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벼르고 별렀던 빔 프로젝터를 드디어 장만한 대학생 ㄱ씨. 프로젝터를 개시할 겸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하기 위해 검색 후 어느 블로그 사이트에서 토렌트(개인 사이 파일 공유 프로그램) 설치 파일부터 내려받았다. 내려받은 설치 파일을 실행하자, 잠시 후 바탕화면이 까만 화면으로 바뀌더니 붉은 글씨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컴퓨터의 파일이 모두 랜섬웨어에 감염되어 파일이 암호화 되었단다! 게다가 동영상 플레이어 프로그램까지 암호화되어 실행되지 않는다! 영화 감상은커녕 소중한 수많은 여행 사진과 자료들을 한 순간에 빼앗긴 것이다! 마음에 드는 노트북용 배낭을 찾을 때까지는 가볍고 편한 파우치(작은 주머니)에 노트북을 넣어 다닐 요량이었던 직장인 ㄴ씨. 어느 날, 출근 인파로 가득한 지하철역 계단을 거의 다 올라올 무렵 발을 헛디뎌 그만 노트북 주머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도착해 노트북을 켜는데 익숙한 파란 화면이 아닌 까만 화면에 오류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드디스크 오류! 오늘 거래처에 전달해야 할 자료를 노트북에서 작업하고 저장해 뒀는데 하드디스크가 완전히 깨져서 안전모드 시동도 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부부는 떡을 하러 나왓다. 남편은 절구에 쿵쿵 빠앗다. 그러나 체가 없다. 동내로 돌아다니며 빌려 오느라고 안해는 다리에 불풍이 낫다. 떡을 찌다가 얼이 빠저서 멍허니 앉엇는 남편이 밉쌀스럽다. (중략) 닭이 두홰를 치고 나서야 떡은 되엇다. 안해는 시루를 이고 남편은 겨드랑에 자리때기를 꼇다. 그리고 캄캄한 산길을 올라간다.” 《개벽 신간 제4호(1935년 3월 1일)》에는 김유정의 ‘소설 금따는 콩밧’이란 제목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위와 같은 떡을 하는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설에서 부부는 시루떡을 해서 산 중턱 콩밭으로 올라가 콩밭에 시루를 놓고 산신께 빌고 있습니다. 이 시루는 떡이나 쌀 등을 찔 때 쓰는 한국 고유의 찜기인데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 초도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것이 있을 정도로 즈믄 해 우리 겨레와 함께 한 도구입니다. 산신 제사 때도 시루떡이 쓰이고, 외동딸 혼례식 때 함 들어오는 날에도 시루떡이 쓰였음은 물론 가을 추수의 풍년제 때도, 기우제 때도 시루떡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시루는 바닥에 있는 구멍을 통하여 뜨거운 김이 올라와 시루 안의 음식이 쪄지게끔 되어 있으며, 시루바닥과 둘레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君歌我嘯上雲臺(군가아소상운대) 李白桃紅萬樹開(이백도홍만수개) 如此風光如此樂(이백도홍만수개) 年年長醉太平盃(연년장취태평배) 그대는 노랫가락 읊조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오얏꽃 복사꽃 울긋불긋 나무 가득 꽃 피었구나. 이런 좋은 경치에 이 즐거움 또한 멋지리니, 세세년년 태평 술잔 가득 마시고 취하리라. 위 시는 조선 영조 때 문신 박문수가 지은 필운대(弼雲臺)라는 한시입니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자고등학교 뒤편에 가면 큰 바위에 弼雲臺(필운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조선 선조 때 이항복이 젊었을 때 장인 권율의 집에 살면서 호를 필운(弼雲)이라 하고 돌벽에 ‘弼雲臺(필운대)’ 석 자를 새겼는데, 꽃나무가 많이 있어서 봄이면 꽃구경하러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기에, “필운대의 살구꽃[弼雲臺杏花)라 하여 성북동의 복사꽃), 흥인문 밖의 버들, 서대문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 탕춘대의 물과 바위 등과 함께 서울의 구경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 필운대 일대는 산수 풍광이 볼 만함은 물론 살구꽃과 복사꽃 같은 여러 가지 꽃이 많아 봄철이 되면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화륜거(火輪車)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중간 줄임) 수레 속에 앉아 영창(映窓)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대한 이수(里數, 길이)로 팔십 리 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였는데, 그곳 정거장에 나눠준 범절(행사용 물품)은 형형색색 황홀 찬란하여 진실로 대한 사람의 눈을 놀래더라.” 위는 〈독립신문〉, 1899년 9월 19일자 기사로 1899년 오늘(9월 18일)은 노량진~인천 간 경인철도가 처음 영업을 시작한 날입니다. 당시 경인선(京仁線)은 노량진과 인천 사이 33.8㎞ 구간으로 우리나라 철도의 맨 처음이 되었습니다. 사실 경인선 철도는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부설권을 따낸 것이지요. 하지만 이후 모스가 본국으로부터의 자금 조달에 실패하였고 이 때문에 경인선 철도 부설 공사는 결국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모스 이후 철도 부설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어 프랑스의 피브릴르(Fives Lile) 회사는 1896년 7월 경의선 부설권을 따내고, 내친김에 서울~공주, 서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40년 오늘(9월 17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모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날입니다. 총사령관에는 지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이 되어 광복군을 이끌었는데 이렇게 광복군을 창설했다는 것은 이전까지 주로 외교나 선전, 의거 활동만 벌였던 임시정부가 마침내 정규군 곧 나라에서 조직해 훈련시킨 정식 군인을 거느렸다는 뜻이지요. 일제에 맞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한국광복군은 1941년 일제가 미국을 침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한국광복군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겠다고 밝힌 뒤 일제에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싸웠지요. 창군 당시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한계도 있었지만 1944년에는 중국군의 지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의 규모는 처음엔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꾸준히 늘어나 1945년 8월에는 700여 명으로 늘어났지요. 일제가 곧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판단한 임시 정부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땅을 되찾기 위해 미군 특수부대 OSS로부터 특별 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국어원(원장 소강춘)은 12일(수) 낮 2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 보고회를 성황리에 열었다. 이번 보고회는 국립국어원에서 4년에 걸쳐 개발한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의 성과를 알리고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로서, 한국어교육학계와 한국어교육 현장 관계자 150여 명이 참석하였다.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은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제시하는 한국어교육 참조 기준이다. 보고회는 발표와 좌담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이날 발표로는 ▲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의 성과(박정아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의 내용(이정희 경희대 교수), ▲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의 활용(박진욱 대구가톨릭대 교수)이 진행되었다. 뒤이은 좌담회에서는 김중섭 경희대 교수를 좌장으로, 강현화 연세대 교수ㆍ김선정 계명대 교수ㆍ김재욱 한국외대 교수ㆍ김정숙 고려대 교수ㆍ안경화 서울대 교수ㆍ이해영 이화여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서 ‘국제 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의 의의와 과제’라는 주제로 좌담과 토의를 진행하였다. 국어원 담당자는 “국제통용 한국어 표준 교육과정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20년 오늘은 박재혁(朴載赫, 1895.5.17. ~ 1921.5.11.) 의사가 부산경찰서에서 거사를 일으킨 날입니다. 박 의사는 중국 고서상(古書商)으로 위장하고, 폭탄을 고서에 숨긴 채 경찰서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선생은 중국 고서에 관심이 많았던 경찰서장에게 고서를 풀어놓는 척 하면서 폭탄을 던졌으며, 이에 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는 죽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박재혁 의사는 이미 나이 열여덟에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항일 잡지를 펴내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던 적이 있었지요. 박 의사는 부산지방법원에서 1920년 11월 2일 사형 언도를 받고, 1921년 2월 14일에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요. 그러나 다시 상소한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사형이 언도되자 박 의사의 어머니와 누이동생뿐만 아니라 방청객 모두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박 의사의 부산경찰서장 폭탄 투척의거 두 달 뒤에는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 1921년 9월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총독부에 폭탄을 던졌으며, 1922년 3월에는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가 결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JTBC-TV 아침 뉴스에서 한 기자는 “땅이 꺼지는 지반침하 현상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땅꺼짐 현상이 생겼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이었습니다. 굳이 “지반침하”라는 한자말을 쓰려는 잘난 채가 아니면 쓸 까닭이 없는 말이 아닐까요? 언론에서는 이 “땅꺼짐”을 “지반침하”를 넘어 “씽크홀(Sinkhole)”이란 영어까지 씁니다. 여기서 “Sinkhole”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석회암 대지(臺地)의 우묵 팬 땅”이라 설명해놨습니다. 그런데 지금 뉴스에 나오는 현상들이 모두 석회암 땅만은 아닐 것입니다. 또 “지반침하(地盤沈下)”는 국어사전에서 “지반이 서서히 내려앉는 현상”라고 풀이합니다. 이에 반해 “땅꺼짐”은 국어사전에는 없고, <오픈사전(독자가 직접 단어를 정의하고 풀이하며 설명할 수 있게 해둔 사전)>에만 “‘땅꺼짐’은 ‘싱크홀(Sinkhole)’의 순화어다. 이와 비슷한 외래어인 ‘돌리네’(Dolineㆍ독일어에서 흘러든 낱말)‘와 ’함몰 구멍"(陷沒-)도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치고 “땀꺼짐”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요? 또 ‘땅꺼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숙종 때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년 ~ 1692년)이 지은 고전소설 《구운몽》이 있습니다. 《구운몽(九雲夢)》은 《금오신화(金鰲新話)》・《운영전(雲英傳)》과 더불어 우리 고전소설의 으뜸이라 평가되며 동아시아 고전소설의 절정이라고도 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사대부가 여성들은 물론이고 임금 영조 또한 신하들과의 대화중에 몇 차례나 《구운몽》을 말하며 지은이가 누구인지 묻고 “진정한 문장가의 솜씨”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따르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하지요. 다만,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는 얘기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담는 ‘액자 소설’의 형식을 취했는데 성진과 육관대사의 ‘외부 이야기’가 양소유와 여덟 여성의 ‘내부 이야기’를 감싸 안은 구조입니다. 《구운몽》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 선비들은 책과 멀리 떨어져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꼭 있어야 하는 서안은 선비의 벗이었지요. 서안(書案)은 글을 읽거나 글씨를 쓰거나 간단한 편지를 쓸 때 사용하는 낮은 책상으로 서상(書狀)ㆍ서탁(書卓)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붓과 먹을 두는 연상(硯床)을 따로 곁들여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원래 서안은 모양에 따라 궤안(机案)과 경상(經床)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궤안은 보통 선비들이 쓰던 것으로 단순한 형태의 것이나, 경상은 절에서 불경을 놓아두는 것으로 여의주무늬, 당초무늬 등을 새겼습니다. 하지만, 뒤에는 이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고 선비들도 경상을 사용하였지요. 서안은 주로 사랑 손님과 마주 대하는 주인의 위치를 말해 주기도 하나, 지체 높은 집에서는 안방에도 갖춰놓고 썼습니다. 서안은 책을 올려놓는 판이 평평해 수수하지만 가볍지 않은 품위가 있으며, 경상은 양끝이 한옥 처마처럼 위로 살짝 비켜 올라간 아름다운 모양입니다. 언뜻 보아도 단단하게 보이는데 제주도의 산유자나무, 전라도의 먹감나무, 대청도의 늙은 뽕나무로 만든 것을 으뜸으로 알아줬습니다. 조선의 서안은 서안을 만든 장인들의 솜씨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