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반항아 화원 최북의 그림 가운데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를 보면 상당히 거친 느낌이 듭니다. 겨울 밤, 귀가하는 나그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가지요. 이 그림이 거칠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거침없는 성격과 고달픈 인생의 최북 자신을 그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것은 이 그림이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닌 손가락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인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두화는 손가락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톱, 손바닥, 손등을 써서 그리는데 털로 만든 붓인 전통적인 모필화(毛筆畵)와는 달리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독창법인 화풍입니다. 원래 8세기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18세기 초에 청나라의 화가 고기패(高其佩)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다고 하지요. 우리나라 화가로는 강세황(姜世晃)ㆍ허필(許珌)ㆍ심사정(沈師正) 같은 이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묵화를 그리는 도구인 붓에는 그 재료에 따라 아기가 태어난 6달쯤 뒤에 처음 자르는 머리(배냇머리)로 만드는 ‘태모필(胎母筆)’이 있고, 볏짚으로 만드는 고필(稿筆), 칡줄기 만드는 갈필, 족제비 꼬리로
[우리문화신문=중국 장춘 김영조 기자] 한국전통음악악회 일행은 지난 6월 28일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실험종합극장에서 한ㆍ중 전통음악교류 20년 잔치를 벌였다.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쪽과 함께 학술대회와 전통음악 공연을 성대하게 치른 것이다. 이후 이들은 29일 백두산에 올랐다. 백두산 천지를 보고 백두산 아래의 이도백하에서 잠을 잔 뒤 일행은 귀국하기 위해 공항이 있는 장춘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춘까지 버스여행은 무려 6시간,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고민의 순간 단장 서한범 회장은 “이동하는 동안 무료하게 잠만 자거나 차창 밖의 풍경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국악인이니 국악 발전을 도모하는 의견 제시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일행은 모두 흔쾌히 동의하여 유병진 인천국악관현악단 지휘자와 김병혜 전남도립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토론은 시작되었다. 장혜숙(순천 판소리동호회 ‘서편제 소리사랑’ 전 회장) “저는 경련과 함께 온 심한 감기몸살로 의사가 백두산에 올라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눈앞에 두고 그냥 말 일은 아니었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한 계단 올라 숨을 가다듬고, 또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백령도는 서해의 가장 북쪽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입니다. 이 백령도의 북서쪽에 있는 포구에는 명승 제8호 “옹진 백령도 두무진”이 있습니다. 이 <두무진>이란 이름은 ‘뾰족한 바위들이 많아 생김새가 머리털 같이 생겼다’하여 두모진(頭毛鎭)이라 불렀었는데 뒤에 ‘장군머리와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하여 두무진(頭武鎭)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지요. 두무진에 솟아 있는 바위들은 그 모양에 따라 코끼리바위ㆍ장군바위ㆍ신선대ㆍ선대암ㆍ팔각정 같은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수억 년 동안 파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과 여러 모양의 기암괴석이 솟아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30∼40m 높이 암벽에는 해국(海菊)이 분포하고 있으며, 해안에는 염색식물인 도깨비고비ㆍ갯방풍ㆍ땅채송화ㆍ갯질경이가 자라고 있으며, 큰 바위 틈에선 범부채(붓꽃과의 여러해살이 풀)가 자라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조선 광해군 때 백령도로 귀양 온 이대기는 《백령지》에서 선대바위를 보고 “늙은 신(神)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두무진은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곳이지요. 백령도에는 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63년 경상남도 의령에서는 강 아무개 씨가 마을 앞 돌밭에서 공사에 쓸 자갈을 거두던 중 가로 40cm, 세로와 높이 각 30cm가량 되는 석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석실 안에는 작은 불상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이 이 불상 광배 뒷면에 쓰인 47자의 글씨를 감정한 결과 이 불상은 평양에 있던 절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글자 가운데 “연가(延嘉)”는 고구려가 홀로 쓴 연호로 보이며, 만든 때는 고구려 안원왕 때인 539년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경선이 의령까지 내려온 적은 없었고 불상이 발견된 곳 일대는 절터도 없었기에 고구려 불상이 이곳에서 발견된 까닭은 의문이었습니다. 그 뒤 학자들이 꺼내든 추론은 당시 고구려에 유행하던 ‘천불사상(千佛思想)’에 따라 불상을 만들어 이웃나라에 포교 목적으로 퍼뜨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이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이란 이름으로 국보 제119호에 지정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이 불상은 전체 높이 16.2㎝, 불상 높이 9.1㎝, 광배 높
[우리문화신문=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두 기관의 교류 20해. 그것도 가까운 곳이 아닌 다른 나라 기관이 20해의 탑을 쌓았다는 것은 정말 기막힌 역사라고 해야 할 일이다. 한국전통음악학회가 2000년부터 해마다 연변에 찾아와 연변대학교 예술대학과 함께 학술회외와 공연으로 찬란한 빛을 내온 것이다. 그제 6월 28일 낮 2시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실험종합극장에서는 한ㆍ중전통음악교류 20년 잔치마당이 열렸다. 먼저 연변대학교 예술대학원 리훈 원장은 환영사에서 “한국전통음악학회와 연변대학 예술학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교류회가 20회를 맞았는데 그 아름다운 결실이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감격스러워 했다. 다음 단상에 오른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은 “이제 우리의 교류가 20해를 맞아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이 교류는 우리의 감정과 정신이 녹아있는 민족음악을 함께 지켜가야 한다는 의지를 실천해온 자랑스러운 결과물일 것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환영사와 인사의 말씀이 끝난 뒤에는 한국전통음악학회가 마련한 악기와 성금을 리훈 원장과 최성룡 부언장에게 전달했다. 또 이에 화답하여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리훈 원장은 한국전통음악학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총독부가 이른바 ‘내선(內鮮) 불교 정책’을 세우고 31본산(本山)을 결성, 만해 한용운 선생을 연사로 초청했습니다. 억지로 끌려나온 그는 단 2분 동안의 자문자답으로 강연을 마쳤지요. “세상에 제일 더러운 것은? / 똥! /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 썩고 있는 시체! / 그보다 더한 것은? / 31본산 주지 너희 놈들이다!” 똥 옆에서는 밥을 먹을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일제 총독부에 빌붙은 31본산 주지들이라며 호되게 꾸짖은 것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해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사회장(社會葬) 발기인이 되기를 거부한 만해는 독립군 지휘자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옥에서 순국한 뒤 주검이 되어 나왔는데, 아무도 무서워 나서지 않았을 때 만해가 나서서 깎듯이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합니다. 또 선생은 일본어를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검은 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원고지에다 ‘내지(內地, 日本)’라 써야 할 경우 빈 칸으로 남겨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불교 개혁을 이끈 스님이었지만, 훌륭한 문학가이기도 했지요. 선생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268호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편병 (粉靑沙器 象嵌蓮花文 扁甁)”이 있습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가 쇠퇴하면서 백자와는 다른 형태와 무늬, 구도를 가진 매우 독특한 도자기입니다. 높이 19.1㎝, 아가리 지름 5.7㎝, 밑지름 10㎝인 이 병은 일정하게 무늬를 찍는 인화문과 표면에 백토를 씌우는 분장법을 쓴 것을 빼면, 고려청자와 다를 바 없는 질감을 가지고 있어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 편병의 모양은 배 지름이 높이보다 길어서 양감이 있고 둥급니다. 편병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만들어졌지만 이러한 모양은 주로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에서 나타나며 시대가 내려오면서 앞뒤가 더욱 납작해집니다. 이 병에 표현된 무늬를 보면 아가리 밑에 구슬 모양의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작은 국화 무늬를 찍었으며, 그 둘레에 연꽃무늬를 상감하여 테두리를 만들었지요. 배 부분의 앞ㆍ뒤 편평한 곳에는 구슬모양으로 마름모 형태의 꽃을 만들고, 그 안에 흑백상감을 한 연꽃을 새겨 넣었습니다. 양쪽 면에는 국화무늬를 찍은 것을 배경으로 덩굴무늬를 흑상감하였으며, 아래쪽에는 연꽃을 상감하였고 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번 중국 군사 십만 명이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풍속이 달라서 서로 비웃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회를 즐겨 먹는데 중국인들은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중간 줄임) 우리나라 사람이 밤에 어두운 방에 앉아 있으면 중국인이 대문 밖에서 들어와 냄새를 맡으면서 “‘고려인이 있는 게 분명하군.’ 하는데, 이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고기를 즐겨 먹어, 비록 스스로 비린내를 맡을 수 없지만 비린내가 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광해군 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野談集) 《어우야담(於于野譚)》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 겨레가 회를 먹는 것은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먹거리 문화인 줄 알지만 여러 기록을 보면 실은 예전부터 우리 겨레는 회를 즐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생선회는 겨자와 함께 먹었고 술도 곁들였다고 하지요. “세조께서는 시냇물에 독을 풀어 고기 잡는 것은 어진 정치에 어긋난다고 하시어 엄금하도록 타일렀다. 그런데 지금 이를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담당 관청이 법을 소홀히 하면 날마다 법령을 만든다 해도 무슨 실익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동포가 몸은 3.8선을 자유로이 넘나들지 못한다고 하여, 어찌 마음으로 3.8선을 용납 할 수 있으리오. 미국과 소련 양국이 저들 멋대로 3.8선을 고정시키고, 우리의 형제자매를 갈라놓고, 이남에 하나의 정부와 이북에 또 다른 정부를 만들려고 하니, 이는 곧 '세계열강의 분열을 우리의 분열로' '외부의 분열을 내부의 분열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목적으로 3.8선을 우리의 염통과 뼈에 새겼던 것이다. 아! 그 뿐이랴, 장차 분열 뒤에는 골육상전(민족간의 혈전)이 뒤따를 것이니, 우리 민족의 생존에 그 이상의 위협이 또한 어디 있으리요!”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정국에서 남한과 북한이 따로 정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한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법통을 이어받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수립했던 정부입니다. 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이들은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1949년 오늘(6일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뜬 백범 김구 선생이지요. 선생은 3·1만세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근정전 서쪽, 경회루 남쪽에는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된 수정전(修政殿)이란 전각이 있습니다. 수정전은 건물의 간수(間數)로 따졌을 때 현존하는 경복궁 전각 가운데 규모가 큰 건물로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모두 40간 크기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수정전은 수정전 건물 한 채만 달랑 남아 있지만 1908년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 <북궐도형>에 따르면 수정전 주변이 200간이나 되는 행각(行閣)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영추문까지 대전장방(大殿長房)ㆍ수라간(水刺間)ㆍ빈청(賓廳)ㆍ의관방(醫官房)ㆍ내각(內閣) 따위의 전각들이 즐비하게 있었지요. 세종 때는 이곳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ㆍ반포되는데 이바지 했으며, 《훈민정음 해례》는 물론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따위 책을 펴내, 우리나라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