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는 2018년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의 마지막 무대로, ‘국립극장 송년판소리-안숙선의 심청가 강산제’를 오는 12월 27일(목) 무대에 올립니다. 여기서 ‘완창 판소리’란 판소리 한 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부르는 것을 말하지요. 그 시작은 고 박동진(朴東鎭, 1916~2003) 명창이 1968년 9월 30일 서울 남산에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 강당에서 다섯 시간 반에 걸쳐 <흥보가(興甫歌)>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른 것입니다. 20세기 이후 판소리의 공연은 주로 ‘협률사(協律社)’에서 했습니다. 협률사는 1902년 고종 등극 40주년을 기리기 위해 지었던 서양식 원형 극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협률사 공연은 서양식 극장무대에서 판소리와 창극, 기악, 무용 등 민속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함께 공연하는 것이었기에 판소리를 부르는 시간은 10~20분에 불과하였지요. 따라서 소리꾼들은 청중들이 좋아하는 특정 대목만을 반복적으로 불렀고, 판소리는 이른바 ‘토막소리’ 공연이 주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968년 박동진 명창이 ‘판소리완창(完唱)’을 시작한 까닭은 잊혀가는 판소리를 다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이는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유언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입니다. 12월 19일 오늘은 86년 전(1932년) 윤봉길 의사가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25살의 나이로 순국한 날입니다. 윤 의사의 주검은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는데, 광복 뒤인 1946년에야 조국으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 수뇌부를 처단한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품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1월 “문재인 대통령, 군용기로 제주 귤 200t 북한에 선물”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남한에서는 지금 흔한 과일이 되었지만 북한에서는 귤을 재배할 수 없으니 정말 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귤이란 정말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제주에서만 소량 재배되었고, 그것을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 건너 가져와야만 했으니 임금에게 진상하는 것 말고는 보기도 어려운 과일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주목사가 진상한 귤을 받은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나눠주었고, “황감제(黃柑製)”라는 임시과거를 열어 기뻐했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관에서 대장을 가지고 나와 그 과일 개수를 세고 나무둥치에 표시를 해두고 갔다가 그것이 누렇게 익으면 비로소 와서 따 가는데, 혹 바람에 몇 개 떨어진 것이 있으면 곧 추궁하여 보충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값을 징수한다. 광주리째 가지고 가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다. 또 그들을 대접하느라 닭을 삶고 돼지를 잡는다.” 이것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귤과 유자나무를 가진 백성에게 벼슬아치들이 횡포를 부린다는 얘기입니다. 이에 그 백성은 몰래 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의 불행은 우리다움을 버리고 외국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라고 본다. 자기 나라에서 자기 것이 푸대접 받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 대학원 진학시험에 국어가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다운 학문을 해야 한다. 학문 갈래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학문은 우리말과 우리글로 하자. 유학으로 배워 온 지식이나 이론은 우리말로 바꿔 정리하도록 하자. 그래야 우리다운 학문을 할 수 있다.” 지난 2017년 10월 25일 부산일보에 난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의 “우리말로 학문하기와 노벨상”이란 제목의 칼럼이다. 그는 “올해에도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아직도 노벨상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다.”라면서 제 나라 말로 학문을 하지 않으니 노벨상을 받을 턱이 있느냐는 얘기다. 이런 주장처럼 우리말로 학문하기 위한 학자들 단체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있다.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지난 2001년 철학ㆍ역사학ㆍ사회학ㆍ문학ㆍ종교ㆍ 문화 등 국내 학자 120여 명이 발기인으로 함께하여 발족한 단체다. 그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가 지난 12월 15일 낮 2시부터 숙명여대 과학관 607호에서 30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즈음은 아이옷이고 어른옷이고 간에 말끔하게 만들어 놓은 기성복을 사 입는 시대가 되고 말았지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이전 아니 100년 이전의 옷이란 한 땀 한 땀 여인들의 정성스런 손끝이 아니면 입을 수 없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5월 4일부터 7월 13일까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열렸던 어린이 전통옷 특별전 ‘마음을 담아 지은 사랑, 아이옷’전은 바로 그런 옷들을 지었던 여인들이 마음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는 배내옷부터 어여쁜 돌복은 물론이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혼례옷 그리고 삶을 마치고 무덤에 들어갈 때 입는 수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이 전시회에는 있었습니다. 태곳적부터 우리 겨레가 즐겨 입던 옷들이 이제는 ‘전통옷’ 이라는 이름이 붙어 박물관에 가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옛 여인들이 가족사랑으로 한 땀 한 땀 지은 한 벌의 옷이 드러내는 역사적 무게는 선비들이 지은 책 한권의 무게 보다 더 깊고 그윽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전시회에서 아이들 옷 까치두루마기(색동 소매가 달린 남자아이의 두루마기. '때때옷'이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12월 15일 저녁 6시 서울 혜화동 JCC 아트센터에서는 윤은화 외 20인의 ‘한국양금앙상블’ 제1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이날 사회를 본 국악인 정준태의 말처럼 많은 이에게 생소할 양금은 적어도 이 공연장에서 만큼은 청중들을 환상 속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양금은 국악기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에서 들어온 악기다. 그런데 분명 현악기건만 손으로 튕기거나 활로 문지르는 것이 아니고 채로 쳐서 소리는 내는 것이어서 타악기로 분류된다. 또 정확한 음정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음높이를 표현할 수 있어서 ‘유율타악기(有律打樂器)’라고도 한다.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字譜)》 등 문헌에도 등장하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양금악보 30여종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더라도 예전엔 대중의 사랑을 받았을 양금은 지금은 그 이름조차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한동안 잊혀있던 악기다. 이를 다시 대중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윤은화 대표는 ‘한국양금앙살블’을 꾸리고 그 첫 번째 연주회를 연 것이다. 첫 연주는 악기 구성에 양금이 공식 등장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겨울방학을 맞아 관람객들에게 더 많은 전시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기획특별전<사전의 재발견>을 2019년 3월 3일(당초 2018년 12월 25일)까지 연장한다. 사전을 주제로 한 첫 기획특별전 <사전의 재발견> 연장 전시 현재 진행 중인 기획특별전 <사전의 재발견>에서는 지식의 길잡이인 사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140여 년 동안 사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한불자전韓佛字典》(1880), ‘조선말 큰사전 원고’(1929-1942, 한글학회 소장) 등 사전과 관련된 중요 자료 122건 211점을 모아 대거 선보이는 첫 전시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여겨 볼만한 자료는 우리말 사전의 기틀이 된 원고 ‘말모이’(1910년대)다.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키기 위해 집필한 첫 국어사전 원고 ‘말모이’ 우리말을 빼앗기고 글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던 일제강점기, 1911년부터 주시경(周時經, 1876-1914)과 그의 제자들이 모여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첫 사전 원고 ‘말모이’를 집필하였다. ‘말모이’는 말을 모은다는 뜻으로 ‘사전(辭典)’을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가운데는 제92호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무늬정병”이 있습니다. 정병(淨甁)이란 원래 인도에서 승려가 여행을 할 때 밥그릇이나 옷과 함께 메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차츰 이 물병이 부처님 앞에 깨끗한 물을 바치는 공양구(供養具)로서 그 쓰임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또 병에 들어 있는 감로수(甘露水)를 통해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정병은 바로 이러한 자비의 상징물이기도 했지요. 정병의 재료는 주로 청동과 도자기인데 특히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에는 향로와 함께 중요한 불교 공양구의 하나로 많은 정병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시대 정병은 달걀형의 몸체와 매끈하게 빠진 긴 목 위로 뚜껑 형태의 둥근 테가 있고, 그 위로 다시 대롱처럼 길게 솟아 있으며 몸체의 한쪽에는 중간을 잘록하게 좁힌 비녀 모양의 부리(귀때)가 돌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긴 대롱 꼭대기로는 물을 넣는 주입구(注入口)며 부리로 물을 따르도록 되어있지요. 고려시대 정병을 보면 몸에 무늬를 새기고, 여기에 얇게 꼬은 은실을 박아 넣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으로 한가로운 물가의 풍경이나 구
[우리문화신문=문경 김영조 기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캄캄하던 세상, 멀리서 아낙의 문경새재 아리랑이 애처롭게 들려온다. 그러면서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멀리서 “또닥또닥또닥또닥......” 다듬이질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이윽고 보이는 문경의 고즈넉한 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경 아낙들의 다듬이질, 김장, 메주 쑤는 모습들이 친근하게 보인다. 이 영상은 지난 12월 11일 열린 “디아스포라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 여는 영상이었다. ▲"디아스포라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 여는 동영상" 촬영 강주진, 제작 바톤프로덕션 영상에서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이 아리랑 도시를 선포하고 수없이 많은 아리랑 사업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에 의한 아픔의 극복이었습니다. 아리랑은 길 위의 노래이자 고개의 소리입니다. 나라밖 동포 1세대가 고개를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라밖 동포 3,4세가 문경새재를 넘어 문경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문경아리랑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우선 공연은 사할린 4세 신 아리나(6살) 어린이의 ‘사할린 아리랑’으로 시작됐다. “풍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물 9근에 아교 4근을 넣고 불에 녹인 다음 순수한 그을음 10근을 넣어 잘 반죽한다. 반죽된 것을 다른 그릇에 옮기고, 남은 물 1근을 적당히 뿌려 가면서 잘 찧는다. 이어서 깊숙한 방에 평판을 깔고 습한 재를 한 치 정도 깔고 종이를 덮는다. 그 종이 위에 먹을 옮겨 놓고, 다시 종이로 덮고 위에 다시 습한 재를 한 치쯤 덮는다. 그대로 3일을 두었다가 각 장을 바르게 네모로 자른다. 자른 먹 위에 마른 재를 한 치쯤 덮고, 2~3일 지난 후 꺼내어 깊숙한 방 평판 위에 놓고 여러 차례 뒤집어 가며 말린다." 이는 1554년(명종 9년) 조선 초기의 문인 어숙권(魚叔權)이 펴낸 백과사전 격인 책 《고사촬요(攷事撮要)》에 나온 먹을 만드는 법입니다. 좋은 먹은 무엇보다도 벼루에 갈 때 부드러우면서도 미끄러지듯이 쉽게 잘 갈려서 쓰기에 편하고 마음 가는대로 붓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이러한 바탕 위에 농담(濃淡) 곧 진한과 묽음이 좋으면 으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먹의 특성을 보면, 먼저 색깔이 검고, 오래 돼도 빛깔이 바래지 않으며, 더욱더 깊은 맛이 나는 것은 물론, 썩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우리나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