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 교토대학교 서고에서 조선 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고문헌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센터장 정우봉)는 12∼19일 일본 교토대 서고를 조사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친필 시첩과 조선후기 서화, 고문서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에는 그동안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추사의 서첩, 불경, 상업문서, 다산의 경세유표 이본, 문집 등 국내에 소장되지 않은 유일본 자료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 가운데 <노설첩(砮舌帖)>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와 함경도 북청 유배생활을 마치고 과천에 은거하던 때인 1852∼1856년 자신의 시 “석노시(石砮詩)”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행서체로 쓴 것이다. 서첩의 제목은 두 시의 제목에서 한 글자씩 따서 「砮舌帖(노설첩)」이라고 이름 붙였다. 모두 12절(折) 절첩본이고, 1절의 크기는 가로세로 12.8×22.1cm이며, 12절의 길이는 154cm이다. 경도대학 부속도서관 다니무라문고(谷川文庫)에 귀중서로 분류되어 있으며, 국내에는 처음 공개된다. 박영민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연구교수는 “이즈음 추사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패두(牌頭, 장용위 소속 패의 우두머리)의 망장(望狀, 벼슬아치 후보 세 명씩 골라 올리는 보고서)을 임금께서 친히 보시고 낙점(落點)하였는가? 주상께서 만일 아셨다면 어찌하여 끝의 사람에게 낙점하셨겠는가?’ 하였다. 황희가 이에 임금께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근밀(近密)한 자리(승정원)에 있으므로 남의 의논을 매우 두려워하는데, 지금 박유손에게 욕을 당하였으니 집으로 물러가겠습니다.“ 이는 《태종실록》 8년(1408) 8월 18일 기록입니다. 박유손은 개국공신인 조온에게 청탁하여 임금 호위부대의 우두머리가 되려 했습니다. 이에 조온이 박유손을 추천하였으나 태종은 다른 이를 임명하였지요. 자신의 청탁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박유손은 정승인 황희를 찾아가 그를 따졌는데 청렴했던 황희는 이런 일이 생긴 것을 자신의 무능함으로 여겨 태종에게 사실을 고하고 사직을 청한 것입니다. 이에 태종은 청탁을 한 박유손을 남포로 귀양 보냈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과 비슷한 것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를 “분경방지법(奔競防止法)“이라 하는데 분경은 '분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菠薐傳數名(파릉전수명) 시금치는 여러 명칭이 전해지는데 其始出波羅(기시출파라) 그 시작은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네 我國有俗稱(아국유속칭) 우리나라에도 세속의 칭호가 있는데 恐是赤根訛(공시적근와) 아마 적근의 와전인 듯싶네“ 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 ~ 1708)의 한시(漢詩) “파릉(菠薐, 시금치 ‘파’, 시금치 ‘릉’)”입니다. 한시 가운데는 특이하게도 시금치를 소재로 한 것인데 김창업은 이 시금치를 “시근채(時根菜)”라고 풀이를 달아놓았습니다. 시금치는 페르시아에서 들여온 것으로 파사채, 파사초, 파채라고도 했으며, 조선에서는 뿌리가 붉어 “적근채(赤根菜)”라고도 불렀다지요. 페르시아를 한자를 빌려 파라(波羅)고 했습니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선조(宣祖) 때 이후로 나온 문장은 볼만한 것이 많은데 시와 문을 겸한 이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다.”라고 하여 김창협의 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대 명문 출신으로 김창협은 동부승지ㆍ대사성ㆍ대사간을 지냈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죽자 벼슬을 버리고 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빼앗긴 고국 되찾으려 호랑이 사감 되어 다독이던 그 굳은 의지 고종황제와 엄비조차 신임하던 우국의 여인 어느 친일분자의 독약에 뜻 못 펴고 이역땅 북경에서 눈 감았네 아! 슬프도다 그 장대한 뜻 펴지 못함이“ 이윤옥 시인이 《서간도에 들꽃 피다 2, 2012, 도서출판 얼레빗》에서 노래했던 “이화동산에서 독립정신 키운 호랑이 사감 하란사” 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시에서 노래했던 하란사는 요즘 새롭게 알려진 본명이 <김란사> 애국지사다. 서울시교육청정독도서관(관장 김희선) 부설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3ㆍ1절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 인문계 최초의 학사 학위를 받은 김란사의 일생을 통해 진정한 나라 사랑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오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특별전을 연다. 김란사 애국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할 당시 기혼여성이라 하여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김 지사는 밤에 프라이 학장을 찾아가 촛불을 훅하고 끄면서 “우리가 깜깜한 게 이 등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시오.”라고 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지사는 부유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위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 선생의 외동딸이 파락호(破落戶 :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로 알고 평생을 원망했던 아버지가 건국훈장을 추서 받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으로 남긴 편지글입니다. 김용환은 안동에서 악명 높은 파락호였습니다. 김용환은 안동 일대 노름판을 주름잡았는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모두 걸고 막판 내기를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지면 하인들을 시켜 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남해안의 통영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한산도ㆍ사량도ㆍ갈도 따위의 섬 지방에서 예로부터 지내는 마을굿의 하나로 국가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南海岸別神굿)”이 있습니다.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비손하는 이 굿은 주로 음력 정월 초에 거행되는데 마을에 따라 1년 또는 2~3년에 한 번 갖는 큰 굿이지요. 별신굿의 ‘별신’은 현지에서 ‘별손ㆍ벨손ㆍ벨신’ 따위로도 부르는데, 이 굿은 개(바다)를 먹이는 굿이라고 합니다. 동제(洞祭)가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것에 견주어 여러 신을 모시는 축제 성격이 강하지요. 굿은 세습무가 주관하나 동해안 지역처럼 집단을 이루지 않고 주무(主巫) 1명 외에, 여러 명의 조무(助巫)가 함께 하고 악사는 장구, 북, 징, 꽹과리는 물론 삼현육각이 꾸려집니다. 남해안별신굿은 무당의 노래가 뛰어나고 반주악기에 북이 함께 하는 것이 특징이지요. 무녀는 부채ㆍ무령(신방울)ㆍ신칼ㆍ손대 같은 무구(巫具)를 씁니다. 굿의 순서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보통 굿은 부정굿ㆍ골맥이청좌굿ㆍ당맞이굿ㆍ화해굿ㆍ각댁성주굿ㆍ천왕굿ㆍ심청굿ㆍ손님굿ㆍ황제굿ㆍ부인곤반굿ㆍ용왕굿ㆍ꽃노래굿ㆍ대거리굿 따위의 큰 규모로 진행되고 신앙성이 뛰어나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날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냥 글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아기자기한 이야기서부터 역사, 문화, 예술, 풍습, 민속에 관한 이야기를 짧고, 쉽고, 재미나게 쓰는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쓴 글이 2015년 3월 9일로 3,000회를 맞이했다. 300편을 책 한권으로 묶는 다면 <한국문화 고갱이>에 관한 책이 10권으로 나오고도 남을 분량이다. 주말만 빼고 일년 열두 달 10여 년을 날마다 원고지 6장 안팎으로 쓴 3000회의 원고지량만도 18,000장이 넘는다. 이 정도면 10권으로 된 조정래의 <태백산맥> 원고지 16,500장을 훌쩍 넘는다. 이것은 한 가지 주제가 아니라 3,000개의 주제로 쓴 글이니만치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다.” 위 글은 인터넷신문 <대자보>의 이창은 발행인이 2015년 4월 9일에 쓴 것입니다. 2004년 6월 4일 시작한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의 3,000호 째를 맞아 그 가치를 따져본 것이지요. 이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는 그 3,000번째를 넘어 3,500번이 되었고, 5,000번, 10,000번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12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은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려 하면 ‘그러면 어때요?’라고 하였다.” 이는 춘원 이광수가 일제강점기 월간잡지 《조광》 1936년 4월 호에서 한 말입니다. 일제를 향해 고개를 숙일 수 없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년 11월 7일 ~ 1936년 2월 21일) 선생의 기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단재 선생은 일제강점기 드물게 언론,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 세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분입니다. 먼저 언론인으로서는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에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침략 논리를 적극 비판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사학자로서는 일제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식민사관에 맞서서 역사의식을 갖추는 것이 곧 애국심을 키우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인 《독사신론(讀史新論)》과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립한 《조선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진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637호 “도기 바퀴장식 뿔잔[陶器 車輪飾 角杯]”이 있습니다. 이 유물은 수레바퀴가 붙은 높이 18.5㎝, 길이 24㎝의 가야 토기인데 출토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토기의 받침은 이 시대 굽다리 접시(고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인데 긴 직사각형의 굽구멍(투창)이 4개 뚫려 있습니다. 받침 위에 U자형의 뿔잔(각배)을 얹어 놓고, 그 등에는 양쪽으로 고사리 모양으로 꾸밈이 있는데 한쪽은 없어졌지요. 이 U자형의 뿔잔은 액체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보입니다. 뿔잔의 좌우 옆에는 바퀴를 붙였는데, 둥근 바퀴는 축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모양의 창을 6개씩 뚫어 바퀴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흑색의 바탕흙(태토)은 쇠가 녹슨 듯한 색깔을 띠며, 전형적인 가야 토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 오리모양ㆍ인물모양ㆍ말모양ㆍ배모양 토기들처럼, 단순하고 환상적인 모습입니다. 이 뿔잔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 지에는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 술잔으로 보는 설과 향로로 보는 설이 있고, 향로로 보는 설은 불교와도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있지만 무덤에 주검과 함께 묻는 껴묻거리[副葬品]로 보기도 합니다. 껴묻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옥 가운데 온돌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통의 맛과 현대화를 추구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옥문화의 해설 또한 중요한 때다. 이에 이와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사단법인 국제온돌학회와 사단법인 한국현대한옥학회 주최, 전통온돌기술자협회 주관으로 <제18회 전통온돌기술자 2급>과 <제2회 한옥문화해설사 2급> 교육과정을 모집한다. 교육 내용은 주말주택 건강주택 개요, 온돌(구들)의 개요, 친환경 생태주택 이론과 실제, 전통건축 온돌 체험, 건축과 온돌의 기초이론, 온돌 황토주택의 개요, 전통구들 모형만들기 실습, 황토방구들 짓기 이론 및 실습., 특수온돌(구들) 기초이론, 온돌침대 흙침대 개요 등이다. 교육 과정 수료자에게는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각종 교육, 행사 등에 우선 초대, 황토주택 관련 자재 할인 혜택, 전통구들모형만들기 실습, 황토방구들 짓기 이론 및 실습., 전 과정 이수후 소정시험 합격자 전통온돌기술자2급 자격증 수여, 전통온돌기술자2급교육 평생무료참석과 수료증 수여 등의 혜택을 준다. 협력 교육 기관으로는 나무와 흙연구원 (원장: 문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