정기 프로그램이다. 이번 책사람 강연자는 《우리 옛노래 모둠》의 저자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윤성현 강사다. 강연에서는 송강 정철이 쓴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시조 <훈민가> 등 우리말을 잘 살려 쓴 한글 시가를 함께 낭독하고 자세히 살펴 볼 예정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많은 한글 가사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이 《송강가사》다. 임금(선조)에 대한 충정을 여인의 심경으로 표현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 등이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한글 가사는 한자를 잘 모르는 부녀자 계층까지 즐길 수 있었고, 노래이기에 더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또한 누구나 손쉽게 한글로 가사를 쓸 수 있었기에 가사는 점차 전 계층이 참여하고 즐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는 <자리짜기>라는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탕건을 쓴 것으로 보아 몰락한 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자리를 짜고 있지요. 고드랫돌을 앞으로 넘겼다 쥐로 넘겼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말없이 자리를 짭니다. 열심히 자리를 짜야만 생계를 이을 수 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분과는 달리 이렇게 일을 해야만 하는 신세가 처량한 탓인지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짭니다. 그런가 하면 그 뒤에선 이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한 여인네가 역시 말없이 물레를 돌리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론 물레를 돌리고, 왼손으론 고치를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또 그 뒤에선 아들로 보이는 한 어린아이가 책을 읽고 있지요. 한 방 안에서는 자리를 짜고 물레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고 “공자왈 맹자왈”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합니다. 예전 조선시대 때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아기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와 다듬이질 소리 그리고 글 읽는 소리를 꼽았다고 합니다. 이 집은 가세가 기울어 부부가 자리짜기와 물레질로 종일 힘들게 일을 해야 하지만, 대신 아이의 책을 읽는 소리로 삶 속의 고통을 잊으려 합니다. 책 읽는 아이에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黃犢新生母愛殊(황독신생모애수) 누런송아지 막 태어나니 어미 사랑 남다른데 橫跳豎躍入山廚(횡도수약입산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산속의 집으로 들어가네 不知似許便娟質(부지사허편연질) 모르겠네 이렇게도 예쁜 본바탕이 何故他年作笨夫(하고타년작분부) 어찌하여 뒷날엔 거칠어져 버리는지 이 시는 다산 정약용의 <하일전원잡흥 효범양이가체(夏日田園雜興 效范楊二家體)> 곧 범성대(范成大)와 양만리(楊萬里)의 체를 본받아 여름날 전원의 이러저러한 흥취를 노래한 것입니다. 누런 송아지가 어미 배 속에서 막 태어나니, 어미 소는 핥아주며 자식 사람을 베풉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자, 그 송아지는 천방지축(天方地軸)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산속에 있는 농가의 부엌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저렇게도 예쁘고 귀엽던 송아지가 커서 뒷날 어미소가 되면 왜 거칠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하지요. 다산은 시골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노랫말 속에서도 뒷날 거칠어지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산은 강진 유배기에 500여 권이라는 엄청난 양의 책을 씁니다. 추사 김정희가 그랬듯 다산도 유배가 그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중국 진나라 학자 진수가 펴낸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부여’ 전기에 “나라 안에 있을 때에는 흰옷을 좋아한다. 흰옷에 큰 소매가 달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우리 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러나 흰옷은 더러워지기 쉬워 오래 입기 어려울 뿐더러 동쪽 나라여서 푸른빛 옷을 입자고 하여 조선시대 내내 여러 차례 복색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 《정조실록》 17년(1793) 10월 20일 치의 내용처럼 그런 시도는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좌의정 김이소 등에게 지시하기를, “창의(氅衣,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평상시 입던 옷)를 푸른색으로 하자는 것과 소매가 넓은 폐단에 대해 영의정이 초기(草記, 간략히 왕에게 아뢰는 문서)에 붙여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체로 창의 문제는 위에서 지시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법령으로 정했다가 지키지 않아 그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법령을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벼슬아치들은 푸른색과 흰색 두 벌을 갖추어서 관청에 갈 때는 푸른색을 입고 집에 있을 때는 흰색을 입기도 했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보물 제1677-2호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李匡師 筆蹟 員嶠法帖)>가 있습니다.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은 18세기 이름난 명필이던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것으로 글씨를 받은 사람이나 제작연대는 적히지 않았지만, 서첩에 찍힌 원교은자(員嶠隱者), 이광사(李匡師), 이광사필서(李匡師筆書), 이광사인(李匡師印), 이광사장(李匡師章), 도보(道甫), 원교(員嶠), 이도보씨(李道甫氏), 조선국이광사자도보(朝鮮國李匡師字道甫) 등의 도장을 통해 귀양살이 이전 중년의 필적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이 서첩은 모두 40쪽으로 앞쪽의 25쪽은 밝은 옥색 비단에 먹으로 썼고, 가운데 9쪽은 매우 옅은 담옥색(淡玉色) 비단에 먹으로 썼으며, 뒤쪽의 6쪽은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 금박 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로 썼습니다. 옥색ㆍ담옥색ㆍ검은색 비단에 먹과 금니를 써서 작고 큰 글자를 전서ㆍ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의 오체로 정성스럽게 썼지요. 전서(篆書)를 쓴 부분에는 글자마다 오른쪽 위에 붉은 먹으로 석문(釋文, 전서ㆍ초서ㆍ행서체의 글자를 보통의 글자로 고쳐 쓴 것)을 달아 보기에 편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건국 초기에는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에 종루(鍾樓)를 두고 의금부의 물시계를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을 맞추어 밤과 새벽으로 종을 쳐서, 만백성이 밤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때를 조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물시계가 맞지 않거나, 또 맡은 사람의 착오로 공사간(公私間)이 출입할 때에 이르고 늦은 실수가 매우 많으므로 심히 불편하오니, 원컨대, 궁중의 자격루(自擊漏) 소리를 듣고, 이것을 전하여 종을 쳐서 의금부까지 이르게 하소서.“ 이는 《세종실록》 세종 19년(1437년) 6월 28일 기록입니다. 물시계는 모든 백성의 시간이었지만 물시계를 맡은 군사가 격무에 시달려 깜박 졸기라도 하면 파루 치는 시간을 놓치게 되고 그러면 온 나라의 시간이 달라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자명종물시계를 만들면 군사가 꼬박 시계만 들여다보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음은 물론 잘못하여 벌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장영실로 하여금 자명종물시계 곧 자격루를 만들게 했습니다. 자격루는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로 중파수호에서 소파수호로 물을 흘려보내 시간을 가늠케 합니다. 그런 다음 24시간 동안 두 시간에 한번 종을 치게 하고, 해가 진 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향신문 6월 11일 치에는 “오래전 사라진 전차? 미래형 공공교통 ‘트램’으로 돌아온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대전시는 도로 위를 달리는 철도인 ‘트램’을 대전시가 새롭게 꿈꾸는 교통수단이라고 합니다. 전국 17곳에서 20개 노선이 추진ㆍ검토 중이며, 대전시가 첫 사업 승인을 받아 2025년 완공할 예정이라고 하지요. 트램(tram)은 도로에 깐 레일 위를 주행하는 교통수단으로 예전 전차와 다를 바 없지요. 전기를 써서 움직이므로 오염 물질이 적은 친환경 교통수단이며 공사비는 지하철의 6분의 1 수준으로 적습니다. 하지만 지하철과 달리 길 위를 차지하고 다니므로 요즘 같이 번잡한 오히려 도로에서는 교통 혼잡을 일으킬 수 있고 노선을 구성하기도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차는 1899년 5월 서울에서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1960년 초반까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 되었습니다.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전차381호는 1930년 무렵 일본에서 들여와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 동안 서울 시내를 실제로 운행하였던 전차입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중반 이후 버스ㆍ승용차 등 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