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26년 오늘(1월 22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노백린(盧伯麟) 장군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 단칸방에서 52살로 순국한 날입니다. 장군은 21살에 대한제국 정부 관비생으로 뽑혀 일본에 가 일본 도쿄 경응의숙(慶應義塾)과 성성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하여 신식 군사학을 배우고 졸업했습니다. 그 뒤 귀국하여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을 지냈고 육군무관학교장을 비롯하여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지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맺었을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크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때 장군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 앞으로 가 “위리 워리”하고 개를 부르듯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가 그것을 알고 칼을 빼 들어 덤비자 장군도 칼을 빼들었지요. 이렇게 사태가 험악해지자 이토 히로부미가 황급하게 하세가와를 만류하여 겨우 결투까지 가지는 안았지만 연회는 파하고 말핬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장군은 무인으로서의 기백과 대쪽 같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장군은 국권이 일본에 빼앗기자 미국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인 대한(大寒)입니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가장 추운 날이지만 소한 무렵이 대한 때보다 훨씬 추울 때가 많습니다. 대한 다음에는 입춘이 기다리고 있기에 대한은 겨울을 매듭짓는 날로 보아 대한 기간의 마지막 날 곧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여 계절적인 그믐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날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지요. 그래서 입춘부터를 새해로 보기도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따위의 집안 손질은 언제나 “신구간(新舊間)”에 하지요. 신구간은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간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모든 신들이 염라대왕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여도 탈이 없다고 믿는데, 집수리를 하거나 이사도 이때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 무렵은 한 겨울인지라 먹거리가 부족했던 옛 사람들은 끼니 걱정이 컸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세끼 밥을 두 끼로 줄였습니다. 겨울철엔 나무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힘든 농사일은 없기 때문에 세끼 밥 먹기가 죄스러워 점심 한 끼는 반드시 죽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남 신안군 칠발도에 가면 바다제비, 슴새, 칼새 같은 바닷새들이 살고 있는데 이곳은 여름철새들이 이동하는 길목에 있는 쉼터이자 둥지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학술상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천연기념물 제33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바닷새들 번식지 칠발도는 비금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가량 떨어진 등대섬인데 경사가 가파른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곳에 둥지를 튼 새들 가운데 바다제비는 몸길이 19㎝ 정도로 암수 모두 몸 전체가 짙은 갈색이고 부리와 다리는 검은색입니다. 바다제비는 주로 물고기, 새우, 오징어를 먹고 사는데 섬의 바위 틈이나 땅굴에 둥지를 틀고 삽니다. 또 슴새는 몸길이 48㎝ 정도로 암수 모두 머리와 등은 검은 잿빛을 띠고, 얼굴과 목ㆍ배는 흰빛이지요. 또 얼굴과 머리에는 흰점이 많이 있으며 부리는 회색입니다. 낮에는 먼바다에서 무리를 지어 날며 둥지에는 해가 진 뒤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칼새는 몸길이 18㎝ 정도로 암수 모두 머리ㆍ등ㆍ날개는 검고, 허리는 흰빛을 띠고 있습니다. 높은 산이나 섬의 암벽 같은 곳에 둥지를 틀며, 흔히 큰 무리를 이루어 활동합니다. 칼새는 주로 파리, 딱정벌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교육부는 지난 1월 10일 <설명자료>를 통해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을 폐기한다고 공식으로 밝혔다. 이에 국어・교육・시민 등 54개 단체가 참여한 초등 교과서 한자병기 반대 국민운동본부(상임대표 이대로, 이하 운동본부)는 이를 환영하는 논평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은 박근혜정권의 교육부가 아주 나쁜 정책이었으며, 적폐 정책 가운데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우리 운동본부는 장장 3년 4개월 동안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을 비판하고 규탄하였다. 이는 초등학교의 경우 한글전용교과서로 배워도 학습이해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리 운동본부는 늦게나마 교육부가 잘못된 정책임을 인정하고 폐기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교육부는 이번 발표를 통해 초등용 한자 300자 표기방침도 폐기하였다. 현재 초등 교과서에 표기된 한자(모두 22자)보다 더 많은 한자를 절대로 표기하지 않기로 하였다. 한글로만 표기해도 학습이해에 아무런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조치다. 운동본부는 또 곧바로 시도교육청과 협력하여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 폐기’ 내용을 가정통신문 발송, 안내자료 배포 등을 통해 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옛그림 가운데는 ‘민화(民畵)’라는 것이 있습니다. 민화는 한 민족이나 개인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에 따라 그린 대중적인 실용화라고 풀이합니다만 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격을 따지지 않는 어쩌면 가슴 속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진정한 민중의 예술이라고도 합니다. 그 민화 가운데 ‘문자도(文字圖)’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자도는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고사 따위의 내용을 다양한 한자 획 속에 그려 넣어서 아름답게 꾸미는 그림입니다. 특히 우리 민족이 종요롭게 여겼던 윤리덕목에 관한 글씨 곧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이렇게 여덟 글자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주로 사랑방이나 아이들의 방에 병풍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를 효제충신도(孝悌忠信圖), 팔자도(八字圖)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효(孝)”라는 글자를 보면 잉어와 죽순 그리고 부채가 함께 그려져 있지요. 여기서 잉어는 “왕상이어(王祥理魚)”에 나오는 설화로 계모가 엄동설한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왕상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부모에게 정성껏 공양하였다는 이야기기 담겨 있습니다. 또 대나무는 “맹종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622호 “천마총 자루솥(天馬塚 鐎斗)”이 있습니다.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하여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출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천마총 자루솥(天馬塚 鐎斗)은 술, 음식, 약들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쓰던 그릇으로, 대부분 왕릉을 비롯한 큰 무덤에서만 출토됩니다. 이 청동 자루솥(초두)은 높이 20.5㎝, 몸통 지름 18㎝, 손잡이 길이 13㎝의 크기입니다. 전체 형태는 납작한 공 모양의 몸통에 뚜껑을 덮은 것으로, 밑에는 동물 모양 다리 3개가 달렸습니다. 몸통에는 가로로 한 줄이 돌려 있고 이 위에 휘어진 뿔이 달린 양머리 모양의 액체를 따르는 주둥이가 달려 있습니다. 뚜껑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고, 손잡이 위에서 경첩으로 몸통에 연결하여 여닫게 만들었지요. 청동 자루솥은 몸통 크기, 다리 높이, 손잡이 길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양머리 모양의 주둥아리는 백제, 고구려와 달리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머리 모양 자루솥이 출토되었지만 뚜껑의 꼭지가 고리 형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昔日隋唐乙破天 지난날 을지장군이 수・당의 군대를 대파하였음이어 何處隱在宗下魂 어느 곳에 그 뜻이 스며있는고 我慾朞年滅倭賊 이제 외적을 멸하고자 결심 더욱 굳히니 只有靑天寫綠寒 푸른 하늘이 압록강 물에 비추었도다 위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 1888.2.15. ~ 1957.1.15.) 장군이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있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하여 압록강 가에서 지은 한시입니다. 장군은 이때 봉천성에 도착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석교’라는 이름도 버리고 새로이 ‘지청천’이라고 개명하게 됩니다. 이때 만주에서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마침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청천 장군의 합류는 신흥무관학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후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장군이 개교식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고 연설하여 독립군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로운 사람은 새해에 새봄을 기뻐하도다 吉日吉時傳吉慶 좋은 날 좋은 때에 경사스러운 일을 전하고 新人新歲喜新春 새로운 사람은 새해에 새봄을 기뻐하도다. 君子求諸己 군자(君子)는 자신에게서 찾고 小人求諸人 소인(小人)은 남에게서 찾는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偶然還訪石山來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滿院淸香一樹梅 한 그루 매화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物性也能至舊主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慇懃更向雪中開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반기네 이는 고려말 문신 통정공 강회백(姜淮佰, 1357~1402)이 자신의 삶을 마치기 전에 자신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읊은 시 “단속사에 심은 매화(斷俗寺手種梅)” 일부입니다. 강회백이 노래한 이 매화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 탑동마을 단속사 터에 있는 매화로 강회백이 심었다고 하지요. 강회백은 훗날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에 이르렀기에, 후세 사람들과 스님들이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정당매의 나이를 640살로 보는데 나무 높이 8m에 둘레가 1.5m이며, 1982년 11월 10일 경상남도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매화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일찍 피기에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핀다고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설중매(雪中梅)’라고 하며, 꽃의 빛깔에 따라 하얀 것을 ‘백매(白梅)’, 붉으면 ‘홍매(紅梅)’라 부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매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진주의 국립진주박물관에는 보물 제1078-1호 “한호 필적 - 한석봉증유여장서첩 (韓濩 筆蹟 - 韓石峯贈柳汝章書帖)”이 있습니다. 이 서첩에는 왕발의 <등왕각서(騰王閣序>, 한무제의 <추풍사(秋風辭)>,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등 3편으로 짧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편을 제시해 준 시구만을 뽑아 쓴 것입니다. 선조 29년(1596)에 당시 명필가인 한호 석봉(1543∼1605)이 몇 사람의 벗과 함께 써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벗, 유기에게 주었던 것이지요. 한석봉은 이 서첩에서 <등왕각서>라는 원래 제목 앞에 ‘추일연(秋日宴)’이라는 세 글자를 붙여 <추일연등왕각서>라 하여 가을의 감흥을 짙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세 편을 쓰고 나서는 글을 쓴 때와 장소 그리고 기증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서첩 끝에 별도로 ‘왕래동취(往來同醉)’라는 제목 아래 평소 가깝게 지내던 벗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박록(朴漉), 한호, 김구정(金九鼎), 김윤명(金允明), 유기 등이 바로 그들이지요. 서첩 첫 장에는 ‘主人豊山柳氏(주인풍산유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