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누가 감히 ‘벅수’(法首)를 ‘장승’(長栍)이라고 부르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수호신 역할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장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보 같은 짓거리다. 벅수를 보고 장승이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찌꺼기다.” 이는 20여 년 동안 장승과 벅수를 연구해온 황준구 선생이 외치는 말입니다. 황 선생에 따르면 '댱승'(쟝승)은 '길'을 가는 '나그네'와 '벼슬아치'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만들어 세운 단순한 기능의 ‘푯말’(이정표)로 ‘우편제도’가 도입된 뒤인 1895년 기존 ‘역참제도’가 기능을 다하고 폐지되어, 임무가 끝나 우리 땅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벅수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때 만들어 세운 얼굴이 험악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중국땅'에서 생겨, 떼를 지어 몰려오는 무서운 '역병'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역병'과 '잡귀'들의 고향땅 중국을 다스리고 있는, 무섭고 힘센 '왕'이나 ‘장수’의 모습을, '벅수'로 표현하여, 거꾸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다만, 조선시대에 세워진 벅수는 한 쌍으로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천하대장군’, 지하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문에는 한 유명 예술가의 글씨가 올랐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를 글씨들로 가득했습니다. 특히 가운데에는 읽기도 어려운 커다란 한자로 쓴 글씨와 낙관이 있습니다. 주변에 쓴 한글은 한자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말입니다. 과연 그는 이렇게 쓰고 독자와 진정 소통하려는 마음을 가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한글로 쓴 것들도 “지지마라. 비참하다”거나 “자선은 반체제적이다”거나 “경쟁과 차별의 뜨거운 채찍”이라고 써서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희는 몰라도 된다. 나만 잘 났으면 된다.”라고 외치는 어쭙잖은 덜 떨어진 지식인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예전 이탈리아에서는 지배층들이 라틴어만 쓰면서 잘난 체를 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문학가 단테는 <토박이말을 드높임>이라는 논설을 써서 귀족들에게 돌리고, 이탈리아말로 위대한 서사시 <신곡>을 지어 발표한 뒤로는 라틴어가 아닌 쉬운 이탈리아말로도 얼마든지 시도 짓고 학문도 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탈리아가 이탈리아말 세상이 되었지요. 그리고 라틴어를 배우고 쓰지 않는다 해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어구의 곁에 누운 석수(石獸, 돌짐승)가 있다. 얼굴은 새끼 사자 같은데, 이마에 뿔이 하나 있고 온몸에는 비늘이 있다. 새끼 사자인가 하면 뿔과 비늘이 있고, 기린인가 하면 비늘이 있는 데다 발이 범과 같아서 이름을 알 수가 없다. 후에 비교하여 고찰해 보니, 중국 하남성 남양현의 북쪽에 있는 종자(宗資)의 비(碑) 곁에 두 마리의 석수(石獸)가 있는데, 그 짐승 어깨에 하나는 '천록(天祿)'이라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벽사(辟邪)'라 새겨져 있다. 뿔과 갈기가 있으며 손바닥만 한 큰 비늘이 있으니 바로 이 짐승이 아닌가 싶다.“ 이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는 천록(天祿)에 대한 글입니다.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흥례문을 들어서면 작은 개울 곧 금천(禁川)이 나옵니다. 그러면 작은 다리 영제교(永濟橋)를 건너야 하는데 이 영제교 좌우로 얼핏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돌짐승 곧 천록이 양옆으로 두 마리씩 마주보면서 엎드려 있습니다.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이 짐승들은 혹시라도 물길을 타고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과 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공주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08호 “계유(癸酉) 글씨 삼존천불비상(三尊千佛碑像)”이 있습니다. 이는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작품으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과 글을 새겨 놓은 것입니다. 사각형의 돌 전체에 불상을 새겼는데, 앞면의 삼존불(三尊佛)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나머지 면에는 작은 불상을 가득 새겨 놓았지요. 삼존불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기단 위에 새겨져 있는데, 4각형의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습니다. 옷을 양 어깨에 걸쳐 입은 본존불은 윗몸이 많이 닳아서 세부 모습을 알아볼 수 없지요. 양 옆의 협시보살도 손상이 많아 세부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무릎 부분에서 옷자락이 교차되고 있어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불상들의 머리 주위에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조각된 머리광배가 비교적 파손이 덜 된 상태입니다. 이 삼존불상 말고도 사각형의 돌 전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불상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깨진 부분에도 불상들이 있었을 것을 생각한다면 천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셋째 '경칩(驚蟄)'이다. 경칩은 놀라다는 ‘경(驚)’과 겨울잠 자는 벌레라는 뜻의 ‘칩(蟄)’이 어울린 말로 겨울잠 자는 벌레나 동물이 깨어나 꿈틀거린다는 뜻이다. 만물이 움트는 이날은 예부터 젊은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은행씨앗을 선물로 주고받고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수나무 암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졌다. 그래서 경칩은 토종 연인의 날이라고 얘기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뒤의 ‘돼지날 (해일, 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하도록 했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 고대 유가의 경전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도 “이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라고 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경칩에 개구리 알이나 도룡뇽 알을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하였으나 어린 생명을 그르치는 지나친 몸보신은 금해야만 한다. 또 단풍나무나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즙을 마시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 유튜버 키노시타 유우카 씨는 최근 유튜브에 '명란 크림치즈 버터죽'을 먹는 영상을 올리면서 "명란젓은 일식이지만 양식에도 잘 맞는다."고 말했다가 한국 누리꾼들이 단 항의 댓글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명란젓의 유래가 잘못 전달되도록 말한 부분에 대해서 정말 죄송하다.”라고 고개 숙였다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사실 명란젓은 한국의 전통 먹거리임에도 전 세계 소비량의 90%를 일본이 차지하기에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효종 3년(1652년) 기록에는 “대구 알을 밀봉해 올리지 않고 명태 알을 올린 데 대해 해당 관리를 엄중하게 캐물어 밝혀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어 명태알이 궁중에도 들어가는 먹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명란젓은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등장하고 명란젓 만드는 법은 조선 말기에 펴낸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젓갈 담그는 때는 동지 이전이 좋다고 합니다. 명란젓은 지방 함량이 3.2%이며, 팔미트산과 올레산, EPA, DHA가 많아 영양가가 풍부한 먹거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毋將一紅字(무장일홍자) ‘홍(紅)’자 한 글자만을 가지고 泛稱滿眼華(범칭만안화) 널리 눈에 가득 찬 꽃을 일컫지 말라 華鬚有多少(화수유다소) 꽃 수염도 많고 적음이 있으니 細心一看過(세심일간과) 세심하게 하나하나 살펴보게나 이 시는 위항도인(葦杭道人)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가 쓴 ‘위인부령화(爲人賦嶺花)’라는 제목의 한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꽃은 ‘붉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꽃들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제가는 꽃에도 다양한 빛깔이 있고, 또한 꽃에서 잘 보이지 않는 섬세한 부분인 수염의 경우에는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다면서 꽃은 수염들부터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는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세상만사와 만물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통념을 꾸짖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인들도 자기가 생각한 것이 무조건 진실이라고 우기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특히나 잘못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분명한 사실까지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꽃들은 빛깔은 물론이고 수염이 많고 적은 것부터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양 시인들은 녀자와 장미 (薔薇)를 노코는 시를 못 지으리만큼 녀자와 장미를 노래하엿다 하면 동양의 시인들은 술과 매화가 업고는 시를 지을 수가 업스리만큼 술과 매화를 을펏슴니다. 그는 지나(중국) 시인이 그랫고 일본 시인이 그랫고, 우리 조선의 시인들이 또한 그랫슴니다. 그리고 정다운 고향을 떠나 천리 객장에 몸을 붓친 외로운 손도 고향의 친구를 만나 고향 소식을 무를 때에는 가정의 안부보다도 뜰 압헤 심어잇는 매화의 피고 안 핀 것을 먼저 뭇고 과년한 처녀가 그리운 님을 기다릴 때에도 매화 열매의 일곱 남고 셋 남고 필경은 다 떠러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더욱 간절 하얏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5호(1927년 03월 01일)에 실린 “매화(梅花)와 수선(水仙) 이약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왜 그렇게 우리 겨레는 매화를 좋아했을까요? 조선 중기 문인 신흠의 상촌집에는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매화는 한평생 추운 한파에 꽃을 피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매화를 절개가 굳은 꽃으로 보았고, 그래서 사군자의 하나로 꼽은 것입니다. 눈 속에서 꽃망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두 손으로 높이 들고 떨리는 목청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후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시위 군중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만세운동의 날을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국장)에 맞춘 덕에 이를 보러 상경한 군중까지 모두 함께 한 것입니다. 이때 길은 흰옷 입은 사람들로 꽉 찼음은 물론 어린 여학생들과 부엌 살림하다 나온 아낙, 지팡이를 짚은 노인 등도 끼여 있었지요. 3·1만세운동 준비 때부터 참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은 동아일보 1949년 3월 1 치에 실린 <왕년의 투사들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성(萬歲聲)이 일어나는데 순식간에 장안을 뒤집어놓은 것같이 천지를 진동했다. 시내 전체가 문자 그대로 홍진만장(紅塵萬丈, 햇빛에 비치어 붉게 된 티끌이 높이 솟아오름)이 되었다. 시가는 전부 철시(撤市)했고, 가가호호에서는 납세 거절을 부르짖었으며, 각 가정에서는 관공리(官公吏)들이 사표를 쓰느라고 바빴으며, 학교 등에서는 앞을 다투어 파업을 일으켰다.” 3.1만세운동이 있기 전인 1919년 1월 21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 총을 겨눴다 /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 관통하던 날 /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 불이 붙었다” 이는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2권의 동풍신 애국지사를 기린 시 가운데 일부입니다.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고 했을 정도로 알려졌던 두 애국지사는 어찌 된 영문인지 한쪽은 만고의 애국지사로 추앙받고 한쪽은 그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해 많이 듣고 배우고 자랐습니다. 노래까지 불렀었지요. 그렇지만 동풍신 열사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지를 못했지요. 지금도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는 기념관도 있고, 많은 학자들과 언론매체에서 다루고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추모제까지 열리고 있지만, 동풍신 애국지사는 기념관은커녕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와 동풍신 애국지사는 똑같이 3.1만세운동에 앞장 섰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순국했으며,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 하다가 똑같이 조국에 목숨을 바친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 분들을 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