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04년 3월 12일, 문경시 산양면 연소리에 있는 한 무덤을 이장하던 중 키 150㎝ 정도의 미라와 함께 복식 그리고 관련 유물 74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옷의 주인은 16세기 말엽 인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출토된 유물은 수의로 입었던 단령(團領-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 1점, 단령대 1점, 장옷 5점, 당저고리 2점, 장저고리 1점, 단저고리 6점, 적삼 4점, 치마 7점, 바지 5점, 소모자 1점, 버선 3점과 기타 주검 염습할 때 쓰는 도구 등 모두 74점이 출토되었지요. 출토복식 가운데 수의단령(壽衣團領)은 평산신씨가 수의로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성이 수의로 단령을 입는 경우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때의 출토복식에서 보인다고 하지요. 이 단령은 공단으로 된 전체적으로 쪽빛이 남아 있는 홑단령입니다. 뒷길이 131cm, 앞길이 126cm로 뒤보다 앞이 짧습니다. 뒤품은 90cm로 매우 넓고 뒷길에는 어깨에서 41cm 내려온 지점에 좌우에 단추 1쌍씩을 부착하여 서로 짝을 끼우면 뒷길에 주름이 생겨 품 조절이 가능하도록 되어 자연스럽게 주름이 생기지요. 또 당저고리 2점은 여러 부분을 금선단(金線緞, 금실로 무늬를 넣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김 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중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이 시는 이윤옥 시인이 쓴 김락(金洛, 1863~1929)지사에게 드리는 “독립운동가 3대 지켜 낸 어머니 김락”이라는 시 가운데 일부입니다. 김락 지사님! 저는 몇 해 전 안동에 있는 지사님 무덤을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지사님의 무덤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지사님의 친정집에서 김대락 지사님의 후손 김시중 어르신을 만나 겨우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덤을 찾아 가는 길은 변변한 표지판도 없어 풀숲을 헤치고 쓰러진 소나무 등걸을 치우며 간신히 찾을 수 있었지요. 당시 시아버님을 다룬 《향산 이만도》 책에는 김락 지사님 부부 무덤을 향산 이만도 시아버님과 아들의 무덤이 있는 봉화군 바드실 마을로 옮길 예정이라고 나와 다행이라고 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름 높다는 사람들이 ‘우리말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말이며……’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한다. 우리말이든 남의 말이든 말은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이고 어느 것이 덜 과학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자연과 문화가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를 뿐이다.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한테서조차 ‘우리말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신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을……’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위는 김수업 교수님의 연재글 <우리말은 서럽다> 가운데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한글’과 ‘우리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름 높다는 사람들이 말과 글 곧 한글과 우리말을 자꾸 헷갈려 쓰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한글’은 글자 이름이고, ‘우리말’은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서울 광화문 한글 행사장에 갔더니 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예쁜 한글 이름 써주기> 마당이 그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글로 썼다고 한글이름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럼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한글로 썼으니 한글이름인가요? 이 “셰익스피어”는 한글이름이 아니라 영어이름을 한글로 쓴 것일 뿐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국민은행과 기업은행은 한자이름을 한글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훈민정음 창제 제570돌이다. 어제부터 서울 광화문광장, 북측광장, 세종로공원에서는 “온 세상, 한글로 비추다.”란 이름으로 온갖 기념행사가 벌어졌다. 먼저 세종대왕상 주무대에서는 어제 열린 ’한글문화큰잔치의 밤‘을 비롯하여 ’창작무 – 움으로 그리는 한글‘, ’온 세상 한글로 비추는 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또 세종대왕 동상 옆에서는 한글문화연대 주최로 “570돌 한글날 시민 꽃 바치기‘가 열리고, 광화문광장에서는 한글로 가훈 써주기가 외국인들도 몰리면서 성황이었다. 광화문광장과 북측광장 사이에는 ”한글 상상“전이 열리고 있으며, 세종로공원에서는 ’한글 백일장‘이 부측광장에서는 ’두두리와 사진 찍고 한글쿠키 먹자‘는 이벤트가 벌어지고, 북측광장에서는 청농 문관효 주관의 ’한글문화큰잔치 문화예술행사, 힌글로 세계로‘, 국어문화운동본부 주최의 ’한글을 지키고 가꾼 28인 그림전‘(김슬옹ㆍ김응 글, 아무성 그림)도 열리고 있다. 이 ’한글을 지키고 가꾼 28인 그림전‘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정인지 등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에 참여한 8인, 《훈민정음 언해본》을 간행한 세조, 《훈민정음 해례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말뜻 그대로 찬이슬이 맺힌다는 24절기 열일곱째인 한로(寒露)이며, 모레는 우리 겨레가 명절로 지내왔던 중양절(重陽節, 重九)입니다. 한로와 중양절 무렵에는 국화전(菊花煎)을 지지고 국화술을 담가 먹었는데 국화술은 그 향기가 매우 좋아 많은 사람이 즐겼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에 노란 국화를 띄워 마셨지요. 또 이무렵에는 추어탕(鰍魚湯)을 즐겨 먹었습니다. '미꾸라지 추(鰍)' 자를 보면 '가을 추(秋)' 자 앞에 '고기 어(魚)' 자를 붙인 것으로 보아 미꾸라지가 가을이 제철인 물고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초강목》에는 미꾸라지가 양기를 돋우는 데 좋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 또는 중구일(重九日)이라 했는데 여기서 중양이란 음양사상에 따라 양수(홀수)가 겹쳤다는 뜻이며, 중구란 숫자 '9'가 겹쳤다는 뜻으로 양수가 겹친 날인 설날ㆍ삼짇날ㆍ단오ㆍ칠석과 함께 명절로 지냈습니다. 신라 때에는 중양절에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시를 짓고 품평을 하는 일종의 백일장을 열었습니다. 또 중양절에는 붉은 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임금)이 일본국 대상(大相)에게 토산물을 내려 주었다. 그가 보내 온 사람에게 주어 보냈으니, 은준(銀樽) 1개, 도금은규화배(鍍金銀葵花杯) 1개, 은탕관(銀湯罐) 1개, 흑사피화(黑斜皮靴) 1개, 죽모자(竹帽子) 10개, 저포(紵布)ㆍ마포(麻布) 각각 15필, 인삼(人蔘) 50근, 호피(虎皮)ㆍ표피(豹皮) 각각 3장, 잡채화석(雜彩花席) 12장, 만화방석(滿花方席)ㆍ만화침석(滿花寢席) 각각 5장 이었다.” 이는 《태종실록》 2년(1402년) 6월 6일치 기사입니다. 이처럼 우리 겨레는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방석을 만들어 썼으며 중국이나 일본에 방석 선물을 했다는 기록이 무척 많습니다. 그런 전통을 이어 받은 방석 가운데 한국자수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봉황무늬 자수방석’ 3점이 이번에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되었습니다. ‘봉황무늬 자수방석’은 궁중 수방나인이 만든 최고 수준의 자수유물로 공예사적인 큰 의미를 지녔다는 평입니다. 특히 3점 가운데 1점은 한글로 “상궁청신녀 임인생 리씨정희행 생전병소원 사후왕생 극락발원”이란 글씨가 수놓아져 있어 만든 이와 만든 때, 만든 목적을 짐작해볼 수 있어 가치가 큰 보물입니다. 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새롭게 영토로 편입된 지역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녔는데 이를 기려 이곳이 자국의 영토임을 드러내는 비석을 세웁니다. 이 때 세운 비석들이 모두 4기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ㆍ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ㆍ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ㆍ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따위입니다. 그 가운데 해발 556m의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어느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심지어는 무학대사 또는 도선국사의 비라고 잘못 전해 내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을 새롭게 확인하고 밝혀낸 이는 바로 추사 김정희입니다. 조선의 대학자 김정희는 순조 16년(1816) 7월 무더위 속을 뚫고 북한산에 올라 그곳에 있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 탁본했습니다. 그 뒤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비문을 판독한 다음 그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뒷날 김정희는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황초령비와 북한산 순수비의 비문을 치밀하게 고증한 논문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병자년 가을에 내가 벗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 가면 경상북도 기념물 제29호 “신동입석(新洞立石)”이 있습니다. 입석은 다른 말로 선돌이라고 부르는데, 이 선돌은 높이 4.5m, 밑둘레 2m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 선돌의 동쪽 주변 땅을 일굴 때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돌도끼 따위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낙동강을 끼고 구릉지에 모여 살던 선사인들이 남긴 유물로 조상신을 숭배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이지요. 따라서 이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입니다. 다만 선돌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처음 세울 때 새겨진 것아 아니라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새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 이 선돌은 중간을 이어 붙인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와중에 포탄을 맞고 부러졌었고, 이를 뒷날 다시 이어 붙였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마을에 살던 오부자가 스님의 시주 요청에 망신만 주었는데 스님이 명당의 근거가 된 선돌을 두 동강 내 오부자가 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부대언(右副代言, 승정원 종3품 벼슬) 원숙(元肅)을 보내어 성균관(成均館)에 궁온(宮, 궁중술)을 주었다. 생도(生徒)들이 두 의정(議政,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이하 여러 관각 제학(館閣提學, 홍문관ㆍ예문관ㆍ규장각의 종2품 벼슬)에게 율시(律詩)로 시험을 보기 때문이었다. 술이 1백 병인데, 어육(魚肉)을 갖추었다.” 위는 《태종실록》 태종 17년 9월 9일 “원숙을 보내어 성균관에 궁온(임금이 내리는 술)을 주다”라는 제목의 기록입니다. 조선 임금들 대부분은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특히 공부를 하는 유생들에겐 공부를 격려하는 뜻으로 술과 고기를 내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태종은 이듬해 8월 술 50 병과 말린 노루, 사슴고기를 성균관에 내려 주었는데 이때 태종은 유생들에게 흥겹게 놀라고 당부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조선시대 임금들은 과거시험 급제자에게 어사화와 함께 술과 과일을 내려주는 게 관례였고, 당상관(정3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들 가운데 70살 이상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줬습니다. 그리고 궁궐에서 당직을 하는 벼슬아치나 군사,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 빙고에 채울 얼음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집근처를 오가며 해금 교습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호기심 반 취미 반으로 등록하여 배우던 중 지난 4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국악영재교육원에 신청, 합격하여 해금이라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서울 도림초등학교 5학년 이호연 어린이는 국악경연대회서 대상을 받았다. 지난 10월 1일 인천 부평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인천광역시 부평구(구청장 홍미영) 주최, (사)서도창배뱅이연구보존회(회장 박준영) 주관으로 제16회 부평・전국국악경연대회가 열렸다. 모두 19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이날 수상자는 명인부 종합대상(국회의장상)에 김남순 씨, 명인부 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에는 무용의 강예지 씨가 뽑혔고, 학생 초등부 대상(인천광역시 교육감상)은 도림초등학교 5학년 이호연 학생이 차지했다. 이날 눈길을 끈 이호연 양은 아버지 이성열 씨에 따르면 어려서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켜보았지만 가녀린 음색의 해금 연주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기에 집에서는 해금소녀라고 부른다고 한다. 심사위원장을 맡아 이호연 양의 연주를 면밀히 지켜본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한국전통음악학회장)는 “어린 학생인데도 활의 움직임이 활달하여 연주에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