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철원 평야에 있는 천통리 철새 도래지는 겨울철 땅 속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얼지 않기 때문에 철새들이 물과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 사이에 두루미ㆍ재두루미ㆍ기러기 등 많은 겨울철새들이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와 겨울을 나고 갑니다. 더러는 더 따뜻한 일본 등으로 가기 위한 중간 쉼터로 철원 평야가 이용되기도 하지요. 철새란 계절에 따라서 번식지와 겨울을 지내기 위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새를 말하며 북쪽에서 번식을 하고 겨울에 우리나라로 오는 새를 겨울새라 부릅니다. 흔히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는 철새를 가리켜 사람에 견주길 ‘주변 여건 따위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으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승정원일기》 인조 13년(1635) 7월 22일 치 기록에는 “보통 사람들은 이루어진 것만을 즐기기 쉽고, 어리석은 풍속은 진실로 어떻게 시작할지 함께 생각하기 어려운 법이다.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안집(安集)시키는 일을 어찌 때를 놓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서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을 살피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새로는 뻐꾸기ㆍ백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1855년 오늘(12월 11일)은 시인이자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매천 황현(黃玹)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선생은 28살 때 보거과(保擧科,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에 응시해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낮췄습니다. 이에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선생은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 구례로 내려왔지요. 이후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작은 초가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는 뜻이 담긴 구안실은 선생의 문학과 학문의 산실이었지요. 그곳에 16해 정도를 살면서 무려 1천 수가 넘는 시를 지었는데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즐김)이 아닌 절의를 지킨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주로 읊었습니다. 그런 선생은 1910년 한일병탄으로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훗날 이런 치욕의 날 누구하나 책임감 있는 행동을 안 한다면 그것 역시 치욕이다.”라는 말을 토했습니다. 그 뒤 음력 8월 6일 선생은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마저 찡그리니 / 무궁화 세상 이미 빼앗겨 버렸도다.”라는 절명시(絶命詩)를 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있고 없음을 다투지 않으니 집안의 즐거움이요 金玉非寶德爲寶 금옥(金玉)이 보배가 아니요 덕이 보배가 되며, 國家有光人亦光 나라에 빛이 있으니 사람 또한 빛나도다. 有無不爭家之樂 있고 없음을 다투지 않으니 집안의 즐거움이요, 上下相禮國乃昌 위아래가 서로 예를 지키니 나라가 창성하도다.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윤도장(輪圖匠)”은 지남침(指南針)을 만드는 장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남침에는 24방위를 원으로 그려 넣습니다. 윤도라고 하는 지남침은 남북방향을 가리키는 자석바늘을 이용하여 지관이 풍수 곧 집터나 무덤 자리를 정할 때와 천문 또는 여행분야에서 쓰는 필수도구입니다. ‘윤도’는 지관이나 여행객들이 늘 몸에 휴대하고 다닌다 하여 패철(佩鐵)이라고도 하며, 자침이 남쪽을 가리킨다 하여 지남철(地南鐵)이라 하고 나침반, 지남반이라고도 하지요. 지남침의 원리는 중국에서 이미 한대(漢代)에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데 쓰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윤도라는 지남침이 신라 말 무렵부터 발달하였고, 고려 초 풍수음양지리학과 연결되어 풍수가나 지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였지요. 조선시대부터는 풍수가의 전용물에서 벗어나 여행자들도 사용하였으며, 특히 천문학자들에게는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을 가리키는 자오선을 정하는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윤도는 중심의 지남침을 둘러싸고 24방위를 기본으로 하는 방위명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음양ㆍ오행ㆍ팔괘ㆍ십간ㆍ십이지가 들어 있는데 방위명 자체는 팔괘ㆍ십간ㆍ십이지가 조합되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경향신문에는 “국민을 위하여, 파이팅”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이 “파이팅”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끼리 잘 싸우자는 뜻으로 외치는 소리. 또는 응원하는 사람이 선수에게 잘 싸우라는 뜻으로 외치는 소리. ‘힘내자’로 순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를 다시 <다듬은 말(순화어)>에서 찾아보니 순화어로 “힘내자!, 아자”라고 하면서 “순화 대상 용어와 순화한 용어를 모두 쓸 수 있음”이라고 토를 달아 놓았습니다. “파이팅(fighting)”이란 말은 본래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출처가 모호한 가짜 영어입니다. ‘파이팅’은 호전적인 뜻으로 ‘싸우자’ '맞장 뜨자’는 정도의 뜻일 뿐이며, ‘어려움을 무릅쓰고 계속하자!’를 나타내는 말은 '키프 잇 업’(keep it up)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지요. 따라서 “파이팅”은 분명히 잘못된 말입니다. 그래서 순화어로 바꿔 써야 옳을 텐데도 국립국어원은 많은 사람이 쓰니까 함께 써도 좋다고 하는데 이는 국립국어원의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파이팅”을 남발합니다. 원래 우리 겨레는 그런 상소리를 좋아하지 않았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가면 소유주가 ‘성주이씨문경공파정자공문중’인 보물 제1524호 “서울 이윤탁(李允濯) 한글영비(靈碑)”가 있습니다. 이 비석은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이 아버지 이윤탁(李允濯)의 무덤을 어머니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무덤과 합장하면서 1536년에 무덤 앞에 세운 묘비입니다. 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무덤 주인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후손에 경계하는 글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석의 특징은 왼쪽 면에 새겨진 비문인데 우리나라 비문 가운데 한글로 쓰인 최초의 것입니다. 그 가치를 보면 먼저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쓰였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지요. 그 뿐만 아니라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빼면 국한 혼용이 아닌 순 한글로만 쓰여 있으며, 한문으로 쓴 뒤 뒤친 언해문이 아니라 원래 한글로 쓴 것입니다. 따라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바뀌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했지만 조선시대에 한글로 비석을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경북 봉화읍에 가면 조선 중종 때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權橃, 1478~1548) 선생을 기리는 “충재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보물 제261호 “권벌 충재일기 (權橃 沖齋日記)”가 있습니다. 권벌의 호는 충재(沖齋)로 중종 2(1507)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우찬성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가 귀양지 삭주에서 명종 3(1548)년에 죽었습니다. 이 《충재일기》는 권벌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직접 쓴 친필로서 예문관 검열로 일할 때 쓴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쓴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하던 때의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서얼 출신 종친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따진 기록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입니다. 이들 일기는 개인적인 일기라기보다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커서 《중종실록》을 펴낼 때에 자료로 쓰였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지요. 당시 관료로서의 생활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 행사가 소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기린(麒麟)ㆍ봉황(鳳凰)ㆍ거북[龜]과 더불어 4가지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에 “용(龍)”이 있습니다. 용은 고대 이집트ㆍ바빌로니아ㆍ인도ㆍ중국 같은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바탕으로 나타났지요. 중국의 오랜 문헌인 《광아(廣雅)》 익조(翼條)에 나온 용의 모습을 보면 머리는 낙타[駝]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와 비슷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용은 우주 만물의 질서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 임금을 나타내는 말에는 용(龍)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예를 들면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 임금이 앉는 자리는 용상(龍床), 임금이 타는 수레나 가마는 용여(龍輿)라 불렀고, 임금이 입는 옷은 용포(龍袍), 임금의 지위는 용위(龍位)라고 했지요. 재미난 것은 중국의 옛 책 《한비자(韓非子)》에 이르기를 용의 목 밑에는 비늘이 거꾸로 나 있는 역린(逆鱗)이 있는데 이 역린을 잘못 건드리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중국인의 캉이나 서양인의 침대나 일본인의 다다미(疊)에서 거처를 하야보앗스나 우리 조선의 온돌처럼 땃뜻하고도 경제적이요 위생적인 것은 업슴니다. 일본 가티 비습하고 중국 가티(특히 北方) 치운 지방에 잇서서 이른 봄과 느진 가을-아즉도 난로, 화로가튼 것을 설비치 안이할 때에는 학생 기숙사 가튼데에서는 참으로 치워서 견듸기 어렵슴니다. 그런 때에 우리 조선 사람은 누구나 온돌을 생각할 것입니다마는 특히 우리 가튼 여자로서는 더욱 간절히 생각이 남니다.” 위 글은 일제강점기 때 잡지 《별건곤》 제12·13호(발행일 1928. 05. 01.)에 실린 류영준의 “외국에 가서 생각나든 조선 것-온돌과 김치”라는 글 일부입니다. 위의 얘기처럼 일본의 방은 다다미라고 해서 우리네 돗자리 같이 풀로 엮은 방바닥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은 지역마다 다르긴 해도 일반적인 형태는 침대입니다. 한ㆍ중ㆍ일 세 나라 가운데 한국의 난방형태는 온돌로 바닥을 돌로 데워 장시간 그 온도를 유지하는 형태이며 방안 전체가 따뜻해 세 나라의 난방법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지요. “내가 감기 증세가 조금 있다. 동청(東廳)이 마루방이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서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1905년 오늘(11월 30일)은 민영환 선생이 이천만 동포와 나라밖 공관장, 그리고 고종 황제께 드리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결한 날입니다.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대한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조약의 무효와 매국노의 규탄을 부르짖는 상소문이 전국 각지에서 쇄도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때 상소운동에 적극 개입했던 민영환은 울분을 머금은 채 순국한 것입니다. "아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격심한 이 세상에 우리 백성의 운명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죽어야 할 때 구차스레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어야 할 때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어찌 모르랴. 나는 지금 죽지만 혼(魂)은 죽지 아니하여 지하에서나마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이는 선생의 유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후 선생의 순국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선생의 뒤를 따라 조병세, 홍만식 등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했습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이듬해 7월 선생의 피 묻은 옷이 보관되었던 방의 마룻바닥에서 돋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