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시는 15일 고려말 최고 문학가 이숭인의 《도은선생시집》,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최고수준의 고려사경 《묘법연화경》 권6 따위를 국가문화재(보물)로 신청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한글로 된 세계지리교과서 《사민필지》를 등록문화재로 신청했다고 것입니다. 《사민필지》는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가 펴낸 것으로 당시 조선인의 세계지리인식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순전히 한글로만 쓴 까닭에 더 많은 조선인들이 새로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와 한글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입니다. 한글 전용인 이 책은 1890년대 국어 연구의 자료가 된다고 하지요. 표기법에서 한글만으로 쓰면서도, ‘글ㅅ자, 언문ㅅ법’ 등 사이시옷이 쓰였고, 된소리 표기에 전통적인 된시옷과 함께 ‘ㄲ, ㅆ’ 등이 ‘니, 똑똑이’ 등과 같이 쓰인 점이 주목됩니다. 그리고 유럽 나라들 이름을 영어식 발음에 따라 “유로바・노웨국・쉬덴국・덴막국・네데란스국”처럼 적기도 했습니다. 또 헐버트는 구전으로만 전해 오던 아리랑을 서양 음계로 채보하여 전 세계에 소개하기도 했지요. 헐버트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수원시 영통구 수원박물관에는 영조임금이 노년에 쓴 어필(御筆; 임금이 쓴 글) 12점을 모아 엮은 서첩이 있습니다. 이 서첩은 가로 23.7㎝, 세로 36.4㎝로 보물 제1631-3호 <영조어필-읍궁진장첩(英祖御筆-泣弓珍藏帖)>이지요. 표지 오른쪽 위에는 ‘英祖御筆(영조어필)’, 왼쪽에는 ‘泣弓珍藏(읍궁진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읍궁(泣弓)’이란 화양서원이 있었던 화양계곡의 읍궁암(泣弓巖)을 가리키고, ‘진장(珍藏)’이란 ‘진귀하게 여겨 잘 간직한다.’는 뜻이어서 ‘화양서원에서 보관해왔던 서첩’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서첩에는 ‘신사년 정월 내의원에 답한다(辛巳正月十六日藥院批)’라고 쓴 부전지(附箋紙; 간단한 의견을 적어 덧붙이는 쪽지)를 붙인 비답(批答; 임금에게 아뢰는 글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비롯하여 1770년 7월 세손 정조를 데리고 홍문관에 거동하여 야대(夜對; 왕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 학문 등을 논하는 일)를 한 뒤 세손과 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사언시 〈서시옥당 書示玉堂〉 따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 영조임금이 홍문관에 간 직후 홍문관에 써준 것으로 보이는 ‘學士館(학사관)’이라는 글자와 문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26년 오늘(12월 14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뽑힌 날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임시정부 행정부 우두머리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919년 3ㆍ1만세운동 직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애국지사들이 4월 11일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입법기관)을 꾸렸습니다. 이때 임시정부의 행정부인 국무원(國務院)을 구성하고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추대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를 ‘대통령(President)’으로 번역해 사용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국 9월 1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지요. 하지만,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크게 갈등에 휩싸이고, 미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해 이동휘, 신채호 등이 임시정부를 떠납니다. 그리고 1925년 임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탄핵한 뒤 박은식(朴殷植)을 대통령에 선출했습니다. 이어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고 첫 국무령(행정부 우두머리)에 여러 계열로 갈린 독립운동계의 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 가운데는 악기장(제42호)도 있습니다. 악기장이란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 또는 그러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 이미 관악기・현악기・타악기가 모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또 《숙종실록》 숙종 8년(1682) 1월 28일치를 보면 조선시대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이란 별도의 기관에서 나라 행사에 쓸 악기를 만들었지요. 악기장은 전통악기의 주재료인 나무와 가죽, 명주실, 대나무, 쇠, 돌, 흙 따위 8가지 재료를 써서 악기를 만드는데 그 재료에 따라 금부(金部, 쇠붙이로 만든 악기), 석부(石部, 돌로 만든 악기), 사부(絲部, 실로 만든 악기), 죽(竹部 - 대나무로 만든 악기), 포(匏部,- 박으로 만든 악기 따위로 나뉩니다. 금부 악기로는 편종, 특종, 방향, 징, 나발 따위가 있는데 이 악기들은 주로 제사 음악이나 규모가 큰 합주에 주로 쓰던 악기들이지요. 석부 악기는 돌을 깎아서 만든 악기로 편경, 특경 따위가 있습니다. 또 사부 악기는 가야금, 거문고, 비파, 해금, 아쟁이 있고, 죽부 악기는 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계적인 대발굴이었다. ‘신라의 예술혼이 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 있었구나.’ 하는 그 기쁨도 잠시, 환희의 절정에 달한 순간 ‘아차!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이 말은 김정기 천마총 발굴단장의 말로 2016년 11월 03일자 <시사IN>에 실린 기사 일부입니다. 1973년 천마총 발굴에서는 국보 제188호 천마총 금관(天馬塚金冠)이 출토되어 세간의 관심이 온통 쏠린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보고 싶다 하여 출토된 다음날 청와대로 옮겼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김정기 단장의 말처럼 당시 발굴단을 비롯하여 학자들의 관심은 금관보다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 뒤에 국보 제207호로 지정)”에 있었습니다.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백마처럼 보이는 말 그림입니다. 말다래는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지요 신라의 예술혼이 즈믄해(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있었던 세계적 유물 천마도. 김정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 가면 명승 제22호 “영광 법성진 숲쟁이”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법성진성(法聖鎭城) 그리고 성 위에 조성된 숲을 이릅니다. 숲쟁이는 법성포 마을에서 홍농읍 방향으로 가는 지방도로 고개 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친 느티나무 숲이 중심인데 ‘쟁이’란 성(城)이라는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뜻하지요. “법성진(法聖鎭)”은 조선 태조 7년(1398)부터 조창(조세쌀을 경창으로 나르기 위해 물길 요충지에 설치한 창고)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군 만호의 지휘 아래 수군의 상비 병력이 배치된 곳입니다. 원래 법성진성은 중종9년(1514)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62m이며 현재는 북벽만 전구간이 남아 있고 서쪽과 동쪽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그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성벽에 새겨진 글 등은 조선시대 진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하지요. “법성포(法聖浦)”는 삼국시대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과의 해상 교통로 상에 있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鼠本小盜其害小 쥐는 원래 좀도둑이라 그 피해가 적지마는 汝今力雄勢高心計麤 너는 지금 힘세고 권세 높고 마음까지 거칠어 鼠所不能汝唯意 쥐들도 못 하는 짓 너는 맘대로 하니 攀檐撤蓋頹墍塗 처마 타고 뚜껑 열고 담장까지 무너뜨리네“ 위는 다산 정약용이 쓴 <이노행(貍奴行)>라는 한시 일부입니다. 1810년에 지은 것으로 남산골 늙은이가 고양이를 키웠는데 그 고양이가 오래 묵으니 요사하고 흉악한 늙은 여우가 되어 온갖 패악질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처마 타고 뚜껑 열고 담장까지 무너뜨리고, 고기 훔쳐 먹고, 항아리까지 뒤집는’ 고양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또 고양이에게 쥐잡이 대장 삼았는데 지금은 쥐 한 마리 잡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도둑질을 한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쥐떼들이 하인처럼 떠받들고는 나팔 불고 북치고 떼를 지어서는 깃발 휘날리며 앞장서 가기까지 한다는 한탄을 하지요. 이에 늙은 주인은 화살로 쏴 죽이고 싶다고까지 합니다. 이 한시는 다산의 대표적인 우화시(寓話詩)이며, 남산골 늙은이는 일반 백성, 쥐는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는 벼슬아치들에 각각 비유하여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에 해당하는 절기 “대설(大雪)” 입니다. 대설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절기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 때 눈이 그리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대설이 있는 이즈음 음력 11월은 농부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농한기(農閑期)이기도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11월이라(時維仲冬爲暢月) 대설과 동지 두 절기 있네(大雪冬至是二節)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六候虎交麋角解)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鶡鴠不鳴蚯蚓結)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荔乃挺出水泉動)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身是雖閒口是累)“ - 이하 줄임 이는 열두 달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기록한 김형수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의 일부입니다. 이즈음 관련된 속담으로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눈이 많이 내리면 눈이 보리를 덮어 따뜻하게 하므로 동해(凍害)를 적게 입어 보리 풍년이 든다는 의미입니다. 요즈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부산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가면 “귀때 달린 덧무늬토기[토기융기문발(土器隆起文鉢)]”가 있습니다. 이 토기는 부산 영선동 조개무지(貝塚, 패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석기시대 그릇입니다. 바탕흙이 점토질인데 황갈색을 띠며,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서서히 검은빛이 보이고, 바닥이 둥근 모양이지요. 그 크기는 높이 12.4㎝, 지름 16.4㎝로 보물 제59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 이 토기는 아가리(구연부, 口緣部) 한 쪽에 주전자 부리처럼 짧은 귀때가 붙어 있어 내용물을 담아 따르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가리 아랫부분에는 솟은 꾸밈무늬가 있는데 이를 W자형으로 이어서 띠 모양으로 붙이고 도구로 눌러서 눈금을 새겨 장식효과를 살리고 있지요. 이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들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워 매우 의미 있는 유물입니다. 이 토기는 또 러시아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의 덧무늬토기 문화가 한반도 동북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발달한 것으로 보며, 신석기시대 전기에 만든 것인데,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조개무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토기가 발견된 일이 있다고 하지요. 다만 이 토기가 출토된 영선동 조개무지는 1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성종 때 한성부 좌윤 홍흥(洪興, 1434∼1501)은 나랏일을 하는데 엄격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천한 백성에겐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그가 초헌을 타고 행차하는데 감히 술 취한 동네 할멈들이 초헌을 가로막으며 “나리! 술이 이렇게 좋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금주령도 좀 풀어주시지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금주령을 풀어주며, “하지만 술을 너무 마셔 나라 재물을 너무 축내면 안 되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랏일을 하는데 있어서 특히 힘 있는 벼슬아치들에겐 참으로 엄격했습니다. 한번은 왕자가 집을 짓느라 굉장한 역사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집을 짓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도목수를 불러 “집짓는 데는 간수와 정해진 치수가 정해진 법도가 있으니 아무리 왕자라 해도 법에 정해진 것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다. 그러니 네가 죽기 싫거든 아예 지나치게 짓지 마라.”라고 명했습니다. 당시는 벼슬 품계에 따라 건축법의 제한이 엄격했었지요. 그러자 홍흥의 호령을 전해들은 왕자는 도목수를 홍흥에게 보내 “긴 것은 끊고 간수가 넘은 것은 모두 헐어 법을 범하지 않겠소.”라며 사과하기에 이릅니다. 한 나라의 왕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