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1월 4일(금) 늦은 1시 서울광장 6,000㎡가 4천여 명의 다양한 국적의 세계인이 가득 메워 50여 톤의 김장김치를 버무리는 '초대형 김장터'로 변신했다. 바로 「제3회 서울김장문화제」가 열린 것인데 같은 시각, 도쿄 신주쿠에서도 1,300년 전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 후손들의 뜻을 기리고 고국의 우수한 음식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모인 1천여 명이 김장김치를 버무리는 '도쿄 김장문화제'가 동시에 진행됐다. 한ㆍ일 양국의 김장문화제를 연계 개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지난 8월 노들섬과 일본 고마진자에서 각각 배추 모종심기행사를 가진 데 이어 개막식도 한ㆍ일 양국에서 동시에 열어 화합과 상생의 메시지를 전했다. 서울광장은 김장문화의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400여 명의 외국인들도 함께해 더욱 빛을 발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사라(SARA, 20) 양은 히잡을 두르고 그 위에 앞치마와 두건 차림을 한 채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김치 버무리기에 바빴다. 그는 “처음 이런 체험을 해보는데 정말 재미있다.”며 김치가 맵지 않으냐는 질문에 참 맛있다면서 말레이시아에 돌아가서도 좀 어렵겠지만 김치를 담가먹고 싶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청자 종류에는 철회청자(鐵繪靑磁)도 있는데 회고려(繪高麗)화청자(繪靑磁)라고도 부릅니다. 이 철회청자는 순청자(純靑磁)에 철분물감으로 무늬를 나타낸 청자입니다. 그 철회청자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113호 청자 철화 버드나무 무늬 병이 있습니다. 높이 31.6㎝인 이 병은 전체적으로 선의 변화가 거의 없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모양이지만, 어깨 부분은 적당히 깎아내어 비스듬한 모습으로 형태상의 단조로움을 덜어냈지요. 대체로 무늬를 작품 가득히 표현하는 보통의 철회청자와는 달리, 청자 철화 버드나무 무늬 병은 몸체 양면에 한 그루씩의 버드나무를 그렸을 뿐, 일체의 꾸밈이 생략되었습니다. 대담하게 단순화된 버드나무의 간결한 표현에서 운치 있고 세련된 감각이 엿보인다는 평가입니다. 그림은 갈색을 띠고 있으나, 한쪽 면의 버드나무 아랫부분과 다른 면의 버드나무 배경부분은 1,000℃ 이상에서 불완전연소를 한 탓에 담담한 푸른빛을 띱니다. 이는 굽는 과정에서 우연히 일어난 결과이지만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있지요. 형태상의 적정한 비례와 어깨의 모죽임, 몸체의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 버드나무의 독창적인 표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쵸 볼 불근 골에 밤은 어이 뜯드르며 벼 뷘 그르헤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닉쟈 체 쟝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이는 황희 정승이 지은 시로 “대추볼이 붉은 골짜기에 밤은 왜 떨어질까? 벼를 베어 낸 그루터기에 게는 어이하여 기어 나와 다니는고? 술이 익었는데 마침 체 팔러 다니는 장수가 오니 (체를 사서) 술을 걸러 먹지 않고 어이 하리.”라는 뜻입니다. 체장사가 지나만 가도 술을 걸러먹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황희 정승은 술을 좋아해서인지 장수 황씨 집안에 내려오는 술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호산춘이 그것이지요. 호산춘은 명재상 황희 정승의 증손인 황정이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 집성촌을 이뤄 살면서부터 황정을 입향조로 하는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택에서 전승돼온 가양주입니다. 현재 기능보유자는 권숙자 선생으로 권씨는 19세에 황씨 문중으로 시집와 50년 넘게 호산춘을 빚어왔습니다. 문헌에 ‘춘’자가 들어가는 이름의 술로는 ‘약산춘’, ‘한산춘’, ‘백화춘’ 따위가 있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술은 황씨 문중의 호산춘 밖에 없지요. 호산춘은 멥쌀, 찹쌀, 조, 솔잎, 물로 담그고 술이 완성되는 기간은 약 한 달쯤 걸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기도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733-2호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憲宗嘉禮陳賀圖 屛風)”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헌종가례진하도 병풍>은 8폭 병풍으로 1844년(헌종10) 조선조 제24대 임금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孝定王后)와 가례(嘉禮)를 치른 뒤 진하(進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모여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던 일) 장면을 그린 궁중기록화입니다. 8살에 즉위한 헌종은 정비였던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1828~1843)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홍재룡의 딸을 계비 효정왕후로 책봉하였지요. <헌종가례진하도병풍>은 모두 8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제2첩에서 7첩까지 여섯 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한 진하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풍 그림을 보면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이 산수, 나무, 사람과 말들과 함께 호화롭게 묘사된 가운데, 문무백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집결되어 있지요. 임금과 나라를 상징하는 의장이 총동원된 진하 장면은 조선왕실문화의 위엄과 화려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 주고 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7월 25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국보 제151-(3)호)’이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의 새 식구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의 모든 왕대에 걸쳐, 임금의사후 재위 기간 중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펴낸 국가기록물을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합니다. 실록은 당대에열람하거나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도 함부로 볼 수 없었으며, 후세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바르게 기록하고 안전하게 잘 보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록 같은 중요한 기록물은 전쟁이나 화재,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같은 책을 여러 부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이렇게 분산 보관하는 것을 ‘분상(分上)’이라고 하며, 분상하여 보관하던 시설이 바로 ‘사고(史庫)’입니다. 그 중오대산의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이 ‘오대산사고본’입니다. 조선초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ㆍ성주ㆍ전주 등 네 곳에사고(4대 사고)를 두고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만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실록을 다시 간행하였는데, 이때 기존의 서울 춘추관과 새로 설치된 강화도ㆍ태백산ㆍ묘향산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체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제2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까지 지냈던 독립운동가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 선생이 한 말로 오늘은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날입니다. 선생이 이 말을 한 뜻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신문’과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고 선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배달겨레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배달겨레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하였던 것이지요. 마침내 선생은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안중근전(安重根傳)》 등을 쓰고 결국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병든 아내가 치마를 보내 천리 밖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는데 오랜 세월에 홍색이 이미 바랜 것을 보니 서글피 노쇠했다는 생각이 드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평생 가슴속에 새기기를 기대하노라." 위는 보물 제1683-2호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국립민속박물관)》 서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 유배되고 7년 뒤 남편이 돌아올 기미조차 없던 1806년 부인 홍 씨가 특별한 선물을 유배지로 보냅니다. 바로 홍 씨가 혼인할 때 입고 왔던 붉은빛 비단치마지요. 그러나 이 다홍치마는 이미 누렇게 바래 있었습니다. 선비였던 정약용은 이 애틋한 선물을 받고 그 치마폭을 잘라 부인이 아닌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담아 편지를 써 보냅니다. 그리고 남은 짜투리 옷감으로는 딸에게는 매화와 새를 그린 그림 ‘“매회병제도”(梅花倂題圖)’를 그려 보냈습니다. 흰꽃이 핀 매화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한 곳을 바라보는 이 그림은 딸이 다복한 가정을 꾸미라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내년 3월까지 열리는 “하피첩의 귀향”을 보러 실학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인터넷신문은 취재기자 3명을 포함해 취재ㆍ편집기자 5명 이상을 고용하도록 한 신문법 시행령 조항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27일 일부 인터넷신문사들이 ‘신문법 시행령 제2조 1항 1호’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낸 헌법소원 심판에서 재판관 7 대 2 의견으로 위헌 결정(2015헌마1206)했다. 해당 조항은 인터넷신문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기자 5명 이상을 상시로 고용하도록 규정하고 고용 여부를 증명을 위해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등의 가입 확인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헌재는 “급변하는 인터넷 환경과 기술 발전, 매체의 다양화 및 신규 또는 대안 매체의 수요 등을 감안하면 취재 및 편집 인력을 상시 일정 인원 이상 고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인터넷신문의 언론으로서의 신뢰성을 제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어렵다. 또 인터넷신문은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확장하는 유력한 수단이므로 이에 대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할 필요가 있고, 거짓 보도나 부실한 보도를 한 인터넷신문은 결국 독자로부터 외면 받아 퇴출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신문으로서 등록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진주박물관에는 보물 제311호 《노인 금계일기(魯認 錦溪日記)》가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조 학자 금계 노인(錦溪 魯認, 1566∼1623)이 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망해 북경을 거쳐 귀국하게 된 경위를 쓴 일기문입니다. 선조 32년(1599) 2월 22일부터 같은 해 6월 27일까지 약 4달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지요. 이 일기는 책의 앞뒤가 없어지고 글씨도 많이 훼손되어 읽기가 매우 힘들어 대체적인 정황만 알 수 있는데 그가 죽은 뒤 200여년이 지나 그의 7대 후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노인의 시문집인 《금계집(錦溪集)》 속에 이 사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기는 또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학자들과 만나서 그들의 질문에 따라 한국의 교육, 과거, 재정, 군사, 문화, 풍속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 것이 일기에 쓰여 있어 시대상황과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중국에 표류했다가 살아온 기록으로는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1488년)》이 있으며, 일본에 포로로 갔다가 살아온 기록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개 사족(士族)이 서인(庶人)과 다른 점은 종의 소유에 있습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로서 종이 많은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나마 하루아침에 도망해 흩어져서 사라져버리면 사족이 그 집안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 《성종실록》 14년(1483) 12월 18일 “우리나라 노비에 관한 법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사대부는 이들에 의존하여 살아왔습니다. 대개 농토는 사람의 목숨이고, 노비는 선비의 수족이니, 그 중요성이 서로 같아서 어느 한쪽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 《세조실록》 14년(1468) 6월 18일 위처럼 조선시대 양반들은 종과 말이 없으면 행세를 하지 못했습니다. 양반이 나들이를 할 때 종과 말이 없으면 남에게 빌려오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조선 후기 이덕무(1741 ∼ 1793)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를 빌리는 것조차 힘겨워 했지요. 그는 말합니다. “남의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것은 단지 예닐곱 차례뿐이고, 그 외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의 하인이나 말을 빌리면 그들이 굶주리거나 피곤할 것을 염려하여 마음이 매우 불편해지 차라리 걸어 다니는 것이 편했다." - 《청장관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