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소원화개첩 (小苑花開帖)은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의 글씨로, 말아서 둘 수 있게 만든 형태이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하였으나 특히 글씨에 능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권 다툼에 말려들어 젊은 나이에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죽은 뒤에는 그의 글씨가 불태워져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문이나 글씨교본 그리고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에서 뿐이다. 〈소원화개첩〉은 가로 16.5㎝, 세로 26.5㎝로 비단 위에 행서체로 쓰여진 것으로 모두 56자가 들어 있다. 글 끝에 낙관과 도장이 구비되어 있다. 원래의 시는 당나라 시인인 이상은이 쓴 것이나 원문과 다른 곳이 몇 군데 있다. 비록 소품이나 행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조맹부체의 영향을 받았으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웅장하고 활달한 그의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전형적인 그의 서풍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어 안평대군의 진본임이 확실한, 국내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유일한 작품으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소원화개첩〉은 2001년에 도둑 맞았다 자료 :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옹기장 배요섭 씨(중랑구 신내동 거주)는 잿물 없이 구워낸 푸레토기를 제작하고 있다. 푸레토기는 흙으로 빚어낸 그릇에 아무런 유약(잿물)을 입히지 않고 장작가마에 구워낸 전통 옹기를 말한다. ▲ 옹기를 재현하는 배요섭 장인 한미요 배씨 토가의 배요섭 씨(1926년생)는 4대째 이어오는 옹기 장인이다. 배요섭 씨의 고조부도 많은 옹기장인들이 그러하듯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 속에서 생업으로 옹기 굽기를 시작했다. 배요섭 씨는 논 서마지기 물려받는 것보다 낫다는 할머니의 권유로 옹기장이의 길로 들어섰다. ▲ 배요섭 장인 그의 둘째 아들 배연식 씨와 함께 우리 도자기사에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푸레토기를 재현시켰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서울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문의: 서울특별시중랑구문화체육과02-2094-1822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와를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번와와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의 기와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기록에 의하면 와박사(瓦博士)라는 장인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기와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에 와서(瓦署)를 설치하여 기와를 생산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6년(1406)에는 별와요(別瓦窯)'에서 기와를 보급하도록 하였다. 별와요에는 와장을 비롯하여 승려도 배치하여 대대적으로 기와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 홍두깨흙 놓기 (이근복 번화장) 와공의 명칭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기와를 만드는 제와(製瓦)기술자로 와공(瓦工) 또는 와장(瓦匠)이라고 하며, 벽돌 만드는 장인이 기와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와벽장(瓦壁匠)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기와를 올리는 장인은 개장(蓋匠)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와장인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라고 하고 기와 덮는 일을 번와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 이하 문체부)는 1월 30일,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28조의 규정에 따라 중앙대학교 문화예술교육원 등 전국의 12개 기관을 2급 문화예술교육사 교육기관으로 지정한다. 문체부는 2013년 2월 1일, 2년의 기간을 정하여 13개 기관을 2급 문화예술 교육사 교육기관으로 지정한 바 있으며, 이번 지정은 기존의 교육기관 지정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재지정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사는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27조의2에 따라 소정의 자격을 취득한 후,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기획진행분석평가 및 교수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 인력으로서, 문화예술교육사 제도는 우리나라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2012년에 도입된 자격제도다. 문화예술교육사 교육기관은, 문화예술교육사 자격 취득을 희망하는 사람이 자격 취득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일정 요건을 갖추고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28조에 따라 지정, 운영되고 있다. 이번 교육기관 재지정은 2014년 12월에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시행령」이 개정됨에 따라, 2016년 3월 1일부터 2급 문화예술교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서울시가 45년 간 우리와 영욕을 같이해 왔지만 이제 노후 되어 수명을 다한 서울역고가 총 938m를 차량길에서 사람길로 재생하고, 서울역광장, 북부역세권 등으로 통하는 17개의 보행로로 연결한다. 서울역고가는 06년 정밀안전진단 안전성 평가에서 D급을 받은 시설로, 산업화 시대 유산으로서의 역사적 가치, 통일 후 유라시아 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라는 미래 가치를 고려해 전면 철거하기보단 쉬고 거닐 수 있는 공간으로 재생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나가고자 한다고 시는 밝혔다. 재생계획의 큰 구상은 서울역고가와 하루 39만 명, 75개 버스 노선이 오가는 서울의 관문이자 국제적 관문인 서울역을 중심으로 낙후된 서부역 주변과, 4대문 안 도심을 연계하고 아우르는 것. ▲ 역사속으로 사라진 아현고가도로 (자료사진) 시는 이러한 청사진의 통합재생을 통해 고립된 서울역을 사람이 거닐고 모이고 머무는 가운데 유동인구가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소통의 가교로 부활시키고, 단절됐던 동서의 지역, 통행, 문화를 연결‧통합함으로써 쇠퇴한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성화 모델을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17개 보행로가 신설되면 외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서울 구파발에서 가까운 진관사는 도심 속에서 느껴보는 심심산골의 절집 같은 느낌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북한지 北漢誌》에 따르면, 신라 진덕왕 때 원효대사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처음에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 그 뒤 고려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바꿔 불렀다. 진관사는 고려때부터왕이 직접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정도로 왕실의 보호가 컸으며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 진관사 소장 3.1 운동 때 태극기 이를 본받아 척불왕이던 태종도 1413년(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이덕응(51세) 초상화는 조선조말 최고의 초상화가인 석지 채용신의 필치가 담긴 1916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입상(금관조복) 1점과 좌상(유복, 평복) 2점 등 총 3점이다. ▲ 이덕응 입상 초상화(금관조복) ▲ 이덕응 좌상 초상화(평복) ▲ 이덕응 좌상 초상화(유복) 지금까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에서는 대부분 배경을 그리지 않고 있는데 입상은 황단을 배경으로 제작된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이 초상화의 인물은 1910년 3월에 대한제국 관리 출신 지방관을 대거 정리할 때 퇴관하여, 총독부 군수로는 약 3년 반가량 재직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지념장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퇴관 당시 정8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면서 총독부 군수로 이동하여 충청남도부여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다. 이덕응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인물이다. 2013.11.15 문화재 지정 자료 문화재청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잘못된 정치와 행정을 일삼던 벼슬아치를 나무라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의 투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의 전적지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전주 점령 계획을 세우고 가장 좋은 장소로 황룡을 선택했다. 총알을 막을 수 있도록 대나무를 원통모양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199497년 장성군에서 이곳에 승전기념공원을 비롯해 여러 시설물을 갖추어 놓았다. 주위 경관도 어울리게 꾸미고 있으며, 근처에 경군대장이었던 이학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의비도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서 역사와 시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 통치기반을 마련했던 곳으로도 뜻깊은 유적이다. ▲ 기념공원 기념탑 부조 정면 *전남 장성군 황룡면 내황길 50-8, 외(17필지) (신호리) ※(황룡전적지 장성 황룡 전적)으로 명칭변경 되었다.(2011.07.28 고시)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겨울철 별미가 많은 고장 포항에는 100년 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동네가 있다. 과메기가 바람결에 춤을 추는 구룡포 장안동 골목으로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히던 일제 강점기 때의 건물들이다. 일본인 집단 거류지로 요릿집과 세탁소, 치과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호황이었기에 남아있는 건물과 흔적만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구룡포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룡포 공원에 올랐다가 구룡포 해수욕장을 지나면 호미곶이다. 호미곶 광장에서 새로 생긴 새천년 기념관에 올라 상생의 손과 인사를 나누고 포항시내로 이동해 죽도시장에서 개복치에 고래 고기, 상어고기 실컷 구경한 후 싸고 맛있는 물회 한 그릇을 먹으면 속이 시원하다. 포스코 박물관과 보경사 경내, 내연산 계곡 구경도 잊지 말자. 문의전화 : 포항시청 관광진흥과 054-270-2253
[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지금처럼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 전통시장 등 물건을 손쉽게 살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물건의 유통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바로 보부상이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도맡아했었는데 당시 보부상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시대 저산 8구상무좌사 보부상이 사용했던 유품이다. 저산8구(苧産八區)란 모시가 많이 생산되던 부여 홍산 남포 비인 한산 서천 임천 정산 등의 8읍을 말하고, 상무좌사(商務左社)란 등짐장수로만 이루어진 조직을 가리킨다. 이 조직에는 최고 고문인 영위가 있고 그 다음으로 반수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 실무를 담당하는 장무원이 있었다. 상무좌사 보부상 유품으로는 이들이 사용하던 도장 4개, 보부상의 증명서인 신표 2매, 물미장(촉작대)과 패랭이가 있다. 특히 물미장(촉작대)과 패랭이는 보부상 단체의 상징이 되는 유물이다. 부여홍산유품 물미장은 등짐장수의 지게를 버티는 끝에 촉(물미)을 박은 작대기로서, 조선 태조가 하사하였다는 물미장을 본 떠 만든 후, 8각으로 용의 문양을 조각해 놓아 용장이라고도 한다 . 패랭이는 평소에 보부상이 쓰고 다니는 모자로서, 특히 매년 음력 2월에 열리던 보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