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 가면 보물 제1667호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西山大師 行草 精選四家錄)》가 있는데 이는 조선중기의 고승 승병장인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이 송대 선문(禪門)을 대표하는 마조(馬祖)ㆍ백장(百丈)ㆍ황벽(黃蘗)ㆍ임제(臨濟)의 법문을 초록한 서산대사 친필 서첩입니다. 서첩의 표제(標題)는 “四大師語(사대사어)”라 썼고 안에 쓴 제목으로 “四家錄精選(사가록정선)”과 “精選四家錄(정선사가록)”이라 썼는데 마지막 것을 서첩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필적 사이사이에 “禪敎都總(선교도총)”이란 도장을 찍은 흔적이 있어 ‘팔도선교대총섭(八道禪敎大總攝)’을 지냈던 서산대사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모두 15장 30면이지만, 그 가운데 제7~9장이 떨어져나갔는데, 그중 1장이 오세창이 편집한 《근묵 槿墨》(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에 실려 있습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이 서첩의 자유로운 필치는 그와 가까웠던 초서 명필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 붓글씨 서체와 비슷하여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특기할 만한 글씨입니다. 조선전기 고승의 필적이 매우 드물고 선조가 서산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올해 2017년은 민족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돌 되는 해이다. 이 100돌을 맞아 갖가지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어제 6월 6일 낮 12시부터 1시간가량 서울 삼성동에 자리 잡은 코엑스몰 스타필드 “별마당도서관”에서 윤동주를 이야기 하고 윤동주를 노래하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바로 윤동주의 육촌동생이며. 쎄시봉 가수 윤형주가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와 함께 이야기마당(토크쇼)이열린 것이다.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한 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함께 주검을 수습한 윤동주의 당숙(윤영석의 사촌) 윤영춘이 아버지이기에 윤동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윤형주는 이야기잔치 내내 윤동주와 관련된 많은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동주 형님의 시에 곡을 부쳐서 노래해보겠습니다.'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한참을 아무 말 없으시더니 ‘시도 한 편의 노래이니라.’라는 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주 형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아버지께서 혹시 시에 누가 될까봐 걱정이 되셨던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김응교 교수는 “그렇지만 윤형주 선생님의 노래에는 바로 윤동주 시인이 노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남해군 상주면에 가면 명승 제39호 <남해금산 (南海錦山)>이 있습니다. <남해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절을 지은 뒤 산 이름을 보광산으로 불렀지만,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하지요. 금산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지리산과 으뜸을 겨루고,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小金剛)”, “남해금강” 또는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금산이 이렇게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여행자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38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서 “금산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이라 불릴 정도로 일대 장관을 이룹니다. 남산은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60년대만 해도 밤에 등잔이란 기구로 불을 밝혔습니다. 등잔(燈盞)은 기름을 연료로 하여 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든 그릇이지요. 그 등잔의 재료는 나무, 흙, 대리석, 백자, 사기, 놋쇠, 철제 따위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한지ㆍ솜ㆍ삼실[사(麻絲)ㆍ노끈] 등으로 심지를 만들어 기름이 배어들게 하여 불을 켭니다. 그리고 기름은 동물성[어유(魚油), 고래 기름], 식물성[참기름, 콩기름],따위를 썼으며, 개화기 이후에는 돌에서 나온 기름이라고 알려진 석유로 바뀌어 썼습니다. 등잔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의 발굴품 가운데 각종 형태의 등잔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그 이전부터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신라의 유물로는 토기로 된 다등식 등잔(多燈式燈盞)이 있고, 백제의 것으로는 무녕왕릉 감실에서 출토된 종지형 백자 등잔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백제 종지형 등잔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잔의 기본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대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등잔대는 등잔받침, 대, 밑받침으로 되어 있는데 밑받침은 재떨이로도 쓸 수 있도록 홈이 파져있었지요. 보통 등잔에는 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인 “망종(芒種)”입니다. 망종이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이 시기는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바쁜 때로 “발등에 오줌 싼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전역에는 비가 오지 않아 논과 밭 모두 바싹바싹 타들어갑니다. 언제나 이때쯤이면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많은 고생을 했고 임금까지 나서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연기를 통해 하늘에 간절함을 전한다고 합니다. 또 신을 모독하거나 화나게 하여 강압적으로 비를 오게 하기도 합니다. 부정물은 개, 돼지의 피나 똥오줌이 주로 쓰이지요. 전라도 지방에서는 마을 여인네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일제히 오줌을 누면서 비를 빌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짚으로 용의 모양을 만들어 두들기거나 끌고 다니면서 비구름을 토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국어원(원장 송철의)은 국어사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2017년 나만의 국어사전 뜻풀이 공모’를 한다. 올해로 제3회를 맞은 이 행사는 자기만의 개성을 담은 낱말 뜻풀이를 직접 해 봄으로써 우리말과 국어사전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고, 일상생활에서 국어사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창의적 뜻풀이로 되살아나는 국어사전 ‘2017년 나만의 국어사전 뜻풀이 공모’는 민족정신의 정수인 한글학회의 ≪큰사전≫ 완간 60주년과 국민의 참여로 진화하는 신개념 국어사전 ≪우리말샘≫ 개통 1돌을 기념하여, ≪큰사전≫에서 ≪우리말샘≫까지의 변화를 담은 ‘오늘날 국어사전이 지니는 의미’를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우리말을 사랑하고, 바르게 사용하는 기관의 추천을 받아 주제에 어울리는 뜻풀이 제시 낱말 10개를 뽑았다. 보여줌 낱말에는 “1957년 민족정신을 담은 ≪큰사전≫을 열고, 2016년 국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새로운 국어사전 ≪우리말샘≫을 시작했다. 사전은 지식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비춰 주는 거울이며, 모든 고장의 사투리가 알콩달콩 서로를 보듬으며 어울리는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기
[우리문화신문= 김영조기자] “나를 축하하러 오신 여러분들이 흩어져 가신 경복궁 뜨락에서 나는 혼자 감회에 젖는다. 우연일까?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작품 전시회가 열리는 오늘 아침 경복궁을 오기 위하여 버선을 찾고 보니 옛날 아버님이 신으시던 버선이다. 이 자리에 아버님이 같이 하시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 이는 《무궁화, 1989년 7월호》에 실린 침선장 정정완(1913~ 2007)여사의 글 가운데 일부다.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전시관 2층 <결>에서 열리고 있는 ‘침선장 정정완 작고 10주기 추모전 -삶을 지어온 바느질- 전시장에는 위 글에서 말한 ’아버님이 신으시던 버선‘이 전시되어 있어 기자의 눈길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 버선은 아버지 정인보 선생이 작고한 뒤 정정완 선생이 다시 신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침선장으로 그 이름을 남긴 정정완 선생의 아버님은 한글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이다. 정정완 여사는 정인보 선생의 맏딸로 태어나 17살 때 광평대군 가문의 외아들 이규일 선생과 혼인하여 사대부와 왕실의 침선기법을 모두 익혔다. 그러나 근대기로 접어들면서 옷이 서양화되면서부터 전통 바느질 기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나라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왜정 때 영향으로 표구사에서 도배도 했었어. 당시 인사동에 표구사가 여럿 있었는데 ‘박당표구사’가 유일하게 서화(書畵)를 다뤘어요. 다른 표구사에서도 전부 박당에 와서 서화 배첩하는 것을 배우고 그랬다고. 그래서 박당표구사가 표구사로서는 기술이 제일 뛰어났죠. 거기서 1년 남짓 일했는데, 사실 배첩이 1년 만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게 있었기 때문에 빨리 습득했지.” 이는 김표영 배첩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이 <금강신문, 2012.2.3.>과 대담한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2014년 9월 24일 9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김표영 배첩장은 16살에 배첩의 길에 들어선 이래 무려 70여년을 배첩에 신명을 바친 분입니다. 그는 우연히 사촌 형님의 작업실에 들렀다가 그림과 글자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정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배첩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 비단 따위를 붙여 족자ㆍ액자ㆍ병풍 등을 만들어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 서화 처리법을 말합니다. 배첩을 일컬어 ‘삼분화 칠분표’라고 하는데 이는 그림이나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꾸나 사람으로 태어나 옳지 곧 못하면 마소를 갓고깔 씌워 밥먹이나 다르랴." -송강 정철 ‘사람의 도리[訓民歌]’-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글은 빗소리로 그릇 알고 동자승 불러 나가 보랬더니 시내 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다나." -송강 정철 ‘산사에 묵으며 밤에 읊다[山寺夜吟]’- 이는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1536-1593)의 시다. 송강의 대표작〈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한국의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송강의 주옥같은 시와 가사들을 서예와 그림 만나 볼 수 있는 ‘제 7회 송강작품유물특별전’이 세종문화회관 한글갤러리 전시장에서 6월 18일 까지 열리고 있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사단법인 송강문화원 주최, 송강문화선양회 주관,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후원으로 열리고 있는 이번 특별전은 하와이 거주 이상윤 화백 등을 비롯한 국내외의 중견 작가들이 송강 정철의 작품을 글씨와 그림으로 빛낸 전시회다. 송강 특별전은 지난 2014년 미국 LA를 시작으로 하와이, 러시아에 이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66호 “백자철화 매화대나무무늬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 백자항아리는 조선시대 것으로 높이 41.3㎝, 입지름 19㎝, 밑지름 21.5㎝의 크기입니다. 아가리 가장자리가 밖으로 말렸고, 목 부위의 경사면부터 풍만하게 벌어졌다가 서서히 좁아진 둥근 몸체의 항아리지요. 짙고 옅음이 들어간 검은 물감으로 목과 어깨 부분에 구름무늬와 꽃잎무늬가 돌려 있고 맨 아랫부분에는 연속된 파도무늬를 그렸습니다. 또 몸체의 한 면에는 대나무를, 다른 한 면에는 매화등걸을 각각 그려 넣었기에 “매화대나무무늬 항아리”라고 합니다. 유약은 푸르름이 감도는 유백색으로, 전면에 고르게 씌워져 은은한 광택이 나지요. 이러한 항아리 형태는 16세기 분청사기에서 자주 보입니다. 매화, 대나무의 모양이나 밝은 유약색으로 보아 16세기 후반 무렵 경기도 광주군 관음리 등지의 가마에서 빚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 매화와 대나무 그림은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보아 궁중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지요. 이 항아리는 철화백자 항아리로서는 초기의 것이지만, 당당하고 풍만한 모양새에, 짙고 옅음의 변화를 준 매화와 대나무 그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