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꾼 노은주가 90년대 중반, 한농선 명창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흥보가>를 배우며 소리와 함께 발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행히 노은주는 어려서부터 가야금과 춤을 배웠기에 발림이 예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떴다고 이야기하였다. 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던 고 한농선은 그의 부친이 유명했던 가야금 산조의 명인, 한성기다. 한 명인은 19세기 말, 산조(散調) 음악의 창시자인 김창조에게 직접 산조를 배운 뒤, 그 가락을 김창조의 손녀딸(국가문화재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를 지낸 김죽파)에게 전수한 거물급 명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별도로 이야기하겠다. 아버지 한성기 명인 밑에 한농선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은 이미 그의 음악적 인자가, 원인을 이루고 있다는, 곧 근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라면서 더욱 그 요인들을 키워왔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래서 명인 명창 앞에 젊은 소리꾼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농선 명창은 평소 조용하면서도 깔끔했던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노은주는 그의 스승, 한농선 명창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노은주에게 처음 소리를 지도해 준 강도근(1918~1996)은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등에게 배웠고, 창극단과 지방의 국악원, 특히 1973년 무렵부터 <남원국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장기는 ‘제비 후리는 대목’이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그는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는, 순수한 소리꾼으로 70살에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 노은주는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강도근 명창을 만나 <백발가>와 판소리 <흥보가> 등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은주는 “강도근 선생님 다음으로 남원국악원에 오신 젊은 전인삼 선생에게 배웠는데, 그 분은 소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지도해 주셨지요. 선생과 제자들이 일정기간 산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형태의 수련을 산(山)공부라고 표현하는 데, 젊은 선생님은 공부시간, 연습시간, 휴식시간, 잠자는 시간, 등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지도해 주셨어요. 지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네요.”라고 말한다. 강도근, 전인삼 두 분 남창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전남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목포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 그가 근무하고 있는 <판소리보존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성악연구회>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야기, 동 연구회에 참여했던 당시 인물들의 공연물이나 음반들이 이 분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소리꾼, 노은주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소리가 깊고, 공력이 들어있어 인정은 받고 있었으나, 전통과 권위가 있는 대회에서 장관상이나 총리상을 뛰어넘는 수상 경력이 없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위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차, 2024년 7월 목포에서 열렸던 제36회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에 참여했던 그는 심사위원 전원의 만점으로 대상(대통령상)을 받게 되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창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노은주 소리꾼을 명창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지도해 주고, 이끌어준 분들은 여러분이지만, 누구보다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준, 강도근 명창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국가 무형유산의 한 종목인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교육사, 이건자 명창의 <선녀와 놀량>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학력란’ 메우는 일이 곤혹스러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검정고시 새벽반에 다니며 고입(高入), 대입(大入) 후공부를 한 뒤, 대학원 석ㆍ박사 통합과정까지 수료했다는 이야기, 실기 능력과 학술적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겸손한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 20년 전부터 성북구에 개인 <국악원>을 설립하고, 강습과 강의, 공연 등을 통해 국악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노은주 명창을 소개한다. 그는 <심청가>의 이수자로 자기 소리공부를 하면서 학생들이나 애호가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단법인 한국판소리보존회>의 본부 사무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 7월, 제36회 목포에서 열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전원 만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10월에는 이를 확인하듯, 네 번째 ‘한농선의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가져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몇 차례 단국대 국악과 동문들이 펼친 음악회와 관련하여 내가 몸담고 있던 당시의 이야기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 전공을 신설하게 된 배경 이야기, 1999년도에는 서울의 한남동 교정으로 이전을 하면서 학과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 및 큰 제자들과 함께 <한국전통음악학회>를 설립하고, 국악학 학술대회의 개최, 학술지 발간,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기억에 오래 남는 활동으로는 미국의 <UCLA>와 공동으로, ‘Korean Music Symposium’을 해마다 개최해 왔으며 여름에는 중국의《연변예술대학》과 정례적인 ‘학술 및 실연(實演)교류회’를 20회 이상 치러 왔다는 이야기, 또한, 2005년도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시행되어 온 <국악분야 예술 강사의 지원사업>의 실행 등도 매우 보람 있는 활동이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대학 당국의 관심과 동료 교수 및 몇몇 졸업생들의 헌신적인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 졸업생 제자들이 진실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이웃을 섬기는 인품까지 갖추고 있다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단국대 국악과에서 1980년대 초,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 전공을 신설하게 된 배경 이야기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학 국악과의 전공과목은 기악(器樂)이 중심이었다. 이에 견줘 성악 분야는 그 뒤에 가곡(歌曲)과 판소리, 경서도창(京西道唱) 전공들이 신설되면서 해당 분야가 확대되었고, 이어 타악(打樂)이나 국악이론, 국악작곡 등도 전공 교과목으로 개설되었다. 특히, 타악 전공의 중요성은 벌써부터 인지되고 있었으나, 정작 전공분야로는 매우 늦게 선정이 된 셈이다. 서양음악의 지휘 형태와는 달리,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합주에 있어서 지휘자의 역할은 바로 장고나 북 중심인데도, 타악기가 전공분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다. 뒤늦게 타악 전공을 포함하게 된 것은 어쩌면 시대의 요청이 아닌가 한다. 현재, 각 대학에서의 세부 전공 분야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기악분야로는 피리, 대금, 해금, 거문고, 가야금 외에 소금과 단소, 아쟁, 타악(장고ㆍ꽹과리)등의 기악 분야 전공과 성악분야의 정가, 판소리, 경서도창, 그리고 국악이론과 작곡 분야가 전공 교과목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국악과가 신설되고 첫 입학생들과 함께 1984년 10월, 제1회 국악과 정기연주회를 열었을 때, 예상 밖으로 많은 관객들이 객석을 메웠고, 연주 결과와는 관계없이 분에 넘치는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는 이야기, 그러나 나와 학생들은 공개적인 발표 무대가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곳인가를 경험하게 되면서 곧바로 단국대 농장(충남 청양군 소재)에서 여름합숙 훈련(Summer Camp)을 시작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이 합숙 훈련에는 84~85학번 입학생들 70여 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새로 입학한 타악 전공자들이 밤새도록 북, 장고, 꽹과리를 치는 소리가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특히 꽹과리의 김병곤(대전시립 연정국악원), 김창석(단국대 강사), 이홍구(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전승희(대전시립 연정국악원) 등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창 전공 분야를 신설하게 된 당시의 배경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국악계 흐름은 기악(器樂) 위주여서 대학 대부분이 기악 전공자 중심으로 입시가 이어졌다. 그 배경은 당시 국악을 전공으로 하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객석에 앉아, 국악과 동문들이 준비한 연주회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그들의 열정과 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과 신설 40년, 또는 50년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대학의 동문들이 음악회를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아니다. 졸업생 스스로가 모교를 향한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동문 연주회를 지켜보는 동안, 참으로 묘한 감정과 함께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 묘한 감정은 대표 제자들로부터 격려사를 요청받을 때부터 이미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쉽게 억제가 되지 않고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40년 전,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단국대학교 국악과>와 함께 한 시간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그려지는 회상(回想)은 1983년 흰 눈이 내리던 초겨울의 인상이다. 학교로부터 부름을 받고, 천안 교정을 들어섰을 때, 낯설고 어리둥절해하던 나에게 교직원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와 친절한 안내는 나를 너무도 편안하게 해주었던 기억이 오래 남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단국대 국악과 창설 40돌 기림 동문연주회 관련 이야기로 악곡 선정에서부터 연습과정, 출연자들의 열의, 등등이 충실한 편이어서 음악회가 알차고, 수준이 높았다고 이야기하였다. 여러 종목이 선을 보였지마는, 특별히 김계희 동문이 생황(笙簧) 협연자로 나선 협주곡, <저 하늘 너머에>라는 작품은 생황 특유의 아름다운 음색도 음색이려니와 협연자의 자신감 넘치는 연주 태도, 그리고 독주악기와 관현악의 신비로운 대화, 등에서 관객은 압도당한 분위기였다. 생황협연곡과 함께 이원희 동문이 연주해 준 퉁소(洞簫) 협주곡 <풍전산곡>이나 박정숙 동문이 출연한 해금협주곡도 다양한 음색과 기교로 객석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추임새를 쏟아낸 순서는 단연 <민요연곡>과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이었다. 민요연곡은 남도민요와 경기민요를 교차로 불러나가는 형식이어서 자칫하면 다른 음악적 분위기가 충돌하여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의 연습과정으로 이를 무난하게 풀어낸 점도 이채로웠다. 흔히 보면, 한 무대에서 음 체계가 다르고, 표현법이 같지 않은 두 부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 700회를 맞으며 단국대 국악과 창설 40돌을 기려 동문들이 마련한 음악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다. 이 행사는 단국대 국악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100여 명의 연주 팀이 참여하였으며 졸업 30년이 넘어 40년이 다 되어가는 환갑의 나이가 된 동문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무대에 올린 음악회였다는 점, 공연 내용도 개인의 독주나 소규모 합주곡 위주가 아니라, 대규모 관현악과 협연곡 위주의 7곡을 발표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당일 연주된 7곡 모두는 협연자들과 관현악단과의 어울림이 무난하여 그동안의 연습과정을 충분히 들어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선곡(選曲) 과정에서 퉁소협주곡, <풍전산곡>이라든가, 생황(笙簧)협주곡, <저 하늘 너머에>와 같은 곡들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품들이어서 객석의 반응이 집중되었던 순서였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먼저, 틍소협주곡 <풍전산곡-(風傳山曲)>과 관련된 소감이다. 이 곡은 바람이 전해 준 ‘산의 노래’라는 뜻으로 작곡자(계성원)은“산세가 험준하고 고원지대에 있는 함경도 지역의 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