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으로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 곧 추분점(春分點)에 왔을 때다. 이날은 음양이 서로 반인만큼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 음양이 서로 반이라 함은 더함도 덜함도 없는 중용의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24절기는 단순히 자연에 농사를 접목한 살림살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세계를 함께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 춘분 무렵엔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둥지기 곧 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으려고 물꼬를 손질한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이 있으며 옛말에 ‘춘분 즈음에 하루 논밭을 갈지 않으면 일 년 내내 배가 고프다.’ 하였다. 또 니라 농사의 시작인 논이나 밭을 첫 번째 가는 애벌갈이 곧 초경(初耕)을 엄숙하게 행하여야만 한 해 동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음력 2월 중 춘분 무렵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2월 바람은 동짓달 바람처럼 매섭고 차다. 이는 바람의 신 곧 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남녘식물에 멸종위기식물 1급인 “만년콩”이 있다. 만년콩은 1970년 8월 김이만 옹(翁)이 제주도 서귀포의 돈내코 계곡의 상록활엽수림에서 발견하였다. 만년콩이란 상록을 의미하고 김이만 옹의 끝자 만(萬)자를 붙여서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나무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에서 밝히고 있다. 만년콩은 6월~7월에 흰색 꽃이 피며, 높이 30~60cm의 상록 활엽 관목 이다. 이 만년콩을 일본 대마도에서 탐사할 기회가 열렸다. 들꽃 사진작가 이명호 씨가 주관하는 대마도 들꽃 답사는 오는 6월 2일(금)부터 6월 5일(월)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계획되어 있으며, 탑사비용은 약 65만원 예정이다. 원래 탐사는 중국으로 들어가 백두산 식물탐사를 할 계획이었으나 최근 중국과의 국제관계가 좋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대마도 식물탐사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식물탐사는 멸종위기식물 1급인 만년콩이 꽃피는 때와 맞으므로 만년콩 탐사를 중심으로 이 시기에 함께 피는 남쪽 식물들을 두루 탐사하는 것이 목표다. 현장 식물탐사와 강의를 겸하며 3박을 모두 대마도에서 할 계획이다. 출발일정은 의정부에서부터 관광버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근세조선의 퇴계 이황과 함께 유학의 쌍벽으로 잘 알려진 율곡(栗谷) 이이(李耳)를 우리는 잘 압니다. 율곡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기에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을 현룡(玄龍)이라 하였으며,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하고 있지요. 특히 이곳 오죽헌에는 “어제각(御製閣)”이 있는데 여기엔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벼루의 크기는 가로 9.1㎝, 세로 16.1㎝, 두께 0.8㎝이며, 벼루 아래 위에 매화 가지를 돋을새김(양각)하였지요. 이 벼루는 1788년(정조 12) 정조가 율곡의 벼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져오라 하여 직접 보고 친필로 쓴 글씨를 새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돌려줄 때 이 어제각(御製閣)을 지어 소중히 보관하게 했습니다. 벼루 뒷면에 새긴 글씨는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내어(涵婺池) / 공자의 도를 본받아(象孔石) / 널리 베품이여(普厥施) /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龍歸洞) / 구름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서울에 번을 서려고 온 군사 가운데 옷이 허술한 사람에게 유의를 나누어주게 하고, 여러 곳의 수비 군졸과 옥중 죄인들에게 빈 섬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이어 경미한 죄수들은 석방하라고 명했다.” 《인조실록》 10년(1632) 12월 26일 기록입니다. 당시 양반들이야 춥지 않게 살았지만 군사들이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유의와 섬을 나눠주게 한 것이지요. 여기서 유의(襦衣)는 가운데 솜을 넣고 안팎으로 생무명을 받혀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옷이고, 섬은 가마니를 이릅니다. 다만 지금 쓰는 가마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이전에 사용한 것이 섬으로 모양새가 다르지요. 이것도 역시 짚으로 만들었는데, 이불이나 겉옷 대신 썼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섬에 구멍을 뚫어서 손과 목만 내놓게 해서 옷 대신 입은 것입니다. 그밖에 과거시험에서 낙제자의 시험지 곧 낙복지(落幅紙)로 군사들의 옷을 만들기도 했고, 목화를 재배할 수 없었던 함경도에서는 개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이렇게 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고생했던 백성들에게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매화는 아직 겨울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때 눈을 뚫고 핍니다. 그렇게 눈 속을 뚫고 핀다 해서 ‘설중매(雪中梅)’라고 하지요. 잎도 채 나지 않은 벌거숭이 같은 나무에서 고운 꽃송이들이 방울방울 피어날 때 우리는 그 신비함에 넋을 잃습니다.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예부터 선비들의 오랜 벗이었습니다. 매화가 사군자로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꽃과 향기가 청순하고 맑기 때문이며, 선비들이 동지부터 입춘까지 ‘구구소한도’를 그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고난을 극복하며 사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조선 중기의 문신 오달제(1609∼1637)의 <묵매>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에선 홍매화든 백매화든 외형적인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먹으로만 매화를 표현합니다. 그저 추위라는 외부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꽃이 핀 매화이기에 그것이 아름다울 뿐이지요. 가지에는 흰 매화꽃이 듬성듬성 달렸습니다. 나무의 몸체는 서예의 비백(飛白, 마치 비로 쓴 것처럼 붓끝이 잘게 갈라져서 쓴 글씨체)처럼 먹빛 속에 흰 부분이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써서 고목의 느낌을 잘 살렸지요. 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상수체로 유명한, 이도(李祹) 세종대왕에 푹 빠진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65)와 그가 설립한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를 초대한 SeMA Green 2017 “날개.파티(PaTI)”전이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효준)에서 열렸다. 전시는 3월 14일부터 5월 14일까지 두 달 동안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한국 작가를 세대별로 집중 조명하는 격년제 프로젝트 SeMA 삼색전(三色展)으로 2013년 김구림, 2015년 윤석남에 이은 전시인데 순수회화가 아닌 시각디자이너의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기는 처음이다. 이번 전시는 한 사회와 문화의 기본이 되는 글자의 근본 속성을 톺아보고 디자인 교육의 미래를 살펴보려는 취지다. 어제 저녁 5시 전시장 로비에서 열린 <날개파티전> 개전식에서 안상수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이 전시를 열면서 정말 고마워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큰 디자이너 세종 이도(李祹) 그분입니다. 그분이 600년 전에 한글을 먼저 내지 못했다면 이 나라 문화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저 또한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전시는 그 분을 위한 것입니다.” 안상수 작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릉시 구정면 학산2리 윗골마을에 가면 높이가 5.4m나 되는 거대한 당간지주 두 기가 있는데 보는 이들의 기선을 제압하듯 묵직하고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당간지주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들머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기둥이지요. 그런데 굴산사란 절이 얼마나 크면 당간지주가 5m가 넘을 정도로 거대했는지 자못 굴산사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신라 말 문성왕 9년(847)에 세웠으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이라고 하지요. 지금은 없어진 폐사터지만 당시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절터의 크기는 동ㆍ서 140m, 남ㆍ북 250m의 크기로 확인되었습니다. 또 법당터ㆍ승방터ㆍ회랑터ㆍ탑터도 확인되었지요. 굴산사는 고려시대에 지방호족들의 지원 아래 번성한 뒤 조선초 이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 이후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산사터당간지주(보물 제86호)는 물론,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굴산사터승탑(보물 제85호), 강릉굴산사터석불좌상(강원도문화재자료 제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농사가 다행히 풍년을 얻은 것은 참으로 하늘이 돌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덕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해를 이어 풍년이 들기를 바야흐로 절실히 빌거니와, 백성으로 말하면 담장처럼 늘어서서 억만(億萬)으로 셀만하다.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서 메우고 막아 두루 찼는데, 내가 오늘 이 곳에 와서 이 백성을 대하니, 오가는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할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다마는...“ 위는 《정조실록》 1779년(정조 3년) 8월 3일 기록 일부입니다. 정조가 화성 행차를 하는 도중 구경나온 백성들을 보고 한 말입니다. 조선 삼대 성군의 하나인 정조는 풍년이 든 것은 덕이 없는 자신을 보면 그저 하늘이 돌본 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백성 한 사람 마음이라도 얻지 못할까봐 걱정합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열고 현릉원(융릉)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찾아뵙기 위해 나서는 행차에서의 일입니다. 정조는 이어서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라는 순자의 ‘주수군민론(舟水君民論)’를 들어 임금은 배와 같아서 배를 띄우는 백성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용정의 3ㆍ13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어린 학생들이 일제에 무참히 희생되어 묻힌 무덤을 찾았을 때의 그 비애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리디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되찾겠다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죄로 일제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 부모의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지요?” 2014년 9월, 간도지역의 여성독립운동가 유적지를 답사한 이윤옥 시인은 <용정 3ㆍ13 반일 의사릉>에 참배한 심경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3월 13일은 북간도 용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입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 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 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는 <독립신문>1920년 1월 1일치 기사입니다. 1919년 3월 1일, 대대적인 고국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서도지역)에서 전승되던 소리로이제 북한 지역에 속해버린 지역적 특성 때문에 더는 본고장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달래려는 시도가 어제 3월 9일 밤 8시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있었다. 국립국악원의 대표적인 정통 국악 공연 <목요풍류>의 하나로 열린 “두고온 소리, 보고픈 산하” 공연이 그것이다. 공연은 130석 규모의 풍류사랑방을 가득 메운 가운데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었다. 사회와 공연의 두 가지를 함께 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유지숙 명창은 먼저 이 공연을 열게 된 배경을 소개한다. “서도소리 본고장의 소리를 들려드리고픈 일념에서 이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도소리 1세대 선생님들이 이제 거의 고인이 되고 살아계신 분들마저도 고령이라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이 의욕적으로 참여해주셔서 성사되었습니다. 중국 연변에서 힘들게 서도소리를 전승해나가시는 전화자ㆍ최성룡 교수님과 고령임에도 소리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박기종ㆍ김경준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공연의 시작은 연변 동포들의 몫이다. 연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