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한해 가운데 보름달이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은 예부터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비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정월대보름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이날은 남녀노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정월대보름 무렵에 하는 세시풍속으로는 ‘망월’ 말고도 더위팔기(賣暑), ‘다리밟기(踏橋)', ’부럼 깨물기‘, ’줄다리기‘, ’복토 훔치기‘, ’용알 뜨기‘, ’달집태우기‘, ’지신밟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복토 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비손합니다. 또 “용알 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가장 먼저 우물물을 길어오면 그해 운이 좋다고 믿었던 재미난 풍속이지요. 정월대보름엔 세시풍속 말고도 여러 가지 명절음식 곧 약밥, 오곡밥, 복쌈, 진채식(陳菜食), 귀밝이술 따위를 먹었습니다. 먼저 약밥은 찹쌀을 밤, 대추, 꿀, 기름, 간장들을 섞어서 함께 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겨우내 참았던 그리움이 실핏줄로 흘러 버드나무 가지마다 저리 파란 물이 들었구나 강나루 얼음 풀리면 그대 오시려나 코끝을 스치는 바람 아직은 맵지만 내 마음은 벌써 봄 원영래 시인의 시 <우수>입니다. 올제(내일)은 24절기 둘째인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는 말 그대로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뜻인데 이름에 걸맞게 봄비가 내리곤 합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은 봄비와 함께 꿈을 가지고 오는지도 모르지요. 그 봄비가 겨우내 얼었던 얼음장을 녹이고, 새봄을 단장하는 예술가인 것입니다. 기상청의 통계를 보면 지난 60년 동안 우수에는 무려 47번이나 비가 왔다고 하니 이름을 잘 지은 것인지, 아니면 하늘이 일부러 이날 비를 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수 때 나누는 인사에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있으며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고도 합니다. 봄꽃이 피어나기 전 마지막 겨울 추위가 선뜻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앙탈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봄은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金馬(금마) : 금으로 만든 말 * 玉尊(옥준) : 옥으로 만든 술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어로 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은 독자들은 말합니다. 스물일곱 꽃다운 청춘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는 시를 통해 서정적인 언어의 아름다움과 그 순수한 언어 속에 담긴 깊은 함축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저의 바람은 일본인들이 윤동주 시인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상식을 벗어난 폭력성을 깨달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시를 통해 보여준 메시지야 말로 ‘시의 힘’이며 그것은 한국과 일본을 뛰어 넘어 전 세계인이 느낄 수 있는 ‘보편성’이기도 합니다.” 이는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일본어로 완역한 우에노 미야코(上野 都) 시인이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인 지난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백년편지’에 윤동주 시인께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입니다. 내일 곧 2월 16일은 74년 전인 1945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윤동주 시인이 27살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한 날입니다. 일제는 오로지 한글로 시를 쓴다는 죄목을 윤동주에게 씌워 감옥에 가두고 의문의 주사를 놓아 죽게 한 것입니다. 윤동주가 순국한 날 한국보다도 일본에서 윤동주 시인의 추모모임이 많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악기 가운데 양금(洋琴)은 18세기 영조(英祖) 때 유럽에서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악기로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 “구라철현금(歐羅鐵絃琴)”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원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 ‘덜시머’라는 악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양금과 모양 그리고 연주방법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악기는 십자군전쟁 때 유럽으로 넘어갔고,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쳄발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금은 피아노의 할아버지인 셈입니다. 양금은 ‘영산회상’, ‘천년만세’, ‘수룡음’ 등의 정악 합주 악기로 쓰입니다. 그 가운데 양금과 단소 병주로 연주되며, 용이 읊조리는 소리라는 ‘수룡음(水龍吟)’은 양금의 영롱하고 맑은 소리를 매력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입니다. 또 양금은 18세기부터 줄풍류와 가곡, 시조 따위의 노래반주에 쓰여 왔으며, 궁중무용인 ‘학연화대’ ‘처용무합설’에서도 그 소리를 만나 볼 수 있지요. 사다리꼴의 상자 위에 두 개의 긴 괘를 세로로 질러 고정시키고 괘 위에 14벌의 금속줄을 가로로 얹은 다음, 대나무를 깎아 만든 채로 줄을 쳐서 맑은 금속성의 음을 얻습니다. 몸통은 오동나무판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눈이 내리면 소년은 연을 날렸다. /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지면 / 더욱 높이 띄웠다. 팽팽한 연실을 곱은 손으로 / 움켜쥐고 실을 풀거나 당기면서 연과 이야기했다. / 연이 공중바람을 타고 높디높게 오르면 연실이 모자랐다.” 신영길 시인의 <나는 연 날리는 소년이었다> 시 일부입니다. 여기서 연(鳶)은 종이에 가는 댓가지를 붙여 실로 꿰어 공중에 날리는 놀이 용구인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날려 왔지요. 그런데 한국의 연 특히 방패연은 그 형태와 구조면에서 다른 나라의 연과 달리 방구멍이 잇는 매우 과학적인 구조입니다. 이 방구멍은 맞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뒷면의 진공상태를 메워주기 때문에 연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 연을 높이 띄우거나 그림, 모양 등에 관심을 두는 중국, 일본 등의 연과는 달리 한국의 연은 연을 날리는 사람이 다루는 것에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가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기, 급하게 올라가거나 내려가기는 물론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연은 연 날리는 사람에 의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서 연싸움(연줄 끊기)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군산 선유도(仙遊島) 망주봉(望主峰) 일원」은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경관이 아름다워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3호 지정되었습니다. 군산 앞바다의 63개나 되는 크고 작은 섬들을 고군산군도라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워 신선이 놀았다는 선유도(옛이름 군산도)에 「군산 선유도 망주봉 일원」은 자리하고 있지요. 망주봉은 옛날 억울하게 유배된 한 충신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서해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섬 사이의 수평선 사이로 붉은 해가 가라앉을 때 사방은 온통 불바다를 이루는 황홀한 광경 곧 ‘선유낙조’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망주봉에서 바라본 해넘이는 그 어떤 것보다도 으뜸이라고 하며, 360도 사방으로 바라볼 수 있어 다른 명소와는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값어치가 있다고 하지요. 2001년 문화재청이 펴낸 《명승자원조사보고서 전라북도편》에 따르면 선유도는 선유8경이 있는데 이 망주봉에서 6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유8경’이란 이 망주봉과 선유낙조를 비롯하여 앞산섬, 주산섬, 장구섬의 세섬이 귀향하는 범선을 닮았다는 ‘삼도귀범’, ‘명사십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안현(務安縣)에서 진상한 푸른 대죽(大竹)이 가느다랗고 작을 뿐만 아니라 반은 푸르고 반은 누렇고 전체가 말라버려서 잘라서 불에 쪼여 죽력(竹瀝)을 뽑는다는 것은 맨 처음부터 논할 바가 아닙니다. 양남(兩南, 호남과 영남)의 푸른 대죽을 각 해당 고을에서 특별히 직접 내놓도록 한 것은, 실로 전하께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없애주고자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신들이 어찌 감히 우러러 전하의 뜻을 잘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죽력을 취할 수 없겠기에 지금 막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는 《정조실록》 정조 22년(1798) 11월 26일 기록으로 죽력이란 담죽(淡竹, 솜대)이나 고죽(苦竹, 왕대)을 한자 남짓하게 잘라 시루 위에 올려놓고 중간을 지지면 대 속에서 진액이 나오는데 이 물이 곧 죽력으로 약간 끈끈하지요. 《증보산림경제》에서는 “대나무의 명산지인 전라도에서 만든 것이 유명하다. 청죽(靑竹)을 쪼개어 불에 구워 스며 나오는 진액과 꿀을 소주병에 넣고 중탕하여서 만드는데 생강즙을 넣어도 좋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 말기 황현(黃玹)이 지은 야사(野史) 《오하기문(梧下奇聞)》에서 고문을 당한 전봉준이 사람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이는 100년 전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청년들이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2월 8일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일부입니다. 이날의 함성은 이내 조선에 전해졌고 도쿄의 2ㆍ8독립선언은 이후 3ㆍ1만세운동의 불씨를 당겼지요. 이 2ㆍ8독립선언에는 김마리아 지사 등 여성들도 함께 했습니다. 이날을 맞아 지난 2010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책 《서간도에 들꽃 피다》 1권을 펴낸 이후 해마다 1권씩 10권의 책을 완간한 이윤옥 시인이 책펴냄 잔치를 합니다. 이윤옥 시인은 한 권에 20분 씩 모두 200분의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록한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시인은 이를 바탕으로 300인의 여성독립운동가를 1권의 책에 담은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명사전》도 지난해 펴낸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잡힌 유관순 열사만 여성독립운동가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설날 아침이면 일찍이 남녀노소가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낸 뒤에 할아버지ㆍ할머니, 아버지ㆍ어머니 등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한 다음 일가친척과 이웃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습니다. 요즘엔 직장인들은 회사 윗사람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엔 새해 초에 대문 앞에 세함(歲銜)을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와 각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높은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아문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한양(漢陽)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들이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고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높은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