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령 대가야’가 경주와 부여, 공주, 익산에 이은 다섯 번째 고도(古都) 곧 ‘옛 서울’이 됩니다. 고령이 고도로 지정되면 주거환경과 가로경관 개선 사업, 주민참여프로그램과 주민단체 등을 위한 고도 주민활동을 지원하고 세계유산과 핵심유적 안내ㆍ홍보ㆍ교육ㆍ체험 등을 위한 세계유산 탐방거점센터 건립과 유적을 활용한 역사문화공간조성 사업 등을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대가야의 정치ㆍ문화의 중심지인 경상북도 고령은 대가야의 궁성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지산동 고분군, 왕궁의 방어성인 주산성, 수로교통 유적, 토기가마 등의 문화유산과 대가야의 건국설화 등 무형유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산이 훼손 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어 역사ㆍ학술ㆍ예술적으로 값어치가 뛰어난 곳입니다. 또한, 고분의 구조와 금동관, 토기 등 출토유물이 신라와 차별화된 지역 특성이 확인되며, ‘대가야식’, ‘고령식’으로 불리는 유물들은 독창적인 값어치를 지닙니다. 특히, 대가야의 도읍지였음을 보여주는 도성의 골격체계가 잘 남아 있고, 역사ㆍ문화ㆍ환경 경관이 훼손 없이 보존ㆍ관리되고 있어 경관적 값어치도 뛰어나지요. 또 고도지정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1일부터 오는 9월 22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도자기, 풍류를 품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우리나라 전통 문화유산인 도자기를 전라남도의 중요한 문화자산인 정자(亭子)와 엮어 ‘조선시대 풍류(風流)’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보는 전시입니다. ‘풍류(風流)’란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또는 ‘아취(雅趣:아담한 정취 또는 취미)가 있는 것’ 또는 ‘속(俗)된 것을 버리고 고상한 유희를 하는 것’이라고들 풀이하기도 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 곧 맑은 바람과 달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즐겁게 노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려 시대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시 <적의(適意)>에서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 / 홀로 잔들어 자주 마시니 / 거문고 소리는 이미 내 귀를 거스르지 않고 / 술 또한 내 입을 거스리지 않네 / 어찌 꼭 지음(知音, 친한 벗)을 기다릴 건가 / 또한 함께 술 마실 벗 기다릴 것도 없구료 / 뜻에만 맞으면 즐겁다는 말 / 이 말을 나는 가져 보려네”라고 노래합니다. 혼자 즐기는 풍류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시나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아베 씨 내 좋은 아이디어가 있소 / 광복 두 시간 전 총독부 학무국 / 동인이 찾아간 사무실 안 침묵이 흐른다 / 아 아베 씨 좀 보소 / 그걸 만듭시다 / 시국에 공헌할 작가 단을 꾸리자구요 / 아베, 머리 절레절레 흔든 뜻은 / 이런 쓰레기 같은 조선놈 /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부하기에 바쁜 조선놈 / 어서 꺼졌으면 싶었겠지 / 그리고 두 시간 뒤 조선은 빛을 찾았다.” (뒤 줄임) 이는 이윤옥 시인의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에 나오는 ‘김동인’ 시의 일부입니다.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은 총독부에 빌붙어 광복 2시간 전까지 아첨했는데 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김동인은 1942년 1월 23일 <매일신보>의 “감격과 전장”이라는 글에서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이제는 내선일체도 문제가 안 되었다. 지금은 다만 일본시민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를 함께할 백성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 그의 아들이 낸 ‘아버지 김동인의 소설 한 부분만 가지고 친일행위로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소송에서 재판부는 김동인의 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의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인데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합니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조선시대에는 이때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비를 멈추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은 성안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고, 성안의 모든 샘물을 덮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안 사람은 물을 써서는 안 되며, 소변을 보아서도 안 된다고 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비를 섭섭하게 하는 모든 행위는 금지됩니다. 심지어 성교까지도 비를 섭섭하게 한다 해서 기청제 지내는 전날 밤에는 부부가 각방을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양방(陽方)인 남문(南門)을 열고 음방(陰方)인 북문은 닫으며, 이날 음(陰)인 부녀자의 시장 나들이는 절대 금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곳에는 양색(陽色)인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제주(祭主)도 붉은 옷차림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며, 입추가 지난 뒤의 더위를 남은 더위란 뜻의 잔서(殘暑)라고 하지만, 말복이 남아 있어 불볕더위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하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 아비는 한 가닥 충성심으로 오직 나라를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이조원(李肇源)의 역적 행위를 힘써 성토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비참하게 끔찍한 화를 입고 마침내 섬 속의 원혼(冤魂)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서둘러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은 본디 당면한 것으로서, 단지 듣기를, 대궐의 뜰에 북을 설치한 것은 신하가 원통한 바를 하소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길이라고 하기에, 장사를 치르자마자 예절은 돌아보지 않은 채, 서리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돈화문의 서협문(西挾門)으로 들어가, 곧바로 북이 설치된 곳에 가서 북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북을 쳤습니다.“ 이는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8월 4일 기록으로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대궐의 북을 친 서유규를 귀양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대궐의 북을 친 것인데 억울함을 살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마구 궐문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귀양 보내고 이를 왕조실록에 장황하게 기록하여 둔 것은 뭔가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규정에 너무 치우친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野祭, 길가나 들에서 지내는 제사)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祟, 재앙이나 병 따위 불행이 생기는 원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佛像)을 맞아들여, 향화(香花)와 다식(茶食)을 앞에 벌려 놓고는 노래와 춤과 범패(梵唄)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오니, 수령들이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正長)ㆍ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위는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년) 8월 2일 기록으로 사헌부가 백성들이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무당이 하는 굿 그리고 불공을 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임금께 아뢰는 내용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했지만,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나라의 근본이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기 시작했으며, 그 바람에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는 신도 또한 한 번 가서 보았는데, 그 둑을 쌓은 곳이 길이가 7천1백 96척(1척≒ 30.3cm, 약 2.18km)이고 넓이가 50척(약 15m)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둑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 30리로 약 11.79km)이나 되고, 뚝 아래의 묵은 땅이 광활하기가 제(堤, 방둑)의 3배나 됩니다. 지금 농사일이 한창이어서 두루 볼 수 없으니,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상하의 형세를 살펴 다시 아뢰겠습니다.” 위는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8월 1일 치 기록으로 전라도 관찰사 박습이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에 관해 아뢰는 내용으로 이에 태종은 장흥(長興)ㆍ고흥(高興)ㆍ광양(光陽)의 세 성을 쌓는 것은 멈추고 먼저 벽골제(碧骨堤)를 쌓으라고 합니다. 문화유산청에서 사적으로 지정한 김제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 김제평야에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제방을 쌓아서 생긴 둑이라고 하지요. 제방을 쌓아 제방 위는 거대한 저수지가 되고, 제방 아래는 거대한 농토가 되게 하여 김제평야는 벼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저 악명높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을 맺습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전쟁부 장관 윌리엄 태프트 사이에 오간 식민지 경영 밀약입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러시아를 견제해달라고 하면서 대신 조선 침략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다리인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아시아 패권구도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결과, 조선은 미국의 도움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과 일본은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걸쳐 모두 네 차례의 협정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몇 번씩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밀약을 맺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는 훗날 2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가쓰라 다로(かつらたろう[桂 太郎] 1847~1913)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시기에 이르기까지 총리대신을 지냈으니 미-일의 동아시아 제국주의 동맹체제 역사는 오래 지속된 것입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 종전이 있은 1945년 뒤 제2의 가쓰라-태프트 체제는 복원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이 말은 말이 겨레의 정체성이요, 독립 번영의 연장이라는 뜻으로 110년 전인 1914년 오늘(7월 27일) 세상을 뜨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1876~1914)이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배달말(우리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르치신 주시경 선생은 우리 말글을 갈고 닦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암울한 시대에 국권을 회복하고 겨레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큰 힘이라고 믿었던 분입니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당시 유일하게 한글을 가르친 교육자로 “주보따리”란 별명처럼 커다란 책보를 끼고 동분서주했지요. 선생은 언제나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한복 속에 우리 겨레의 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가갸글, 조선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합니다. 쌀의 품질이 세 가지가 있는데 각기 쓰이는 바는 달라도 모두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근래에는 인심이 교묘하게 속이기를 잘해서 오직 더 남겨 이익 취할 것만 도모하여 모든 쌀에 모래를 섞는데, 시전(市廛)이나 마을에서 거리낌 없이 통용합니다. 비록 날마다 금하여 다스리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여 중지하지 않으므로 만약 엄하게 금지 조항을 세우지 않는다면, 징계하여 단절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7월 19일 치 기록으로 명종이 쌀에 모래를 섞어 파는 미곡상을 엄히 다스릴 필요가 있다는 사헌부의 청에 그렇게 하라고 전교한 내용입니다. 현대에는 일반미를 인기가 좋은 경기미로 포장을 바꾸는 일이나, 중국산 쌀을 국산 쌀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벌어져 미곡상이 처벌받는 일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엔 얼마나 먹거리가 부족했으면 쌀에 모래를 섞었을까요? 조선시대 대부분 가난한 백성은 가뭄과 큰비로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어 흙까지 먹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백성의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