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반닫이”이라 하여 책ㆍ두루마리ㆍ옷ㆍ옷감ㆍ제기(祭器) 따위를 넣어 두는 길고 번듯한 큰 궤짝을 써왔습니다. 이 반닫이는 앞판의 위쪽 반만을 문짝으로 하여 아래로 젖혀 여닫아서 반닫이라 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문을 앞쪽으로 열고 닫는다 하여 앞닫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반닫이는 오히려 장, 농보다 필수적인 혼수용품이었으며, 그래서 반닫이는 집집마다 한 두 개 정도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소나무, 참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두꺼운 널빤지로 만들어 묵직하게 무쇠 장식을 하였는데, 반닫이는 제기처럼 무거운 내용물을 보관하거나 서책, 귀금속과 같은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견고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두꺼운 판재를 쓰지 않을 수 없었지요. 반닫이 위에는 도자기로 장식하거나 이불을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지방에 따라 나누는 반닫이 종류에는 주로 백통과 놋쇠로 조촐하게 장식한 서울반닫이, 대체로 크고 큼직큼직한 쇠장식을 앞면에 가득 대는 평양반닫이, 제비초리(제비꼬리를 닮은 모양) 경첩을 달며, 안쪽 윗부분에 세 개의 서랍이 있는 전주반닫이, 크기가 작으며 쇠장식을 적게 대고 나무의 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상도반닫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보물 제1374호 ‘상주 용흥사 괘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용흥사는 경상북도 상주시 연악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4~850)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용흥사에 전해지는 괘불은 세로 10m, 가로 6m가 넘는 큰 그림으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의 모임 장면을 묘사한 불화지요. 모임의 주재자는 석가모니부처로, 그의 몸에서 발하는 영롱한 빛은 모임의 시작을 알리는데 약사부처는 질병의 고통이 없는 세상을, 아미타부처는 즐거움만이 가득한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세 부처에게 살아서는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하기를 비손한 것이지요. 현재 전해지는 괘불 110여 점 가운데 세 부처를 함께 그린 것은 5점만이 남아 있어 <용흥사 괘불>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상주 용흥사 괘불”은 1684년, 90여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조성하였습니다. 당시 홍흡(弘洽)스님이 중심이 되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된 용흥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괘불을 조성는데 필요한 시주를 받고, 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단과 대한황실문화원이 공동 주관한 제4회 궁중문화축전이 지난 4월 21일부터 5월 6일까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에서 열렸다. 그 가운데 경복궁 행사의 하나로 세종 즉위 600돌을 기념하는 [한글타이포전]이 경회루 앞 수정전 일원에서 있었다. 이 지역은 훈민정음 창제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옛 집현전 터이기에 그 뜻이 더욱 깊다. 한재준, 김연희, 김현진 작가가 출품했는데, 한재준 작가는 <붉은 한글>과 <저 너머 한글>을 설치했다. <붉은 한글>은 한글자모를 이어서 만든 동물과 사람 형태의 조형물을 잔디밭에 늘어놓은 형태이며, <저 너머 한글>은 수정전 앞 매점 처마에, 한글 자모 조합의 특성을 살린 구성으로 육백년 묵은 세종대왕의 목소리에 염원을 담아 입체 형태로 설치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만난 한재준 작가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 ‘한글 조형’ 곧 <붉은 한글>를 준비한 면수건으로 애지중지 닦아내고 있었다. 이날 멀리 여주에서 온 여주세종문화재단 남궁 희 팀장은 <붉은 한글>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이 지는구나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애달프다, 한철 봄이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비바람 속에 왔다 가누나“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 곧 “우연히 읊은 시”란 제목으로, 인간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청춘 시절이 있기도 하며,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람에 꽃이 지듯 잠시 왔다가 가는 봄처럼 허무하게 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과 들에는 온갖 꽃이 흐드러졌지만 이제 꽃보라 날려 봄기운이 멀어져만 갑니다. 송한필 그는 형 송익필과 함께 선조 때의 성리학자ㆍ문장가로 이름이 있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토론할 만한 사람은 익필 형제뿐이라고 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송한필은 서얼이어서 신분상의 제약을 크게 받다가 아버지 때부터 겨우 양민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인생무상을 노래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꽃이 피어도, 져도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각 폭이 113.6×49.1cm나 되는 8폭 병풍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가 있습니다. 이 <태평성시도>는 성(城)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 대형 병풍입니다. 수레와 인파가 가득하고 번창한 상점과 화려한 건물이 즐비한 거리에서 사람들은 행렬을 짓거나 무리를 이루어 장사를 하고, 수공업이나 농사일을 하며, 아이들이 춤추며 뛰어놀기도 합니다. 이 그림에는 이런 사람들이 무려 2,120명 정도나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림 속의 중요한 건축물은 길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패루(牌樓)입니다. 패루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거나 중요 건축물로 통하는 도로의 기점을 알리는 중국식 건축물입니다. 모두 6개의 패루가 그려져 있으며, 7번째 패루는 한창 짓는 중입니다. 이처럼 그림에는 중국적인 요소가 많은데 다만 중국의 생활양식과 문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조선적인 특징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그림이 분명합니다. 특히 조선시대 그림들을 볼 때 <태평성시도>처럼 다양한 모습의 저잣거리에 주목한 그림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하지요. 조선후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수많은 기와에 치미(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까지 나온 현장을 보고 놀랐습니다. 세운 때가 분명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의 위치가 확인된 것입니다." 어제 5월 3일 서울 흥사단 4층, 백제학회・한국고대사학회 등 12개 학회가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원로 고대사학자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이날 학자들은 “1,500년 만에 극적으로 나타난 백제 ‘대통사(大通寺)터’의 온전한 조사와 보존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이 나온 계기는 지난달 4일 충청남 도공주시 반죽동 중학동주민센터에서 (재)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한 “공주 반죽동 한옥신축부지 내 유적 소규모 국비지원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나온 것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발굴조사는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한옥신축부지에 대하여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복권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인 사업이다. 조사지역은 보물 제150호인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의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에 포함된 공주시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일대는 일찍부터 대통사터의 일원으로 알려져 왔다. 대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통 원년, 곧 백제 성왕 5년(5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일곱째 “입하(立夏)”입니다. 입하는 '여름(夏)에 든다(入)'는 뜻으로 푸르름이 온통 뫼(산)와 가람(강)을 뒤덮어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는 절기지요. 입하는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하며,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릅니다. 이맘때는 곡우에 마련한 못자리도 자리를 잡아 농사일이 좀 더 바빠지며, 시절음식으로 쑥버무리를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입하에 산과 들에 가보면 하얗고 탐스런 이팝나무를 봅니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입하 무렵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또 이밥은 하얀 쌀밥을 뜻하는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여 일반 백성들도 쌀밥을 먹게 되었고, 그래서 백성들이 이 쌀밥을 '이성계가 준 밥'이란 뜻으로 '이밥'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고도 하지요. 실제 흐드러진 이팝꽃을 보면 마치 쌀밥(이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나무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은 선조 때 대사간,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로 뽑혀 기록되었습니다. 백인걸은 돌도 지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였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지요. 하담 김시양의 문견잡록(聞見雜錄) 《부계기문(涪溪記聞)》에 그 백인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날 밤에 벗 허자가 백인걸을 초청하여 저녁을 먹으면서 말했습니다. “내일 대간의 비밀지령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자네는 노모가 계시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문정왕후가 내린 밀지에 대해 반대했다가는 신상에 이롭지 못할 것임을 지극한 효자인 백인걸에게 귀띔해준 것입니다. 그러자 백인걸은 묵묵히 술잔을 비우더니 “이 몸은 벌써 임금님께 바쳤으니 어찌 개인의 사정을 돌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했지요. 이 말을 들은 허자는 여러 가지로 달래기도 하고 위협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끝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백인걸은 목숨이 위협받는 일에도 공직자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에 허자는 탄식을 하면서 “내일이면 자네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도 백인걸이 조금도 당황하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청주박물관에 가면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물 제1880호 “‘단산오옥(丹山烏玉)’ 글씨 새겨진 고려 먹”이 있습니다. 이 먹은 1998년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 중 에 발굴된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 전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먹입니다. 출토될 때 이 먹은 묻힌 이 머리맡 부근에 두 토막이 난 상태로 한자 “단산오(丹山烏)”라는 글자가 세로글씨로 새겨 있었지요. 그리고 ‘烏’자 밑에 ‘一’자 획이 보이는데, 이는 ‘玉’의 첫 획으로 먹을 갈아 사용하면서 닳고 남게 된 획으로 짐작합니다. 여기서 ‘단산(丹山)’이란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1318년(고려 충숙왕 5)에 쓰던 단양의 옛 이름이며, ‘오옥(烏玉)’은 먹의 다른 이름인 ‘오옥결(烏玉玦)’의 줄임말로, ‘단산오옥(丹山烏玉)’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종 때 펴낸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단양의 토산품 가운데 먹이 유명한데 이 가운데 "가장 좋은 먹을 불러 단산오옥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러 문헌들을 통해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먹을 써왔으며, 지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