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종 때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고, 큰 학문적 성과도 이룩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과는 집현전(集賢殿)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집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문 연구기관인데 조선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책을 펴내는 등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집현전’이라는 이름은 고려 인종 때 처음 나왔고 조선 정종 때도 집현전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기구였지요.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는 한편, 학문과 품성이 뛰어난 최고의 젊은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집현전은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 다음해인 1420년에 설치되어 세조 2년까지 약 37년간 존속하였지요. 집현전에는 모두 96명의 학자가 거쳐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국조방목(國朝榜目)》의 기록에 따르면 집현전 학자들은 정인지를 비롯한 장원 급제자가 무려 16명이나 되었으며, 전체 집현전 학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과거시험 5등 안에 합격한 그야말로 이 시대 으뜸 수재들이었습니다. 세종과 왕자ㆍ공주에 의해서 이루어진 훈민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진주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정조임금의 글씨가 있습니다. 보물 제1632-1호 “정조어필-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正祖御筆-贐提學鄭民始出按湖南)”이 그것인데 1791년 2월에 정조가 호남으로 부임하는 정민시(鄭民始, 1745~1800)를 위해 지어 써준 행서 칠언율시입니다. 짙은 분홍 비단에 금니(金泥,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만든 물감)와 은니(銀泥, 은가루를 아교에 개어 만든 물감)로 모란, 박쥐, 구름무늬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며, 세로 75.2㎝, 가로 159.0㎝의 크기지요. 정조는 “정성 어린 이별자리 여러 순배 돌았는데, 그대 보내는 명일에 동작진(銅雀津)을 나가겠지. 지금 어려운 일은 모름지기 호조이니, 예부터 관찰사 직은 근신(近臣,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에게 의지했네. 가벼운 옷차림의 새 관찰사를 다투어 보고, 대부인(남의 어머니를 높여 이르는 말)의 기거에도 탈이 없으리라. 누(樓) 이름 공북(拱北)은 참으로 우연이 아니니, 몇 밤이나 누에 올라 대궐을 바라볼런고.” 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전하고 민생을 극진히 돌볼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정민시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세자시강원의 정4품 관직)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종대왕은 임금 자리에 있었던 30여 년 동안 신하들의 직언 구하기를 마치 목마른 것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언로를 열고 소통에 충실하였던 덕분에 조선 최고의 성군이라는 칭송을 듣는 것이 아닐까요? 반면에 두 번의 사화로 피바람을 불게하고 최악의 폭정을 자행하다가 반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귀를 닫고 직언을 하는 신하는 기피했다고 하지요. 특히 대사성ㆍ지중추부사ㆍ대제학ㆍ대사헌 등에 올랐던 홍귀달은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여연산군이 자못 싫어하였습니다. 홍귀달이 상소를 올리면서 조금도 숨김없이 궁중 비밀까지 캐내고 풍자하였으니 결국 연산군은 그를 경기감사로 내쫓았지요. 그뿐만 아니라 무오사화 직전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습니다. 더더구나 연산군은 홍귀달의 손녀딸이 용모가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궁에 들이라고 하자 홍귀달은 이를 거역하여 결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귀양 가게 됩니다. 이때 그는 “내가 본래 함창 농사꾼에서 재상 지위에 올랐는데, 본래 내가 가졌던 것도 아니니 출세한 것도 아니요 실패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날로 되돌아 갈 뿐이니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한국문화 이해를 위한 전시・체험상자인 한국문화상자를 개발하고 해외보급에 나선다. 한국문화상자는 한국문화의 체험적 이해를 위해 다양한 자료를 상자에 담아 국외에서 이용하게끔 제작한 일종의 움직이는 박물관이다. 지난 1월 27일(토) 오전 11시(현지시간) 시카고 어린이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문화 특별전 ‘하트 앤 서울(Heart and Seoul)’ 개막식에서 처음 선보였다. 한국문화의 체험적 이해를 위한 움직이는 박물관 한국문화상자는 지난 2012년 국립민속박물관 문화다양성 사업인 ‘다문화꾸러미’의 하나로 개발한 한국문화꾸러미 ‘안녕 대한민국’의 해외 보급용 버전이다. 한국문화꾸러미가 박물관과 전국의 관련 기관에서 어린이들과 국내 거주 외국인의 교육에 활용되었다면, 이번에 제작한 한국문화상자는 그동안 계속되어온 다양한 해외 문화기관에서 한국문화상자 요청 수요를 염두에 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축적된 민속・생활사 연구를 기반으로 한국문화 이해를 위한 실물자료를 담아 맥락있는 전시와 체험이 가능하도록 제작한 한국문화상자는 사랑방, 안방, 한복, 한글, 놀이, 소리 등 6개의 주제 상자로 구성되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은으로 형태를 만든 뒤 도금을 한 “잔과 잔받침 모음(은제도금탁잔)”이 있습니다. 이 잔과 잔받침은 섬세한 세공 기술인 타출(打出) 기법으로 장식되었는데 ‘타출 기법’은 금속판의 안쪽 또는 바깥쪽에서 정으로 두드려서 돋을새김(부조)으로 무늬를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장식 기법입니다. 이 “잔과 잔받침 모음”은 겉에 도금이 고루 입혀져 금빛이 완연하며, 잔과 잔받침은 모두 여섯 번의 굴곡을 이룬 육엽화형(六葉花形) 모양으로 꽃무늬를 새겨 화려함과 정교한 세공기술을 뽐내고 있지요.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잔과 잔받침 모음” 뿐만 아니라 은제 주전자, 은제 합, 팔찌 따위에도 타추 기법을 써서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잔과 잔받침 모음”은 한자말로는 ‘탁잔(托盞)’이라고 하는데 고려시대에 청자로도 만들어진 예가 있어 당시에 유행했던 그릇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그릇은 차를 마실 때 썼던 다구(茶具)의 하나으로 추정되지요. “잔과 잔받침 모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물론 새겨진 무늬가 세련되고 조화로우며 타출 기법 또한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하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풍진(風塵) : 흙먼지 * 공변되다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사사롭지 않고 공평하다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는 사적 제464호 <파주 혜음원터(惠蔭院址)>가 있습니다. 《동문선(東文選)》 권64기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혜음원을 세운 배경과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따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혜음원은 남경(한양)과 개성 사이를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나라가 세운 숙박시설이며 임금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까지 있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쓰던 혜음령이라는 이름의 유래에서 그 자리가 짐작되었는데 1999년 주민의 알림에 따라 이루어진 조사에서 “惠蔭院”이라고 새겨진 암막새가 출토됨으로 현재의 자리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2004년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조사를 했지요.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동서 약 104m, 남북 약 106m에 걸쳐 9개의 단(段)으로 이루어진 비탈진 땅에 27개의 건물터를 비롯하여 연못터, 배수로 등의 유구와 금동여래상,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 등의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혜음원터는 문헌과 유구, 유물을 통해 원(院)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따 그 물 맛있다 꿀떡꿀떡 마시고 /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먹자“(전북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풍물굿), “정제구석도 니구석 방구석도 니구석 마래구석도 니구석 삼사십이 열두구석 잡귀잡신 물러라“(전남 진도근 소포풍물굿) 새해 정초에는 마을에 요란한 풍물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신밟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풍물패 상쇠는 위와 같은 비나리를 하지요. “지신밟기”는 정초에 집안에서 집을 지켜주는 지킴이 신들을 섬기며, 그 노고를 치하하고, 더 잘 지켜줄 것을 부탁하는 의례입니다. 복이 들어오기를 비손하는 문굿에서부터 시작해, 조왕신(부엌을 지키는 신)을 모시는 조왕굿, 집안 음식의 시작 장독대의 철륭굿, 우물에서의 용왕굿, 집터에 좋은 기운을 주는 터주굿, 집안 신들 가운데 가장 웃어른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굿 따위를 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 행하였다는 기록이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2권에 나오고 1930년대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오청(吳晴)의 《조선의 연중행사》에도 지신밟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지신밟기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웃의 복을 빌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며, 풍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올해는 개띠해 무술년(戊戌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어미개와 강아지(母犬圖)> 그림이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어미개와 강아지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성근 나무를 뒷배경으로 하여 어미 젖을 빠는 강아지와 어미개 등에 누워 평화스럽게 잠이 든 강아지 그리고 그 강아지들을 바라보는 어미개의 자애로운 모습이 매우 정감 어린 분위기입니다. 이 그림의 기법을 보면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붓에 먹을 찍어서 색의 짙고 옅음으로 그린 몰골법을 쓰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동물이나 새들을 그린 그림을 우린 영모화(翎毛畵)라 부르지요. 이 <어미개와 강아지 그림>은 조선 초기의 화가 이암(李巖, 1499 ∼?)의 그림입니다. 이암은 그의 삶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조선 중기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와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그가 영모화(翎毛畵)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또 《인종실록》에 보면 이암은 인물화에 뛰어난 이상좌(李上佐)와 함께 중종의 어용(御容)을 그릴 화가로 승정원에 의하여 추천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후원에 가면 향원정이 있고 그 향원정 서북쪽에는 이국적인 향기를 풍기는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집옥재(集玉齋)가 그곳인데 이 집옥재는 양옆에 복도로 이어진 협길당, 팔우정과 함께 본래 창덕궁에 있었는데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함께 옮겨온 것입니다. 고종은 이 전각들에 어진을 봉안하고, 서재로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고종은 집옥재에 4만여 권의 책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또 고종은 이곳을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활용하였는데 1893년(고종 30) 한 해에만 영국,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나 접견한 기록이 《고종실록》에 보입니다. 고종은 집옥재를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 공간으로 삼고 근대화를 이끌고자 했던 곳이지요. 이 건물은 중국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지은 것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집옥재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집옥재 내부, 외부 시설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목재 서가와 열람대, 전시대를 만들고 책을 꽂아두어 작은 도서관으로 조성하였지요. 그리고 인문학 강좌를 하는 것은 물론 복도로 이어진 팔우정을 북카페로 조성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