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덕(德)을 이루니 말(言)이 바로 서고 [곽영민의 갑골문 시 세계 3] 德成言乃立 덕(德)을 이루니 말(言)이 바로 서고 義在利斯長 의(義)가 있으니 이(利)가 자라도다. 知足人長樂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길이 즐겁고 無求品自高 구(求)하는 것이 없으면 이품이 스스로 높도다 고 운암(雲庵)곽영민(郭永敏)선생은 일본,미국,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그뿐만 아니라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풍속화가 하면 누구나 신윤복과 김홍도를 꼽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도 그에 못지않은 풍속화가입니다. 김준근은 근대(1896년 개항기) 화가이며, 선교사 게일(J.S.Gale)의 소개로 고종의 부름을 받았는데 정동에 있었던 여러 나라의 공사관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풍속화와 민속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특히 1886년 미국 해군제독의 딸이 기산에게 그림을 받아갔으며, 1895년 게일(G.S. Gale) 선교사는 한글로 번역해 펴낸 ‘천로역정’ 삽화를 기산에게 맡길 정도로 외국인들에겐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그렸던 많은 작품들은 현재 우리나라보다는 유럽 박물관들이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독일 함부르크박물관에 100여 점, 비엔나 민속박물관에 119 점, 영국 대영박물관에 150 점,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166 점,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98 점 등이 있다고 하지요. 따라서 김준근을 한류의 원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전시된 100 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작품활동에 견주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5월 29일 경북매일신문에는 “일왕에 진상하느라 씨 마른 독도 강치”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강치는 바다사자의 하나로 독도를 비롯한 동해연안에 19세기만 해도 약 30,000~50,000여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독도에는 가제바위 등 주변에 강치가 쉬기에 좋은 바위가 많고 난류와 한류가 뒤섞여 먹이가 풍부해 강치들의 천국이었다고 하지요. 독도강치는 바다사자 무리 가운데서 가장 영리하여 돌고래보다 훨씬 지능이 높고 덩치도 큰 바다동물입니다. 그러나 1905년부터 8년 동안 독도에서 다케시마어렵회사가 1만4천여 마리나 집중 포획하는 바람에 그 뒤 강치는 급격히 줄어들어 멸종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경북매일신문 기사에 따르면 실제 일본의 싹쓸이 포획은 일왕과 관계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량으로 잡아간 강치는 일왕궁에 납품되었던 것입니다. 시네마현 오키섬 역사사료관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독도에서 잡아온 강치는 시마네현장의 명령에 따라 진상됐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납품된 강치 가죽은 일왕의 생활도구(가방)로 만들어졌고 현재 오키섬 사료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는 조선에서 호랑이를 멸종시킨 것도 모자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이 남긴 명저 《한국혼(韓國魂)》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선생은 1879년 1월 13일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습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계동, 가회동, 운니동 등의 솟을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라고 미친 듯 소리 질렀다고 하지요.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 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 손문(孫文) 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또 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하여 통일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경향신문은 “추석선물 특집”이란 기사를 올렸다. 그러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음만큼만 전하세요.”라고 한다. 여기서 아쉬운 것은 “한가위”라는 우리의 좋은 말이 있는데도 추석(秋夕)이라는 한자말을 쓴 것이다. 한술 더 떠 유한양행은 추석을 한자로 썼다. 물론 일동제약처럼 온전한 우리말 "한가위"라고 쓴 광고도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아직 “한가위” 보다는 “추석”이 대세다. 특히 우리말 사랑에 앞장서야할 정부와 언론이 여전히 “추석”을 즐겨 쓰고 있으니 참 안타깝다.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었으니 우리의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고,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이다. “한가위”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에서 유래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의 열여섯째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秋分)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해가 진 뒤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까지는 빛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낮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지요. 또 추분과 봄날의 춘분(春分)은 모두 밤낮의 길이가 같은 때지만 기온을 견주어보면 추분이 약 10도 정도가 높습니다. 이는 여름의 더위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추분에는 벼락이 사라지고 벌레는 땅속으로 숨고 물이 마르기 시작하며, 태풍이 부는 때이기도 합니다. 추분 무렵에는 여러 가지 시절음식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버섯'입니다. 버섯가운데 표고버섯은 칼슘 흡수를 돕는 비타민D의 함량이 높기 때문에 한창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좋으며 감기 증상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느타리버섯은 수분이 많고 칼로리가 낮아 살 빼는 음식으로 좋으며, 팽이버섯은 아미노산과 비타민이 듬뿍 들어있어 면역력을 높여준다고 합니다. 추분을 즈음하여 고구마순은 물론 호박고지, 박고지, 깻잎도 이맘때 거둡니다. 또 목화를 따고 고추도 따서 말리며 그 밖에도 잡다한 가을걷이도 하지요. 이때 농촌을 가보면 붉은 고추, 노란 호박고지, 검은 깨 등을 말리느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꼭대기에는 사적 제136호 “강화 참성단(塹星壇)”이 있습니다. 이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하는데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습니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맨 처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요. 다만, 현재의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합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종휘(李種徽)의 시문집 《수산집(修山集)》 「동사(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강화의 옛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기 51년(BC 2283년)에 단군왕검이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 하지요.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어 참성단이 단군과 연관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지요. 고려와 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서울역사편찬원은 서울사료총서 제14권 《(국역) 공사기고》를 펴냈습니다. 《(국역) 공사기고》는 19세기 서울에 살던 하급 관리 이윤선의 일기를 번역한 책이지요. 이윤선은 세도가 주공영감(主公令監)의 도움으로 호조 서리직을 얻었고, 25년 동안이나 호조서리를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이윤선은 주공영감과 공생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세도가의 잡다한 일들을 맡았고, 주공영감댁의 지방 추수 상황을 살피거나, 업무상 지방에 나간 주공영감의 서울 집을 대신 관리기도 했습니다. 《공사기고》의 내용을 보면 공적인 기록과 사적인 내용이 함께 기록돼 있는 것으로 19세기 ‘사회속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철종 즉위 이후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 따위 나라에서 펴낸 책에서 지워졌던 이원경 모반사건 관련 내용도 들어 있지요. 또 당시 주요 사건 사고 뿐 아니라, 방교와 대창동(오늘날 남대문로 일대)에 살면서 지켜본 정월 보름날 ‘다리밟기’와 한강 일대 뱃놀이를 하던 풍속들까지 들어 있지요. 이윤선은 18~19세기 서울의 특별한 사회계층인 겸인(傔人)이었는데 겸인은 양인층으로 스스로 세도가를 주공으로 섬기며 관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부처님이 서있는 모습의 국보 제80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金製如來立像)”이 있습니다. 이는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국보 제79호 “금제여래좌상”과 함께 발견된 불상입니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지요.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양감이 있는 얼굴은 자비롭게 보입니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콧날은 날카롭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지요. 불상의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손 모양으로,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 준다는 뜻) 모습이며, 왼손은 법의(法衣) 자락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인도의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매우 드물다고 하지요. 대좌(對坐, 불상을 올려놓는 대)는 따로 만들어 끼운 연화대좌(蓮華臺座)로 그 밑에 다시 12각의 받침이 붙어 있습니다. 이 금제불입상은 경주의 선방사(禪房寺) 터에 서 있는 삼체석불의 본존상과 같은 것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899년 오늘은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 사이 경인선 철도가 처음 개통된 날입니다. 경인선 철도는 1896년 미국인 모스(Morse, J. R.)가 부설권을 따낸 것인데 모스가 자금 부족에 고전하자 이를 안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京仁鐵道讓渡契約)을 맺고 1898년 12월 17일 모스에게 170만원을 지불하여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일본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뒤 이듬해인 9월 18일 마침내 노량진~인천 간 약 33.8㎞ 구간에서 임시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 구간을 개통시켰고, 11월 12일에 서대문에서 개업식을 가졌습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서 가면 12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1시간 40분 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요. 경인선 철도의 객실은 3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외국인만 탈 수 있었던 1등 객실 요금은 1원 50전, 2등실은 80전이었고, 3등실은 40전을 내야 했습니다. 그때 80전이면 달걀 100개를 살 수 있었고, 40전으로 닭 2마리 값과 맞먹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