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의 명소로 가장 한옥이 잘 보존된 한옥골목이다. ▲ 남산이 보이는 골목길에서 ▲ 정다운 한옥들만으로 이루어진 골목길 담장겸 벽이 4고석으로 잘 정비되었다. ▲ 남산과 시내가 함께 잘 보인다. ▲ 골목길을 내려다 보면서... ▲ 인왕산이 보이는 한옥마을의 언덕위에서 ▲ 좁은 집에도 소나무가 자라나서 운치를 더해준다. ▲ 경사진 대지에 대문을무지개 모양으로 벽돌을 쌓은 모습. ▲ 한옥과 근대건물이 공존하는 골목 ▲ 한옥골목 안에 있는 꼭두각시 인형의 집 ▲ 한옥의 지붕들이 중첩되어 더욱 정답다. 그러나 일부는 현대식으로 고친 집이 보여 한옥지구의 보존이 어려움을 겪은 흔적이 보인다. ▲ 집안에 작은 연못이 있는 찻집정원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80년대만 해도 한옥으로만 빼곡하던 서울의 북촌일대가 80년대 후반기 이후로 급속히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조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한옥에 살자니 골목도 좁아차도 한대 들어갈 길이 없고, 공간도 좁아서 침대하나 놓기도 힘들고, 양식 가구나 식탁도 놓을 수 없어서살기 불편하다는 인식이 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다가 90년대에는 급속히 한옥이
▲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전경 ▲ 윤동주 문학관 정면 ▲ 문학관 내부 중정, 영상실로 가는 길 ▲ 영상관 내부, 암울했던 시절 하늘에서 내리는 한줄기 빛을 얼마나 그리워 했을지... ▲ 문학관 언덕 위에서 본 문학관 중정, 시인을 생각하며 차한 잔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 문학관 언덕 위에서 본 서울시내. 남산과 시내 빌딩들이 훤히 보인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대를 살면서도 꿈을 안고 살았던 시인 윤동주. 그는 광복을 불과 6달 앞두고 갔지만, 그의 시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곱디 곱게 쓴 시들은시공간을 뛰어 넘어 모든 이들을 감동케 한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사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의 현실을 내몰라라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은 그의 시 속에 빼곡히 스며있으니, 어쩌면 한 소시민적인 감정으로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함축적으로 대변한 듯 보인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에 태어나 1945년 2월에 이승을 떠났다. 불과 6개월 후에 한국이 광복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그였지만, 밤하늘의
▲ 하나, 둘 이승의 일을 마치고 본디 나온 곳으로 가는 꽃잎 ▲ 마지막 두잎 남았다. 하지만 미련은 없는 듯. ▲ 꽃잎은 다 지고, 이제 꽃술까지 진다. ▲ 지는 연꽃 곁에 늦둥이로 고개를 내민 녀석, 분발을 기대해본다. ▲ 알찬 결실로 후대를 기약하며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해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한해가 바뀌면 새로운 마음으로 1년을 맞이한다. 달력의 첫장에 가득채워진 365일... 어찌보면 너무 많아 지루한날들 같지만, 하루 하루 지나고 보면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는지... 잿빛 자연의 엄동설한 중에는 추위에 움추렸다가, 날이 풀리고아지랑이 피어나고 온갖 초목과꽃들이 피는봄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어느덧 장마도 끝이나고 삼복도 막바지다. 그런데 자연은 사람보다 더 빨리 계절을알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면 사람들은 너무 더워 추수와결실의 계절을 느끼기 어렵지만, 어느덧 자연은 가을 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연꽃밭에 연들도 이미 자신들의 갈 길을 잘 알고 있다. 봄부터 피어나던무성한 연잎들도 이미 초록의 한계를 넘어서, 서로 앞다투어아름다움을 언제 뽐냈느냐는 듯 이제 결실을 재촉한다. 제 갈길을 찾아가는연밥들이 하나 둘... 늘
▲ 광호문 광장에 노숙자 숙소같은 천막들이 들어서있다. 광장을 지키는 이순신장군 동상이 지켜보고 있다. ▲ 이순신장군이 되살아나서라도 참사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길 ... ▲ 세월호 가족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이것 뿐이라며 천막을 치고 농성한다. ▲ 참사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밝혀지기를 고대하며... ▲ 세월호 참사의 실상을 알리는 사진들. 당시 세월호 안에서 참사가 발생할 것을 전혀 예측못하고 수학여행의 들뜬 마음만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찍은 손말틀(휴대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 유가족들의 슬픔에 위로차 1일 단식에 동참 하는 이들 ▲ 지친몸 바람개비를 접으면서 쉬고 있는 유가족들 ▲ 꿈이 꿈으로 끝나버려 너무도 한스럽다. ▲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나 제대로 밝혀지길 학수고대 한다는 절규...그래야 다음에라도 비슷한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가족들... ▲ 떠났지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하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광장으로 나온 가족들.. ▲ 왜 자신들이 이승을 떠나야 했는지를 알지도 못한 채 이 이승을 등진 그들의 원통한 죽음을 바람개비만이 전하고 있다. ▲ 폭염의 계절에 광장에는 바람개비도 멈
불암산 산마루 온통 바위로 덮여있다. ▲ 불암산 산마루가 보이는 풍경 ▲ 석천암 원경 ▲ 불암산 큰 바위아래 자리한 석천암 ▲ 숲속에 포근하게 안겨있는석천암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장마답지 않은 장마가 지나갔다. 장마철이면 비가 많이 와야 하는데 올 해는 비는 안오고 무더위만 극심했다. 그러나 지구의 기상변화가 심하여 장마는 끝났지만 국지성 호우와 서태평양 적도근처에서 발생한 태풍은 올해도 여러차례 온다고 하니 부족한 강수량은 이들에게 기대보아야 할 것 같다. 만물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아무리 살기좋은 기후라 하더라도 비가 안오면 바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동식물도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만다. 산은 황량한 바위들만 드러나고, 들판은 모래벌판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아프리카의 사하라나 중국 북부지방의 타클라마칸사막이나 고비사막도 비가 안오기에 그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그 어디에도 사막화가 된 곳이 없으니, 한국이야말로 산과 들이 적당히 어우러진 축복의 땅이라 생각된다. 산지가 많다고 하지만 한국은 그 어디나 푸르름이 가득한 녹색의 국토이고,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에도 주변이 그리 높지도 않은 산으로 바
▲ 만복사지 전경 주변은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 금강역사로 사찰 입구의 수호신이다. 보통 2기가 있어야 하는데 1기만 보인다. ▲ 금강역사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인 무술시범 자세이고 얼굴은 이국적이다. ▲ 절 입구에서 절의 성격을 나타내는상징기를 달았던 당간지주다. 당간지주 사이에 깃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절의 상징기나 행사를 알리는 기를 달았다 ▲ 고려시대 5층석탑으로 이 시대 탑의 특징은 통일신라의 균형미를 잃고 탑 층수도 3층에서 5층으로 늘었다. 탑신의 하단부에는 목조건물의 난간처럼 돌출한 장식이 있어 이채롭다. ▲ 탑신부는 다 없어지고 옥개석만 몇 층 남은 석탑유구도 있다. ▲ 부서진 석탑과 석불이 모셔진 전각. 전각은 본래 모습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보호각이다. ▲ 화강석 연화대좌 위에는 불상이 안치 되었을 터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거의 어른키에 이를만큼 연화대좌가 큰 것으로 미루어 불상 크기 또한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 당간지주와 건물터, 석등의 좌대가 일직선을 이룬다. ▲ 정교한 석등의 좌대받침으로 복련을 정교하게 새겼다. 가운데 구멍은 석등의 하부가 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건물의
▲ 혼불문학관 전경 ▲ 혼불문학관 전시관모습 ▲ 혼불문학관 앞에서 해설해주는 해설사 ▲작가 최명희의 일생과 혼불의 내력에 대하여 열정에 넘치는 설명이 일품 ▲ 혼불에 대한 설명을 듣는 방문객들 ▲ 최명희 작가의 피할 수 없는 글쓰기 고백은 그것이 운명임을밝히고 있다 ▲ 생전 최명희의 집필실 ▲ 혼불에 나오는 장면을 입체로 제작한 전시물-1 ▲ 혼불에 나오는 장면을 입체로 제작한 전시물-2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50세의 짧은 생을 살면서 오직 하나의 작품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작가 최명희. 그녀는 1980년 4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무려 18년동안 길고 긴 세월을 오직 하나의 작품에 숙명처럼 몰입되었다. 그녀는자신의 몸에 이상신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한민족의 혼불에 혼을 빼앗겨,민족 수난기에 남원군 사매면 매안마을의 한양반가를 지키던 3대 며느리들과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순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복원하여자신의 '혼'마저 다 태우고 간 작가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랫동안 내려오던 전근대시대의 우리문화 속에 오롯히 살아있던 말과 글들이 영원
▲ 허가바위 암벽의 입구모습, 절벽 암반에 뚫린 자연동굴로, 바위의 부식상태가 상당히 진행중. ▲ 허가바위의 입구,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입구이나, 본래는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닥이 많이 메워진 듯 보인다. ▲ 허가바위의 내부, 나루터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중요한 터전으로약 20여평의 면적 내부에는 임시거쳐로 충분히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허가바위'를 구멍이 뚫린 바위라하여 '공암'이라고도 부른다. ▲ 한강과 인접한 곳에 공암나루터가 있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허가바위는 서울 강서구 한강변에 위치한 자연암반에 뚫린 바위굴이다. 전해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이 바위는 양천허씨의 시조인'허선문'이 출생한 곳이라고도 하며, 한민족의 의학성인인 허준선생이'동의보감'을 저술한 곳이라고도 한다. 허가바위 바로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옛부터 나루터가 있으며 그 나루터의 이름은 이곳 바위굴에서 유래하여 '공암나루'라고 부렀다.자연암반에 뚫린 구멍으로 굴 안의 넓이가 20여평에 이르는 공간이 있어 비가 오면 피하기 좋을 곳으로, 옛날에는 나루터의 뱃사공이나 승객들의 임시 숙소로도 쓰였으리
▲ 황산대첩비 전경, 왜구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기록했던 대첩비의 훼손된 원본과 다시 세운 황산대첩비가 함께 있다. ▲ 파손되어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을 다시 캐내어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역사의 흔적은 잘 지워지지 않는 법. ▲ 부서진 대첩비 원본의 보습 ▲ 세로 세운 대첩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그 안에 세로 세운 대첩비가 있다 ▲ 새로세운 대첩비각 현판과 대첩비 ▲ 새로 세운 대첩비의 모습 ▲ 대첩비를 보러온 답사객들, 국립민속박물관 문화답사팀 ▲ 한자로 쓰여진 대첩비를 한글로 다시 세운 번역본 황산대첩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면서 멀 수밖에 없는 나라인가 보다. 한국과 일본,그 인연은 참으로 기구하다. 고대 한국이 일본열도에수많은사람과문물을 전한 것은 일본의 사서들이 앞다투어 기록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는 침략과, 침탈이라는 형식으로 고대 한국을 괴롭혀 왔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사적 상처는 첫째가 고려말 왜구들의 침탈이었고; 둘째는 조선시대 중기에 발생한 임진왜란이었으며, 셋째로는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던일제강점기이다. 벌써 70년이 지난 일제
▲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전경 ▲ 가까이 본 평화의 문 ▲ 평화의 문 옆면 ▲ 물에 비친 평화의 문 ▲ 평화의 문 천장(좌 청룡) ▲ 평화의 문 천장(우 백호) ▲ 평화의 문 천장(남 주작) ▲ 평화의 문 천장(북 현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서울송파구 올림픽공원은 본래 고대 백제의 첫번째 도읍지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열 때에는 몽촌토성 이외에본격적인 발굴조사 없어, 이곳이 백제의 도읍이었는지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왈가왈부 무성한논쟁만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 올림픽이 결정되고경기장이 지어지고 공원이 조성되면서,이곳에올림픽을 역사적으로기념한 공원화가 이루어졌다.당시 서울올림픽의 목표는 세계인이 한데 모여 체육대회를 한다는 것을 넘어첨예한 이념대립을 해소한다는 세계사적인 소원이 있었고, 한국은 이를 내세워 울림픽을 열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가세계이념의화해의 장이되고 평화의상징물이 되기를 기원하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하여 한국은 그런 의미를주제로세계인을 대상으로 상징적인 작품을공모하였고 그 중에 이'평화의 문'이 당선작으로 뽑혀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평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