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꾼 노은주가 90년대 중반, 한농선 명창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흥보가>를 배우며 소리와 함께 발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행히 노은주는 어려서부터 가야금과 춤을 배웠기에 발림이 예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떴다고 이야기하였다. 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던 고 한농선은 그의 부친이 유명했던 가야금 산조의 명인, 한성기다. 한 명인은 19세기 말, 산조(散調) 음악의 창시자인 김창조에게 직접 산조를 배운 뒤, 그 가락을 김창조의 손녀딸(국가문화재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를 지낸 김죽파)에게 전수한 거물급 명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별도로 이야기하겠다. 아버지 한성기 명인 밑에 한농선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은 이미 그의 음악적 인자가, 원인을 이루고 있다는, 곧 근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라면서 더욱 그 요인들을 키워왔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래서 명인 명창 앞에 젊은 소리꾼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농선 명창은 평소 조용하면서도 깔끔했던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노은주는 그의 스승, 한농선 명창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어ㆍ거ㆍ주〉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근대 한국의 대표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1929년 작품입니다. 오세창은 화면 가운데에 물고기[魚]ㆍ수레[車]ㆍ배[舟]를 뜻하는 세 글자를 상형문자로 쓰고, 그 옆에 글자들의 뜻을 작은 글씨로 적었습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오세창의 인장 ‘수양(首陽)’, ‘위로고흥(葦老高興)’, ‘와전산방(瓦全山房)’이 찍혀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림 같고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어ㆍ거ㆍ주〉에는 사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세창, 민족의 어른이 되다 오세창은 1864년(고종1)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1879년(고종16) 역과(譯科)에 급제했고 중국어 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또 1886년(고종23)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로 근대 신문 <한성주보(漢城周報)>의 발간에 참여했고,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언론인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오세창은 1910년 국권을 강제로 빼앗겼을 때 일제가 내린 작위와 은사금을 받지 않았고, 1919년 민족 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임금은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이 잘살게 하는 정책을 펴는 사람이다. 정책의 기준을 관리들 편의에 두느냐 백성의 편에 서느냐가 관건이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의 욕구는 끝이 없고 그때마다 임금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상대방 곧 백성의 소리를 듣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려운 때도 있다. 지방관리가 부당하게 처결할 때는 백성은 누구에게, 어디에다 하소연을 전달할 수 있을까. 세종 13년에 이런 문제에 논의가 있었다. 임금이 찬성 허조에게 이르기를, "근간에 들으니, 경이 고을 사람들이 친히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마땅히 수리하기를 허락지 말라고 하여, 내게 상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 태종(太宗)께서도 기꺼이 들으시어 경자년(1420)에 이미 법을 세웠는데, 경의 말이 매우 옳으나, 자기의 억울한 바에 이르러서도 가령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이 가할까... 이에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을까."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마을 사람들과 수령에 대한 관계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노은주에게 처음 소리를 지도해 준 강도근(1918~1996)은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등에게 배웠고, 창극단과 지방의 국악원, 특히 1973년 무렵부터 <남원국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장기는 ‘제비 후리는 대목’이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그는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는, 순수한 소리꾼으로 70살에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 노은주는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강도근 명창을 만나 <백발가>와 판소리 <흥보가> 등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노은주는 “강도근 선생님 다음으로 남원국악원에 오신 젊은 전인삼 선생에게 배웠는데, 그 분은 소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지도해 주셨지요. 선생과 제자들이 일정기간 산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형태의 수련을 산(山)공부라고 표현하는 데, 젊은 선생님은 공부시간, 연습시간, 휴식시간, 잠자는 시간, 등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지도해 주셨어요. 지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네요.”라고 말한다. 강도근, 전인삼 두 분 남창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전남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목포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 그가 근무하고 있는 <판소리보존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성악연구회>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야기, 동 연구회에 참여했던 당시 인물들의 공연물이나 음반들이 이 분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소리꾼, 노은주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소리가 깊고, 공력이 들어있어 인정은 받고 있었으나, 전통과 권위가 있는 대회에서 장관상이나 총리상을 뛰어넘는 수상 경력이 없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위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차, 2024년 7월 목포에서 열렸던 제36회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에 참여했던 그는 심사위원 전원의 만점으로 대상(대통령상)을 받게 되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창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노은주 소리꾼을 명창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지도해 주고, 이끌어준 분들은 여러분이지만, 누구보다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준, 강도근 명창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불발탄이 폭발하여 눈앞에서 죽은 사람만도 10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갈가리 찢겨 나갔고, 바윗돌이 가슴을 덮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래서 사체의 행방은 잘 모른다. 강제징용자들은 질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상으로 죽었다. 터널 공사 중 나온 돌덩어리를 나르는 짐차에서 떨어지거나 터널 받침목을 제대로 설치 안 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공사장에서 죽은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을 수백 번 이상 목격했다. - 나가노 히라오카댐(長野平岡) 강제연행노동자 김창희 증언, 경북 월성 출신, 160쪽 -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조선인 수는 얼마나 될까? 그들은 어디서 어떠한 극심한 노동을 하며 삶을 마감했을까? 조선인들의 강제노역지는 일본 전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만 특히, 발전소용 댐 건설지, 비행장 건설 현장, 도로 건설지, 군수용품 공장, 탄광 등이 유력한 곳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기자는 지난 4월 8일, 조선인 강제노역을 다룬 《본토결전과 외국인 강제노동》을 쓴 곤도 이즈미(近藤 泉, 73) 씨 일행과 대담을 했다. 곤도 이즈미 씨는 나가노현 마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식위민천’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8건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세종 때 8건이다. 다른 임금은 성종이 5건으로 많다. 두 분 다 어질다고 존경받는 임금들이다. 세종은 1418년 8월 18일 즉위한다. 즉위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라는 명제를 선언한다. 즉위식에서 선언한 ‘시인발정’(施仁發政, 백성사랑은 임금 노릇의 근본)의 구체적인 시행책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온데, 이제 흉년을 만나 민생이 염려되오니, 각 군의 조세를 경창(京倉)에 전부 바치는 것을 제하고는, 곡식으로 거두어 각기 그 고을에 두었다가, 내년의 씨앗으로 예비하게 하고, 그 농사를 그르침이 더욱 심한 주ㆍ군(州郡)은 조세를 전부 면제하시기를 청하나이다. 그리고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여, 그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우리나라 남쪽 지경에 와서 배를 대고 해변의 백성들과 교역한 지 오래 되었는 바, 지금 우리는 기근으로 재물이 없어 교역하지 못한즉, 왜적이 의식을 얻을 곳이 없게 되면 반드시 도둑질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국가 무형유산의 한 종목인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교육사, 이건자 명창의 <선녀와 놀량>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학력란’ 메우는 일이 곤혹스러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검정고시 새벽반에 다니며 고입(高入), 대입(大入) 후공부를 한 뒤, 대학원 석ㆍ박사 통합과정까지 수료했다는 이야기, 실기 능력과 학술적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겸손한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 20년 전부터 성북구에 개인 <국악원>을 설립하고, 강습과 강의, 공연 등을 통해 국악보급에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노은주 명창을 소개한다. 그는 <심청가>의 이수자로 자기 소리공부를 하면서 학생들이나 애호가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단법인 한국판소리보존회>의 본부 사무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 7월, 제36회 목포에서 열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전원 만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10월에는 이를 확인하듯, 네 번째 ‘한농선의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가져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몇 차례 단국대 국악과 동문들이 펼친 음악회와 관련하여 내가 몸담고 있던 당시의 이야기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타악(打樂) 전공과 경서도 민요 전공을 신설하게 된 배경 이야기, 1999년도에는 서울의 한남동 교정으로 이전을 하면서 학과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 및 큰 제자들과 함께 <한국전통음악학회>를 설립하고, 국악학 학술대회의 개최, 학술지 발간,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기억에 오래 남는 활동으로는 미국의 <UCLA>와 공동으로, ‘Korean Music Symposium’을 해마다 개최해 왔으며 여름에는 중국의《연변예술대학》과 정례적인 ‘학술 및 실연(實演)교류회’를 20회 이상 치러 왔다는 이야기, 또한, 2005년도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시행되어 온 <국악분야 예술 강사의 지원사업>의 실행 등도 매우 보람 있는 활동이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대학 당국의 관심과 동료 교수 및 몇몇 졸업생들의 헌신적인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 졸업생 제자들이 진실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이웃을 섬기는 인품까지 갖추고 있다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임금으로 정치를 잘하였다는 평가는 우선, 생각한 것을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잘 듣는 일일 것이다. 임금은 우월적 지위에 있으므로 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또한 때로 나)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막으며 다) 의견 개진을 어렵게 하거나, 펼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세종은 간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려 했다. 때로 독단으로 처리한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자기 신념[철학]에 따른 것이어서 전체 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실록에 나타난 예를 보자. (의산군 남휘의 간통과 폭행 등의 범행을 처벌해달라는 상소문) 우사간 이반(李蟠)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인군(人君)의 아름다운 덕행이라 하옵니다. 근일에 헌부에서 의산군 남휘(南暉)의 범행한 바를 두세 번 신청(申請, 일을 알려 청구함)하였사오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사오니, 전하께서 간(諫)함을 좇고 말함을 들어주시는 미덕에 어떠할까요? (⟪세종실록⟫ 6/8/4) 이 문제는 종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