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은들 좋은 음식이 될 수 없다. 설혹 시골에 사는 사람이 고기를 쉽게 먹을 수 없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 가장은 모름지기 장 담그기에 신경을 쓰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1766년(영조 42) 유중림이 쓴 농업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우리 겨레는 장을 소중히 했습니다. 1809년(순조 9)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장 담글 때 얼마나 조심하고 정성을 기울이는지 알게 하는 다음 구절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 냉수로 정성껏 씻되 물기가 남으면 벌레가 나기 쉬우니 조심하라. 담근 지 삼칠일(21일) 안에는 상가나 애를 낳은 집에는 가지 말고, 생리 중에 있는 여자나 잡인을 가까이 오지 말게 해야 한다.” 또 “장맛 보고 딸 준다.”, “한 고을의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한 집안의 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속담이 있고, “장맛이 좋아야 집안에 불길한 일이 없다.”라고 믿을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장처럼 느린 음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6년 실학박물관(관장 장덕호)에서는 “하피첩의 귀향”을 주제로 특별전을 연다. 전시 일정은 10.17(월)부터 2017년 3월 26(일)까지며 관련 유물 20점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대표유물은 보물 1683-2호 하피첩(霞帔帖)과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이다. 다산 정약용은 만 14살이던 1776년 한 살 연상의 풍산홍씨(1761~1838)와 혼인한다. 그러나 1801년 신유사옥으로 다산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 가면서 부부간의 생이별은 시작된다. 생이별한 지 일곱 해 째, 남편이 살아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1806년 부인 홍씨는 특별한 선물을 귀양지로 보낸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빛 비단치마였다. 혼인한 지 30년, 다홍치마는 이미 누렇게 바래 있었다. ▶ 하피첩(霞帔帖) 1810년(순조 10), 필사본, 24.8×15.6,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807년 봄, 홍씨 부인은 유배 생활중인 남편 다산선생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비단치마를 보냈다. 다산 선생은 그 오래된 비단 치마를 말라서 1807년부터 1809년까지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적어 보내면서, 이것을 《하피첩》이라 이름 지었다. 《하피첩》은 원래 4첩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363호 “삼척 궁촌리 음나무”가 있습니다. 음나무는 보통 엄나무라고 불리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ㆍ중국ㆍ만주ㆍ우수리 같은 곳에서 자랍니다. 어린잎을 “개두릅”이라고도 표현하며 삶아서 나물로 먹기도 합니다. 또 가시가 있는 가지는 악귀를 물리치는데 썼습니다. 옛날에는 이 나무로 6각형의 노리개를 만들어 어린아이에게 채워 줌으로써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음’이라고 하여 음나무로 불렸다고 하지요. 이 궁촌리 음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이며 높이 18m, 둘레 5.43m의 크고 오래된 나무입니다. 나무 둘레에는 돌담을 쌓아 보호하고 있는데, 담 안에 고욤나무와 뽕나무가 있고, 담 밖에는 큰고욤나무, 향나무,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특히 음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나무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이 나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지요. 이 음나무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과 단오에 마을의 평안을 비손하는 제사를 지내며, 단오 때는 그네뛰기, 널뛰기, 풍물굿 따위로 잔치를 벌입니다. 이 음나무는 오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영의정 홍언필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였습니다. 하인들이 "물렀거라! 영의정 대감 행차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홍언필이 손사래를 치면서 "조용히 하거라."고 말합니다. 높은 벼슬아치가 초헌(조선시대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탄 수레로 외바퀴이며, 지붕은 없다)이나 보교(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이 탄 가마로 사면으로 휘장을 둘렀고, 지붕이 있다)를 타고 행차할 때는 으레 종들이 "썩 물렀거라." 같은 "벽제소리"를 외치는 것인데 홍언필은 이를 못하게 한 것입니다. 홍언필(1476 ~ 154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대사헌을 6번이나 지냈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던 명신입니다. 이렇게 홍언필은 영의정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늘 겸손하고 조심하며, 처세에 허물이 없도록 조심을 다했습니다. 이런 홍언필을 두고 소심한 사람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런 것이 공직자의 표본이 아닐까요? 이 홍언필에 환갑잔치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영의정에 올랐고, 그의 아들들도 판서에 오른 자랑스러운 집안이어서 집안사람들은 크게 잔치를 치릅니다. 광대를 불러 곱사춤을 추게 하고, 기생을 불러 노래를 시키는 등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번에 (주)한국콜마홀딩스의 윤동한(尹東漢) 회장은 올해 초 일본에 있던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1점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영훈)에 기증했다. 수월관음도는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거처와 형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 도상은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달빛이 비치는 연못가 금강보석(바위)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찾아뵙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현재 전 세계에는 160여 점의 고려불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수월관음도는 화려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인해 고려불화의 백미로 꼽힌다. 수월관음도는 나라안팎을 통틀어 대략 46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는 5점이 소장되어 있다. 리움미술관(2점),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우학문화재단,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대부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윤동한 회장의 구입과 기증에 따라 국내에 있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모두 6점이 되었으며, 국립박물관 소장품으로는 최초이다. 이번에 기증된 수월관음도 역시 고려 수월관음도의 전형적 도상을 따르고 있다. 미소를 띤 관음보살은 신광과 두광으로 둘러싸여 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6년 11월 25-26일 ‘지속가능건축과 한옥과 온돌’이라는 주제로 국제온돌학회 창립 15주년 기념 제15차 국제온돌학회 학술대회가 전북대학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이 학술대회는 국제온돌학회, 전북대학교, (사)한국현대한옥학회,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 북경시 역사건축보호기술연구중심, 대한건축학회연합회가 공동주최하고 북경공업대학 도시주거환경설계연구소, 전북대학교 건축학부가 주관하며, 국토교통부, 국가건축위원회, 대한건축사협회, 전주대학교, 우석대학교, 흑룡강신문사, 늘푸른재단, (사)구들기술인협회, 북경공업대학교한국총동문회, 재중과기협, 진천국악인협회. (사)한국전통기술인협회 후원한다. 25일 이른 11시부터 열리는 학술대회는 먼저 일본 아세아경제문화연구소장 유경재 박사의 “온돌민속학의 정립과 한옥과 온돌문화의 세계화 국제화”와 중국 중앙민족대학 황요우푸 교수의 “한민족의 기원과 온돌문화”의 주제강연이 있게 된다. 이어서 연세대학교 실내건축과 이현수 교수의 “전통의 다양한 차원을 통한 한옥현대화”,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건축예술학부 윤희상 교수(전통건축연구소 소장)의 “지속가능한 연변지방 전통한옥의 설계 및 시공사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순백색의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구운 자기를 백자(白磁)라고 합니다. 이 백자는 고려시대에도 빚기는 했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 선비들의 생각과 잘 맞아 떨어지기에 조선에서 성행했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꼽힙니다. 그리고 백자는 도자기 겉면에 어떤 물감을 써서 무늬를 그렸나에 따라 순백자(純白瓷), 청화백자(靑花白瓷), 철화백자(鐵繪白瓷), 진사백자(辰砂白瓷)로 나뉩니다. 먼저 순백자는 백자 도자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그려지지 않은 그야말로 백자입니다. 순도 높은 순백의 바탕흙과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잿물을 발라 높은 온도에서 구운 백자로 그 대표적인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 1437호 ‘달항아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청화백자는 도자기에 무늬를 그릴 때 푸른빛의 코발트 물감을 써서 그림을 그린 백자를 청화백자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청화백자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1058호 ‘백자 청화칠보난초문병’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철화백자는 산화철로 무늬를 그려 흑갈색이 되는 것을 말하지요. 철화백자는 이른 시기부터 빚었는데 귀한 청화백자에 견주어 일반 백성이 즐겨 썼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해학적인 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秋風惟苦吟 가을바람 쓸쓸하고 애처로운데 擧世少知音 세상에는 알아줄 이 별반 없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에 밤은 깊고 비는 오는데 燈前萬里心 등잔불만 고요히 비추어 주네 위는 신라시대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한시 “비오는 가을밤에[秋夜雨中]”입니다. 6두품 집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라에서는 아무리 뛰어나도 6두품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868년 열두 살의 나이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요. 드디어 최치원은 빈공과 장원으로 합격했습니다. 이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황소를 격퇴해 황제로부터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 자금어대를 받음으로써 그의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그 뒤 17년 동안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고국 신라로 돌아오지요. 그리고 신라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중앙 귀족들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운둔을 하게 됩니다. 최치원은 이후 경주의 남산, 강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신문에 난 광고입니다. ‘Frontier IFEZ’라고 크게 쓰고는 그 위에 ‘global business’라고 토를 달아 놓았습니다. 무슨 국제업무인 것으로 보이는데 더욱 ‘IFEZ’는 오리무중입니다. 무슨 광고인지 아시는 분 있나요? 한국신문에 난 광고라면 분명 한글로 해야 하고 외국인을 위한 광고라면 굳이 한국신문에 낼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한글날이 며칠 전이었는데 이렇게 영어만을 쓴 광고를 내는 것이 사대주의 아니면 무엇일까요?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함께 참석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곤룡포와 면류관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위는 《고종실록》 34년(1897) 10월 12일 내용입니다. 1897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 임금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 사용하기)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9월에는 환구단(圜丘壇,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제단)을 세웠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세워졌습니다. 고종은 환호하는 백성들 사이로 경운궁(덕수궁)에서 원구단으로 갑니다. 그리고 원구단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지낸 뒤 황제 즉위식을 갖고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