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제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2002호 《이익태 지영록 (李益泰 知瀛錄)》이 있습니다. 《이익태 지영록》은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1633~1704)가 1694년(숙종 2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래 1696년(숙종 22) 9월까지 재임기간 동안의 업무와 행적, 제주 관련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책 이름 《지영록(知瀛錄)》에서의 ‘영(瀛)’은 ‘영주(瀛州)’를 뜻하는데 이는 제주의 옛 이름이지요. 책 서문에 따르면 이익태는 제주목사를 지내면서 알게 된 제주도의 열악한 생활상과 누적된 폐단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참고하기를 바라며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수록된 내용은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가기까지의 여정, 재임기간 중의 공무수행, 제주도에 부임할 때의 행적과 그 과정에서 지은 시ㆍ제문ㆍ기행문 따위이며, 특히 조선 사람이나 일본인의 표류(漂流)에 관한 기록이 비중 있게 실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1687년(숙종 13) 김대황(金大璜)이라는 제주도 사람이 배를 타고 나간 뒤 파도에 휩쓸려 베트남(安南)에 이르렀다가 귀국한 내용 곧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은 조선시대 베트남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지요. 《이익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1월 27일 문화재청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물 제2010호로 지정했습니다. “수막새”는 목조건축물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한 둥그렇게 만든 기와를 말합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주 사정리(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이지요.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상점에서 사서 일본으로 빠져나갔으나 1972년 10월 국내에 반환되었습니다. 이 수막새는 기와 제작틀을 이용해 찍은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달리 손으로 직접 빚은 작품으로, 비록 오른쪽 아래 일부가 없어졌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두 뺨의 턱 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스러운 모습을 볼 때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얼굴에 잔잔한 웃음은 신라인의 미소라 널리 알려진 것이지요. 이 신라인의 미소 말고도 제주도에 “탐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수막새도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이 수막새는 1960년대 초기에 절터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수막새는 척박한 땅, 바람 많은 고장에서 시달리며 살아온 제주여인의 얼굴이 기와에 새겨진 모습라고 하지요. 풍요로운 얼굴에서 원만하고 너그러운 그리고 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열 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11월 30일(금)에 ‘각필구결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 권66을 펴낸다. 이 책은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 권66 (11세기 불교문헌)에 기입된 옛 문자 각필구결(刻筆口訣)을 해독한 것이다. 대장경 속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문자, 각필구결 각필구결(또는 점토구결)은 한문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읽기 위해 한자 사이에 토(吐)를 단 것이다. 종이 위에 뾰족한 필기도구(각필)로 점이나 선 등을 자국 내어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를 표현하였다. 붓으로 적지 않고 각필로 새긴 이유는 귀한 경전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각필구결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고, 종이에 특수한 조명을 비스듬히 비출 때 비로소 움푹 패인 점과 선 자국이 드러난다. 각필구결은 눈에 잘 띄지 않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발견되지 않다가 2000년 7월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된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 권8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국내 각필구결 자료 십여 점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미공개 신자료인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 권66을 이번에 발간되는 자료집을 통해 소개한다. 즈믄 해(천년) 전 우리말 사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60대 가정주부 장 씨는 비몽사몽간에도 간밤에 온 문자가 떠올라 손말틀(휴대전화)을 찾았다. 역시 카드 결제 승인 알림 문자였다. 그런데 내용이 좀 이상했다. 새벽 2시가 다될 무렵이라 한참 자고 있었던 시간에 결제가 된 것도 이상했지만 ‘해외 승인’이라니. 혹시나 싶어 장 씨는 딸 아이 방으로 가 “네가 어제 새벽에 내 카드로 나라밖 결제 했니?”라고 물었더니, 이번엔 딸이 어리둥절. 알고 보니 장 씨의 카드 번호를 도용한 누군가가 나라밖 직구 누리집에서 결제를 했던 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에누리 행사인 블랙프라이데이가 지난 11월 22일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나라밖 직구족’들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이 시기에 맞춰 우리나라 카드 이용자들의 카드 정보를 이용한 나라밖 부정거래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신용카드의 나라밖 부정사용 피해 사례와 대처 방안을 살펴보자. 피해자 반응 속도부터 확인하는 치밀함? 위에서 언급한 사례는 올해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되기 열흘 전에 발생한 실제 사례로, 아래와 같은 결제 승인 알림 문자 메시지를 통해 부정결제를 눈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종 5년에 지은 창덕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때 복구는 하였지만,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일부 풍수지리가의 말을 믿고 불길하게 생각하여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을 망설였습니다. 이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란 말을 듣고 이곳에 궁터를 잡게 한 뒤 그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광해군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습니다. 이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동궐인 창덕궁에 견줘 서궐이라고 불렀지요. 이 경희궁에는 여러 임금들이 머물렀는데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승하했습니다. 또 경종이 태어난 곳도, 영조가 승하한 곳도, 정조가 즉위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때 정전ㆍ동궁ㆍ침전ㆍ제별당ㆍ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쓰이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7년 궁의 서쪽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5년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이는 1920년 오늘(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강우규 애국지사가 사형당하기 전 남긴 짤막한 시입니다. 강우규 지사는 거사 당일인 9월 2일 남대문역에 도착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마차를 향해 겨레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한발의 폭탄을 힘껏 던졌습니다. 천지를 진동하듯 터진 폭탄은 비록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요. 강 지사는 사형이 확정된 뒤 옥바라지를 하던 아들 중건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음과 같이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중간 줄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갈이 만난 둘째 배달문화는 일본 도쿄의 김경자 일본조선족예술단장이다. 김 단장은 연변 조선족 동포로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연변을 뒤흔들어 놓은 유명가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잠잠 했었는데 2007년, “쉼터 제1회 일본조선족노래자랑대잔치”에 초대가수로 초청받고 다시 무대에 섰다. 이후 다시 가수로 명성을 날렸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에 더하여 우리문화신문 일본 도쿄지사장에 취임했다.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려내는 일에 새롭게 뛰어드는 것이다. 김단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만나보았다. - 가수로서 일본ㆍ중국ㆍ한국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어떻게 가수가 되었나? “동네방네에서 유행가시조인 가수 “백년설”이 살아서 돌아온 분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던 아버지의 DNA를 타고 났던지 대학시절 대학가요제에 나가 노래하면서 노래 잘한다는 소문이 났었다. 내가 직접 작사하고, 연변대학교 예술학원의 리정이란 학생이 작곡해준 노래 ”소녀의 사랑은“도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노래가 하고픈 나머지 대학생 때인 1985년 연변방송국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 방송국 음악편집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문화재 가운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맘대로 일본으로 가져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경복궁 자선당 유구입니다.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집으로 세종 때 처음 지었습니다. 자선당은 “어진 품성을 바탕으로 하는 집”, “떠오르는 해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문종은 세자 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따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뜯기고 허물어진 조선 궁궐의 수난을 상징하는 문화재입니다. 20세기 초 경복궁에는 33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광복 뒤 남은 건물은 30여 동에 불과할 정도로 일제는 궁궐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미술관이나 동물원을 세웁니다. 그리고 헐어낸 건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계 절과 기생집, 부자들의 집으로 재조립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그런 전각들 가운데 경복궁 자선당도 들어있는 것이지요. 1915년 일제는 조선통치 5돌을 기리는 박람회를 열기 위해 자선당 등 동궁 지역을 철거하고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짓습니다. 이때 철거작업을 한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총독에게 부탁하여 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치 가족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을 봅니다. 얼굴이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의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면서 아기 발을 다독여주고 있습니다. 또 그림에서 아기는 엄마 젖을 빨기도 하지만, 오른손으로는 엄마 젖을 만지작거리고 있지요. 그 오른 쪽으로는 눈물을 닦고 있는 한 아이가 서있습니다. 마치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서러움을 삭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왼쪽에는 이 아이들의 누나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다 컸다는 듯 혼자 복주머니를 만지며 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원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 1726∼?)의 <자모육아(慈母育兒)>라는 그림인데 신한평은 풍속화가로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입니다. 《정조실록》에 보면 “임금이 8월 26일 화사(畫師) 한종유(韓宗裕)》ㆍ신한평(申漢枰)ㆍ김홍도(金弘道) 3인에게 명하여 어진(御眞) 각 1본(本)을 그리게 하시고, 9월 1일에는 영화당(暎花堂)에 왕림하시어 승지 등 신하들의 등을 만나보고서 어진 초본(初本)을 보시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신한평은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화원으로 보입니다.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