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紅葉埋行踪(홍엽매행종) 단풍잎이 발자국을 묻어 버렸으니 山家隨意訪(산가수의방) 산속 집을 마음 가는 대로 찾아가네. 書聲和織聲(서성화직성) 글 읽는 소리 베 짜는 소리와 어울려 落日互低仰(낙일호저앙) 석양녘에 서로 낮았다 높았다 하네. 이는 영ㆍ정조 때의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년~1793)가 지은 한시 「절구絶句」 이십이수(二十二首) 가운데 하나다. 단풍잎이 발자국을 묻어버린 어느 가을날 남정네의 글 읽는 소리는 여인네의 베 짜는 소리와 어울려 우리네 가슴에 다가온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문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사마천 《사기》를 천 번 읽고서야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라고 말했다. 진사과란 합격자에게 성균관 입학 자격과 문과 응시 자격을 주는 과거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기》를 천 번이나 읽어야 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는 심지어 《사기》 백이전의 경우 1억1만3천 번 읽었다고 한다. 물론 그때 억(億)은 10만을 뜻한다고 하니 11만3천 번을 읽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과거가 신분상승의 유일한 기회이다시피 했지만, 이에 합격하려고 글 읽기를 목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평양 의열사(義烈祠)라 함은 세인이 다 아는 바와 가치 임진란에 평양 의기(義妓)로 유명한 계월향(桂月香)을 봉사(奉祀)하는 곳인데 을미년(乙未年)에 다시 진주 의기 옥개(玉介, 논개)를 겸사(兼祠, 함께 제사 지냄)하되 매년 음력으로 3월 15일과 9월 15일에는 평양 기생들이 합동하야 제사를 행하는 관례(慣例)가 유(有)한바(아래 줄임)...” 이는 1921년 04월 26일 치 동아일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1928년 일제가 불허한 출판물 목록에는 ‘계월향전’이 들어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소설이나 영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 가운데 1962년 박종화의 ‘논개와 계월향’이라는 소설이 발표됐고, 임권택 감독이 1977년에 만든 ‘임진왜란과 계월향’이라는 영화도 있었지요. 또 만해 한용운 선사가 “계월향에게” 라는 시까지 남겼는데 광복 이후까지 “북에는 계월향, 남에는 논개”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임진왜란의 2대 의기로 꼽혔습니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계월향이라는 평양기생은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던 소섭이란 왜장의 시중을 들게 되었지요. 그런데 계월향은 그 당시 장군이었던 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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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버스정류장에 커다란 글씨로 광고판이 붙어 있습니다. “너의 최애 캐릭터 뭐니?”입니다. 여기서 “최애”란 말은 아마도 가장 사랑한다는 뜻으로 한자 ‘崔’ 자와 ‘愛’ 자를 모은 글자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쉬운 말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나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쓰지 않고 억지로 이렇게 한자를 모아서 쓰는 것은 잘난 체에 다름 아닙니다. 게다가 뒤에는 영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이야 대중이 만들어 갈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이 풍성해지는 것이구요. 하지만 우리말이 아닌 한자나 영어 같은 외국어ㆍ외래어를 써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잘못하면 우리말을 짓밟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보다는 1990년대 주로 대학생들이 만들어내 지금 잘 쓰이는 동아리, 해오름식 같이 우리말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요. 또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우리나라에는 <국어기본법>이란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법 제14조 제1호에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인 광주광역시교육청은 “The 청렴하면 多 행복해요”라고 써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의 전통혼례에는 신랑 일행이 혼례를 올리러 신부집으로 향할 때, 안부(雁夫) 곧 기럭아비가 목기러기를 들고 따라갑니다. 신랑이 신부집 안마당에 준비한 초례청(醮禮廳)에 사모관대로 정장을 하고 들어서면 신부집에서는 전안청(奠雁廳)이라 하여 낮은 상 위에 붉은 보자기를 깔고 뒤에 병풍을 쳐둡니다. 신랑이 이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기럭아비가 기러기를 신랑에게 전하지요. 그러면 신랑은 목기러기를 받아 상 위에 놓고 절을 두 번 하는데 이런 절차를 “전안지례(奠雁之禮)”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맞아 기러기처럼 백년해로를 하고 살기를 맹서하는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기러기가 암놈과 수놈이 한번 교접하면 평생 동안 다른 것에 눈을 주지 않고 한 쪽이 죽으면 다른 쪽이 따라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전안지례는 혼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신랑이 하늘에 부부되기를 맹세하는 의례인 것이지요. 그 때문에 전안지례를 “소례(小禮)”라고도 합니다. 참 여기서 목기러기는 한자말로 목안(木雁)이라고 하는데 사실 나무를 오리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것으로 혼례에 쓰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입니다. 참고로 전안지례가 끝나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공자와 그의 제자 증삼이 문답한 것 가운데 효도에 관한 것을 추린 《효경(孝經)》 첫 장에는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毀傷 孝之始也(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라는 글월이 있습니다. 이는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 하여 머리털 하나 자르는 것도 불효로 보고 삼갔습니다. 그런데 고종 32년(1895)은 오늘(11월 15일) 김홍집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들의 주도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하게 하는 조처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자 학부대신 이도재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직을 사임하였으며, 또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도 단발령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또 유림의 큰 인물 최익현 선생을 잡아들인 뒤 머리털을 자르려 하자, 선생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지요. 그때 강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들도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했고, 백성들은 단발을 두려워하여 문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70년 지구레코드가 발매한 음반으로 5살 어린이 가수 박혜령의 <검은 고양이 네로>가 국내 가요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1969년 이탈리아의 동요제인 제11회 제키노 도로에서 3위를 수상한 〈검은 고양이가 갖고 싶었어(Volevo un gatto nero)〉가 원곡이었다. 그 ‘제키노 도로 동요제’ 제26회에서 1983년 홍이경ㆍ이진 자매가 ‘아리랑(COREA - ARIRANG)’으로 참가하여 당당히 은상을 받았지만 이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동요제는 1959년 제1회 대회를 열었고, 올해로 61회를 맞이한 동요제로 이탈리아 어린이들 말고도 국제적으로 참가 신청이 되는 권위 있는 음악경연대회다. 당시 발매된 음반 표지를 보면 홍이경ㆍ이진 자매를 정확히 6.5살, 4살로 표기했다. 그 주인공들은 13일 낮 3시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 나와 그날의 감동을 전해줬다. 녹음된 자매의 아리랑은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로 불렀고 어린이합창단이 함께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노래 ‘아리랑(COREA - ARIRANG)’이 수록된 음반을 “디아스포라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를 여는 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춘천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24호 “강릉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江陵 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이 있습니다. 원래 이 불상은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지요.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 부처 두 눈썹 사이에 난 가는 터럭)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약간의 흠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습니다.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지요. 검지를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를 편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는데 같은 곳에서 발견된 또 다른 “강릉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1호)”과는 반대 자세입니다. 특히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견주어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광복 이후 이루어진 훈민정음 연구 역사를 되짚어 보고 미래의 훈민정음 연구 방향을 모색하는 《훈민정음 연구 성과와 전망》(2권 1책)을 펴내 11월 12일부터 국립한글박물관 2층 문화상품점에서 팔 예정이다.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견 이래 한글 창제의 원리와 배경을 찾아내는 훈민정음 연구는 70여 년이라는 긴 역사와 그에 걸맞은 분량, 다양한 학설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나라안팎의 훈민정음 연구 현황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연구물은 그간 펴낸 바 없었다. 이에 국립한글박물관은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부터 학계와 힘을 합쳐 훈민정음 연구 역사를 살펴보고 미래의 훈민정음 연구 방향을 모색하는 사업에 3년 동안 매진하였고, 그 결과물로 《훈민정음 연구 성과와 전망》을 펴내게 되었다. 이번 연구에는 이현희(서울대), 정우영(동국대), 백두현(경북대) 등 나라안팎의 저명한 훈민정음 학자들 12명이 참여하였다. 이 책은 국내 편과 국외 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국내 편은 훈민정음의 창제자, 서지, 국어사 연구 등 모두 8개의 글이, 국외 편은 북한, 일본, 중국, 그리고 서양에서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의 ‘밥짓기’는 천하에 이름난 것이다. 밥 짓는 것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쌀을 정히 씻어 뜨물을 말끔히 따라버리고 솥에 넣고 새 물을 붓되, 물이 쌀 위로 한 손바닥 두께쯤 오르게 붓고 불을 때는데, 무르게 하려면 익을 때쯤 한번 불을 물렸다가 얼마쯤 뒤에 다시 때며, 단단하게 하려면 불을 꺼내지 않고 시종 뭉근한 불로 땐다.” 이는 서유구(徐有榘, 1764년 ~ 1845)가 쓴 조리서 《옹희잡지》란 책에 나오는 ‘밥짓기’ 이야기입니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밥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밥의 종류도 무척이나 많았지요. 먼저 밥의 이름을 보면 임금이 먹는 ‘수라’, 어른에게 올리는 ‘진지’, 하인이 먹는 ‘입시’, 제사상에 올리는 ‘젯메’ 따위가 있습니다. 밥에도 등급이 있다는 말이지요. 물론 벼를 깎은 정도에 따라 현미밥ㆍ7분도밥ㆍ백미밥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밥에 섞는 부재료에 따라서 오곡밥, 콩나물밥, 무맙, 감자밥, 밤밥, 굴밥, 거피팥밥, 햇보리밥, 청태콩밥 같은 것들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 겨레의 밥 가운데 슬기로운 밥이라면 ‘언덕밥’을 들 수 있습니다. ‘언덕밥’은 말 그대로 밥 짓는 방식을 보여 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