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안 출신으로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었던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애와 나라사랑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이 건립됐다. 기념관은 349㎡ 규모로 석오의 흉상과 태극기를 배치하고, 연대별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이 자주 애용한 '산류천석(山溜穿石.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을 새긴 가로 3m 세로 5m규모의 휘호석도 세웠다. 전시관에는 지난해 9월 선생의 손자인 이석희 씨가 보존하던 친필 휘호와 서신, 임시정부 문서, 초상화 등 유품도 전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010년 2월 23일 언론에는 위와 같이 천안에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의 기념관이 열렸다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선생은 1869년 오늘(2월 17일)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신 분으로 72살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임시정부 맨 앞에 서서 대한민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선생은 스무 살 때인 1896년 만민공동회에 앞장섰다가 투옥되었고,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제목은 “편지”지만 부쳐보지도 못한 편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가 쓴 동시지요. 윤동주가 남긴 동시 선물 37편 가운데 하나인 여기서 윤동주는 말합니다. 글씨 대신 눈만 한 줌 넣은 편지를 부치겠다고요. 그가 정말 깨끗하고 어린 아이처럼 맑은 심성을 지녔음을 우리는 이 동시로써 알 수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반년 앞둔 1945년 오늘(2월 16일)은 눈이 안 오는 나라로 간 누나를 몹시 그리워했던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스물일곱 짧은 삶을 마감한 날입니다. 간도 출신의 조선 청년 윤동주는 1943년 7월, 귀향길에 오르려다 일경에 체포된 이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이듬해 3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습니다. 일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통보했지만 윤동주는 학창시절에 축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건강했었지요. 그러던 20대 청년이 수감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돌연한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경향신문을 보니 보건복지부와 중앙입양원이 함께 광고를 냈습니다. 그런데 광고는 영어를 활용한 것입니다. "남(Other)이 아닌 엄마(Mother)가 되어주세요"입니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그림에 영어로 "Mother"라고 크게 써놓았습니다. 국어기본법을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영어고 광고한 것은 국어기본법 위반이 되는 것 아닌가요? 제발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말 헤치는 일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392년 7월 17일 임금에 오른 태조는 다음 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조가 바뀐 사실을 알리고 이어서 하루 뒤인 7월 19일에는 왕조가 바뀐 사실을 승인해 달라는 사신을 따로 보냈습니다. 이에 명나라 홍무제는 고려의 일은 고려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다만, 나라 이름을 바꾼다면 바로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당일 신하들을 모아 놓고 나라 이름에 대한 논의를 했는데 새로운 왕조의 나라 이름으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이 추천되었습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단군조선을 이어받았고 기자조선ㆍ위만조선처럼 이미 예전에 있었던 이름이었으며,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를 새로운 왕조의 이름으로 보내자 명나라는 새로운 왕조의 이름으로 ‘조선’을 선택합니다. 《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입니다. “1393년(태조 2) 2월 15일. 예문관 학사 한상질이 중국에서 돌아와 명나라 예부에서 보내는 공문을 전달했다. 그 공문에 ‘……동이(東夷)의 나라 이름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된 지가 오래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인데, 이 종묘제례 때 연주하는 음악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그 중요성 때문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으로 오른 뒤,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묘제례악이 지금까지 전승되는 데는 큰 수난을 겪어왔지요. 원래 조선왕조 때는 이 종묘제례악을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인 장악원(掌樂院) 악공들에 의해서 연주되어 왔습니다. 이 장악원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에 “교방사(敎坊司)”로 이름이 바뀌고 구성원의 숫자는 무려 772명까지 늘어났지요. 그러나 고종이 강제 폐위된 이후 305명으로 줄어들고 1910년 일본이 강제합병한 뒤엔 장악원을 없애고 대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를 두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성원도 종묘제례악 연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도 안 되는 57명으로 대폭 줄였지요.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악공들은 종묘제례악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금연구회 주관으로 오는 2월18일(토)과 19일(일) 이틀 동안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세기의 문호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가운데 가장 강렬한 운명적 연애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을 각색한 "해미오 & 금이에 (Haemeo and Geumie)" 공연이 펼쳐진다. 해금연구회는 1992년 발족 이래 매년 정기연주회를 열며 전통음악뿐만이 아닌 다양한 해금창작곡 발표와 실험적인 해금창작곡들의 위촉을 통해 해금이라는 악기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 해금의 저변확대와 신인연주자들의 발굴에 힘써온 단체이다. 해금연구회는 현재 전국의 약 330여명의 해금전공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기연주회 및 지방 순회연주회 뿐 아니라 음반과 악보집도 펴냈으며, 해금음악의 현대화에 힘쓰고 더 나아가 세계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해금연주자이자 서울대 국악과 교수로 재직중인 양경숙 예술감독은 해금연주의 디바 김애라를 음악감독으로, 고수영(국립국악원 정악단 부수석), 노은아(서울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를 총괄기획, 4년째 호흡을 함께 맞추고 있는 권우 경연출자와 함께 본 공연을 진행한다. 해금,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가면 정월 대보름날 낮에 쇠머리란 도구를 가지고 “쇠머리대기”를 합니다.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로 나누어서 서까래를 엮고 새끼로 묶어 쇠머리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고 이를 마을의 힘센 젊은이들이 메고 공터에서 서로 부딪히는데 부서지거나 땅에 먼저 내려앉는 쪽이 싸움에 지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펴낸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목마경쟁(木馬競爭, 목마싸움)“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60년대에는 목우희(木牛戱) 또는 목우전(木牛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무쇠싸움・소나무싸움 따위로도 불렸는데 1969년 이 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 쇠머리대기란 이름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 놀이로 행하여 오던 것을 1961년부터 3・1절에 행하게 되었지요. 이 고장이 기미 3・1 독립만세운동 때 조상들이 피 흘려 싸웠던 것을 기리기 위해 ‘3・1 민속문화제’를 열고, 이때에 호국 영령에게 제사지내기, 영산의 고유 민속놀이인 쇠머리대기, 줄당기기, 서낭대싸움놀이, 진잡이놀이, 문호장굿놀이 따위를 모두 함께 합니다. 쇠머리대기를 할 때에는 영산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가까운 다른 마을에서도 많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능금 골 열아홉 처녀 / 사진 들고 떠난 하와이 / 물 설고 말 설은 이국땅서 / 받은 설움 물리치고 / 고난의 순간마다 / 태평양 넘어 / 광복의 빛 그리며 / 가시밭길 헤쳐 나온 / 임의 발자국 - 이윤옥 시인의 <태평양 넘은 광복의 빛 '이희경’> 가운데- 일제강점기, 한국 여성들의 독립의 함성은 멀리 하와이부터 드넓은 중국 땅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려왔다. 이러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부터, 의병, 기생, 해녀, 학생, 의사, 교육가 등 직업의 귀천을 불문하고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쳐 뛰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들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고 지내왔으며 올해 98주년을 맞이하는 3·1절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삶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자 이윤옥 시인은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6권》을 통해 숭고한 삶을 살다간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이번에 제98주년 3・1절을 맞아 한국화가 이무성 화백은 이 이윤옥 시인의 시에 시화를 그린 작품 33점을 선보인다. 이번 시화전은 노동자 민족차별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정월대보름, 우리 겨레 명절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날 많은 세시풍속이 전해옵니다. 임동권(任東權)이 쓴 《한국세시풍속》을 보면, 한 해 동안 세시풍속행사는 모두 192건인데 그 가운데 정월 한 달이 102건으로서 전체의 절반이 넘으며, 특히 대보름날 하루에 관계된 세시풍속 항목은 55건으로 한 해 세시풍속의 4분의 1이 넘습니다. 그만큼 우리 겨레에게는 정월대보름이 가지는 의미가 큰 것이지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가운데는 “용알뜨기”도 있습니다. 용알뜨기란 부인들이 닭이 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남들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데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이 물을 떠오는 것은 집안에 복을 가지고 오는 것이므로 복(福)물, 수복수(壽福水), 복물뜨기, 복물퍼오기, 용물뜨기, 새알뜨기라고도 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온다. 이것을 용알뜨기라 한다. 맨 먼저 물을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물은 그 전날 밤에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알을 낳은 곳이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으로 조선 기록문화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1,893권 888책.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이 《조선왕조실록》을 남한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가 1971년 실록 번역에 착수해 1993년 끝냈고, 북한은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 번역을 마쳤다. 최근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민족문화》에 올린 논문 “남북한 조선왕조실록 번역 비교”에서 남한과 북한의 현종실록 번역문을 비교ㆍ분석한 결과 한자와 한자어의 쓰임이 가장 큰 차이라고 밝혔다. 그는 “남한에서는 실록을 번역할 때 일반 대중이 아닌 전문가를 겨냥했는지 국한문 혼용을 원칙으로 하고 한자어도 빈번히 썼지만, 북한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자 병기를 하지 않고 역사 낱말도 되도록 쉽게 풀어썼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남한이 "이번에 신방(新榜)을 분관(分館)할 때 괴원(槐院)의 관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