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국어원(원장 송철의)에서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쓰이는 생소한 외래어 일곱 개를 골라 2017년 제4차 다듬은 말을 발표하였다. 국립국어원은 ‘공공언어 통합 지원 우리말 다듬기’ 누리집에서 제안받은 다듬은 말 후보 중에서 말다듬기위원회 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이 다듬은 말을 선정했다. 국립국어원은 지난 2017년 10월 30일부터 11월 12일까지 ‘드라이 에이징/웨트 에이징’, ‘블라인드 채용’, ‘스낵 컬처’, ‘컨벤션 효과’, ‘크래프트 맥주’, ‘홈 퍼니싱’을 갈음할 우리말을 공모했다. 특히 이번에 다듬어진 말들은 최근 국민들의 문화적 관심 사항과 관련하여 자주 나온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공모 결과를 바탕으로 말다듬기위원회는 의미의 적합성, 조어 방식, 간결성 등을 고려하여 ‘드라이 에이징/웨트 에이징’은 ‘건식 숙성/습식 숙성’, ‘블라인드 채용’은 ‘(정보) 가림 채용’, ‘스낵 컬처’는 ‘자투리 문화’로, ‘컨벤션 효과’는 ‘행사 효과’로 쓸 수 있도록 다듬었다. 또한 ‘크래프트 맥주’는 ‘수제 맥주’로 ‘홈 퍼니싱’은 ‘집 꾸미기’로 쓸 수 있도록 다듬은 말을 뽑았다. 위원회에서 선정한 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울진 봉평의 신라비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라비” 라고하면 흔히 국보 제3호인 서울 북한산에 있는 “신라진흥왕순수비”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울진 대게로 유명한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도 “신라비”가 있다. 그것도 국보 제242호로 지정된 귀하신 몸 “신라비”인 것이다. 이 신라비는 잘 꾸며진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에 모셔져 있다. 정식 이름이 “울진봉평신라비”로 붙여진 이 비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88년 1월 20일의 일이다. 당시 봉평 2리 118번지 논에 묻혀있던 커다란 이 비석은 논 주인(주두원 씨)이 객토 작업을 하기 위해 하천변에 옮겨 놓은 것을 마을 이장(권대선 씨)이 정원석으로 활용해볼까 하고 흙을 털어내던 중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 1988년 3월 21일 이 비석을 울진군 공보실에 신고하면서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 204㎝, 너비 32~55㎝로 모양은 긴 사다리꼴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글씨는 10행으로 모두 399자인데 글씨체는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 것으로 대부분 판독이 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울진봉평신라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93년 10월 부여 능산리에서는 공주 무령왕릉 발굴에 버금가는 고고학적으로 큰 발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즈믄해(1,6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의 출현입니다. 그런데 그 발굴이 있었던 때만 해도 이 유적이 무엇을 하던 곳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절터인 것으로 밝혀졌지요. 또 향로와 함께 출토된 국보 제288호 “백제창왕명사리감”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절을 공양한 사람 그리고 절이 세워진 때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절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에 축원을 빌기 위한 절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절터는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4호 “능산리 절터”로 지정되었지요. “능산리 절터”에서는 기와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30여 점의 목간도 출토되었는데, 목간
k[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식기를 받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쓰는 작은 상 곧 소반을 널리 써왔다. 이렇게 작은 형태의 소반이 애용된 것은 조선시대 유교이념인 남녀유별・장유유서(長幼有序)의 사상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쓰였으며, 부엌과 방이 떨어진 것은 물론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는 한식 온돌방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반 하나에도 우리 겨레는 미의식을 담아 만들어 썼다. 소반은 물론 지역별로도 통영반・나주반・해주반 등으로 특색이 있었지만 다리 모양에 따라 구족반(狗足盤)・호족반(虎足盤)・죽절반(竹節盤)・단각반(單脚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동물의 다리 모양이 받치고 있는 호족반, 구족반은 소반을 만든 장인들의 미적감각과 함께 담긴 해학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호족반과 구족반 등의 모양새를 이용한 “호랑다리 밥상 홍성경조각전”이 어제 12월 27일 서울 인사동 아리수갤러리에서 열렸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바닥에 천을 깔고 그 위에 호랑이다리 밥상, 개다리 밥상, 말다리 밥상들이 소박하게 전시돼 있다. 이거야말로 우리의 전통 소반의 아름다움에 실용성을 함께 한 대단한 작품들이란 느낌이 든다. 다리만이 아니다. 소반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도기(陶器)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독(酒尊)의 모양은 오이와 같은데, 위에는 작은 뚜껑이 있고, 술독의 겉면에는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모습이 있다. 또 주발, 접시, 술잔, 사발, 꽃병, 탕기, 옥색 잔도 잘 만들지만 모두 중국의 그릇 만드는 법식을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리기를 생략하고 술독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한다.” 이는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 고려에 건너와 1개월 남짓 머물면서 견문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책,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2 ‘생활용기’ 편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가 말한 비취빛 도기는 다름 아닌 고려청자입니다. 고려청자는 박물관 등에 잘 보존되어있어 언제라도 가서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더러는 청자 이동 시에 배가 난파당해 깊은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 무안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 앞바다 지역도 고려청자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사적 제395호로 지정된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 매장해역’이 그곳입니다. 이 유적은 처음에 민간 잠수부들이 120여 점의 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박연은 하란타(阿蘭陀, 네델란드)인이다.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항왜(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와 표류해온 중국인을 거느리게 했다. 박연의 이름은 호탄만이다.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박연은 그 재능을 살려 나라에 홍이포(네덜란드군이 사용한 대포를 모방하여 만든 대포) 만드는 법을 전하였다.” 조선 후기 문신인 윤행임(尹行恁)의 시문집 《석재고(碩齋稿)》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박연(朴淵)은 세종 때 아악을 정리한 박연(朴堧)과는 다른 사람이지요. 그는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당도했던 네델란드 사람 벨테브레이(Jan J. Weltevree)로 나중에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박연은 청나라로 보내진 다음 자기 나라로 찾아가도록 해야 했지만 정묘호란 직후라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조선에 남게 된 그는 대포를 만들 줄 아는 덕분에 훈련도감에 근무하게 했지요. 이후 박연은 조선 여인과 혼인해 자식을 낳은 다문화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석재고(碩齋稿)》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재미난 내용이 있지요. 바로 조선시대에도 외인부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회화사 가운데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는 이금산수화(泥金山水畵)라는 특별한 그림이 등장합니다. 이금산수화는 검은색 비단이나 검은 종이 바탕에 이금(泥金)으로 그린 산수화를 말하지요. 그림바탕을 자주색이나 감색(紺色, 어두운 남색) 등의 어두운 색으로 염색한 뒤 보색관계인 이금으로 그림을 그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작품입니다. 이금은 금(金)을 바른다(泥)는 뜻으로 금니(金泥)라고도 부르는데 매우 고운 금박가루인 금분(金粉)을 아교풀에 개어 만든 물감입니다. 이금화(泥金畵)는 금으로 화려하게 그린 그림이라서 금니화(金泥畵) 또는 순금화(純金畵)라고도 부르지요. 금은 귀한 재료였던 만큼 금을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은 왕실이나 특정한 권력가들만으로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또 고려 불화(佛畵)에는 사람의 몸이나 옷 부위에 부분 분적으로 이금으로 표현하였는데 금은 찬란한 광채 때문에 부처님이나 보살(菩薩) 등의 그림에 신성(神性)을 부여하고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데 수묵이나 청록보다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불화를 비롯하여 사경(寫經)이나 변상도(變相圖)에도 이금이 사용되었지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금화는 통일신라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 음식점의 방명록(錦書集)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일제가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우리말글을 쓰지 못하게 하던 시절에는 우리말과 한글을 쓴다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었고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한글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노력한 분들은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최현배, 정인승, 이극로, 김윤경 선생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말고도 이윤재(李允宰, 1888. 12. 24∼1943. 12. 8) 선생도 있었지요. 선생은 1888년 오늘(12월 25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한뫼입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에 재직 중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 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앞장서 계획하고 주도하였습니다. 또 신채호 선생의 영향으로 역사를 공부한 뒤 이승훈 선생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에 저항하여 역사학술단체인 진단학회도 설립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1927년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하면서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조선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문에 정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국영기업체인 ‘한국관광공사’가 광고를 했습니다. 광고 부제는 “음식에 대한 동상이몽, 바른 외국어 표기로 바로잡다‘입니다. 그런데 제목은 “동상이食”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든 법 가운데는 <국어기본법>도 있습니다. 국어기본법 내용 제14조 제1호에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는 “동상이食”이라고 써서 분명히 자신들이 만든 국어기본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한자는 피치 못할 경우에만 괄호 안에 써야 하는데 이 경우는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 우리말을 헤살하는 것이어서 절대 써서는 안 되는 경우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러니 다른 부처나 기업들도 이런 행태를 따라하는 것이지요. 지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로“ 많은 문화인들을 괴롭혔던 문화체육관광부가 아직 자신들의 할 일을 망각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