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토론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갔다. 이 가운데 특히 필요한 문제는 좋은 해답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토론을 즐겨하시다 (성균 생원 방운 등이 회암사의 대대적인 수리와 아울러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다) 성균 생원 방운(方運)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이 그윽이 천하의 도리를 살피옵건대, 바른 것이 있고 사특한 것이 있사와, 바른 것이 오르면 우리의 도가 행하여... 이제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는 하늘의 운행이 질서 있음을 본받으시어 이(离, 주역의 괘명)를 잇고 밝음을 향하사, 몸을 다스리시되 항상 조심하시고 삼가심을 잊지 아니하심에 이르시고, 덕(德)이 비록 성하시나 더욱 토론을 즐겨하시고, 열성(列聖)의 아름다운 법을 본받으시어 만대에 길이 힘입을 것을 넓히려 생각하셨나이다. (그 결과) 노비의 수효를 감하여 관부(官府)에 적(籍)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김명식(金明植)과 김양수의 서문을 이야기하였다. 김명식은 일본의 유학 기간 중, 아시아 지역의 피압박 국가 청년들로 구성된 국제적 반일단체인 <신아 동맹단>에서 활동하다가 귀국, 국내에서는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찍 어떠한 문헌에도 기록이 없고 이미 천인생활에서 인멸된 창우를 추려내어 그들의 열전을 쓴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또한 김양수의 서문(序文)에는“ 낡은 사회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명창이나 광대라 하더라도, 사회적 지위는 지천(至賤)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인상적이라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조선창극사》에는 5인의 서문(序文)이 소개되어 있다. 그 글 속에는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 100년 전, 당시 사회의 실상이라든가, 문화예술계의 현상, 특히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예술계의 참담했던 사정들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당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창극사에 소개된 본격적인 내용은 차차 이어가기로 하겠다. 이번 주에는 고법(鼓法), 곧 소리북 치는 공부에 매우 적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궁정의 악공(樂工)과 민간의 광대(廣大)들이야말로 민족음악이란 유산을 전해 온 공로자들이라는 이야기, 사회는 광대 예술의 진가를 모르고, 또 광대는 자기의 품격을 보전하려는 자각과 수양이 부족하다는 《조선창극사》의 저자, 상곡의 이야기,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오늘을 미루어 100년 전 상황을 되돌려 보는 듯하여 더욱 안타깝다는 이야기했다. 금주에는 ‘파농(跛聾)’을 쓴 김명식(金明植)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 유학 기간에, 아시아 지역의 피압박 국가 청년들로 구성된 국제적 반일단체인 <신아 동맹단>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중, 필화(筆禍)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는데, 이때 얻은 휴유증으로 인해 평생 장애를 안고 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조선창극사》 서문(序文)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러한 현실에 있어서 음률이 파괴되고, 악사(樂士)가 자취를 감춘 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가(歌)와 시(詩)가 분리되어 시인과 가인(歌人) 간에 아무런 교통이 없게 되어 시인이 전성할 시대에 있어서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토론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갔다. 이 가운데 특히 필요한 문제는 해당 관련된 사람에게 물었다. 농민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농사법을 개량해 나갔다. 다른 임금에게서 찾을 수 없는 세종 7년의 한 예가 있다. (심한 가뭄으로 농사 사정을 알아보고자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렇게 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나가 보리라." 하고, 드디어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대언(代言, 승지)들에게 말하였다. "금년 벼농사는 모두들 ‘꽤 잘 되었다.’라고 하더니,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 본 영서역(迎曙驛) 홍제원의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 하니 지신사 곽존중(郭存中)이 대답하기를, "이들 땅은 원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창극조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1930년대에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여기에 주축이 된 김창환을 비롯한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과 같은 명창들의 약전(略傳)자료를 중심으로, 창극사를 발행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일제시대,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 요로에 전달했다고 하는 문인, 임규(林圭)의 서문을 통해 당시의 창극조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글을 통해 당시 창극조의 상황을 엿보기로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인 이광수(1892~1950)는 평안북도 정주의 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최남선 등과 함께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글은 섬세하고 속 깊은 서사 기술의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인간의 본성(本性), 그리고 욕망을 깊이 파헤치며 독자의 감정을 다양하게 불러일으키는, 곧 풍부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감정을 몰입하게 만들어 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던 《무정》은 자유연애 사상과 민족의식을 강하게 담고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이 한국 근대소설의 시발점이라는 펑가를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쇠북[金鼓]의 기원 절에서 의례나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쇠북은 원래 전장(戰場)에서 사용된 악기의 일종이었습니다. 《사기(史記)》, 《손자(孫子)》,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쇠북이 전장에서 사용된 징과 북이라고 기록고 있어, 원래는 전쟁에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쇠북이 불교에서 의식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8세기로 추정됩니다. 당대(唐代) 의정(義淨, 635~713)이 703년에 한역(漢譯)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권3 「몽견금고참회품(夢見金鼓懺悔品)」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확인됩니다. “그때 묘당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묘한 법을 친히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꿈속에서 큰 금북[金鼓]을 보았는데, 광명이 환하게 빛나기가 마치 해와 같았다. 이 광명 가운데서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보배로 된 나무 아래 수정으로 만든 평상에 앉으시어 한량없는 백천 대중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위해 법문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어떤 바라문 한 사람이 북채로 금북을 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소리 가운데서 미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정노식(鄭魯湜)이 쓴 《조선창극사》는 원래 저자가 발표했던 「조선광대의 사(史)적 발달과 그 가치」라는 글을 보완, 증보해서 1940년에 조선일보에서 펴낸 것이다. 저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시대 상황, 곧 1930년대는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고,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과 같은 명창들을 중심으로 하는 25명의 약전(略傳)을 작성한 중요한 자료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1964년 이후, 복각본이나 영인본이 나왔고, 얼마 전에는 정병헌이 교주(校註, 교정하여 주석을 붙임)한 《조선창극사》도 발행될 정도로 널리 활용되는 것이다. 또한, 이 자료집에는 이훈구, 임규(林圭), 춘원 이광수(李光洙), 김명식(金明植), 김약영(金若嬰) 등의 서문(序文)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의 창극조(唱劇調)의 상황을 그림을 보듯 알게 해 주고 있다. 지난주, 이훈구의 서문은 읽어보았거니와 일제시대,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 요로에 전달했다고 하는 문인, 임규(林圭)의 《조선창극사》 서문(序文)을 확인해 보는 것도 당시의 창극조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해 주는 참고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연속되는 10폭 화면에 풍성하게 핀 모란꽃과 색색의 괴석이 가득 그려져 있습니다. 장황(粧潢,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로 서책이나 서화첩을 꾸며 만듦)으로 나뉘지 않은 연폭(連幅) 바탕에 그려져 자연스러운 구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영원히 펼쳐질 것 같은 모란꽃밭은 모란의 상징인 풍요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병풍을 그린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규모와 화려한 채색, 그림 솜씨 등으로 보아 왕실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풍요로움과 고귀함의 상징, 모란 모란은 꽃이 크고 색이 화려해서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꽃 중의 왕[花王]', ‘부귀화’ 등으로 불렸습니다. 원산지는 중국 쓰촨성[四川省]과 윈난성[雲南省] 지방인데, 중국 진한(秦漢)시대 이전부터 약재로 재배되었고, 당대(唐代)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꽃의 크기는 15~ 20cm 정도로 유난히 크며, 5월을 전후하여 꽃이 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덕여왕과 모란꽃 이야기가 유명하며, 설총(薛聰, 7세기 말~ 8세기 전반 활동)의 「화왕계(花王戒)」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모란을 감상하거나 모란꽃 피는 것을 길조로 여기는 내용이 많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의제가 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더욱 연구하여, 그것도 두뇌집단인 집현전의 집단지성을 통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나갔다.’(以爲恒式) 그 가운데 경연 등을 통해 옛 문헌을 공부하고 현실에서 고쳐 나갈 길을 찾으려 했다. 그 첫 번째 과제로 옛 문헌이나 관례를 찾는 ‘고제이문(古制以聞)’이 있다. 둑제(纛祭)에 대한 의견 한 예로 세종 12년 둑제를 지낼 때 무반의 참여 여부를 문헌에서 찾는다. 이에 무반의 배제를 허락지 말 것을 건의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교지(敎旨)를 받자온즉, ‘서반(西班)에서 호군(護軍, 정4품의 무관) 이상은 둑제(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둑[纛]에 지내는 국가 제사)를 지낼 때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를 드리지도 않고 배제(陪祭, 임금을 모시고 함께 제사 지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동편제 명창, 송흥록과 대구 감영(監營) 소속 명기(名妓) 맹렬(猛烈)과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맹렬은 송흥록의 소리를 듣고, 후원자 겸 연인 관계가 되어 동거하게 되었으나 자존심이 강한 두 남녀는 자주 다투고, 헤어지는 상황을 연출했다는 이야기,《조선창극사》에는 “맹렬이 떠난다는 소리에 송흥록은 슬프고, 외롭고, 애달프고, 사랑스러우나 미운 감정을 여지없이 발로하게 되었고, 이때 문밖에서 듣던 맹렬도 동감의 정을 이기지 못했으며 이것이 그 유명한 자탄가(自歎歌)로 진양조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조선창극사》라는 책은 일제의 폭거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40년, 1월,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펴냈으며 저자는 정노식이다. 이 자료를 펴내기 2년 전인 1938년에 저자는 《조광》에 「조선광대의 사(史)적 발달과 그 가치」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완하고 증보하여 1940년, 조선일보에서 2년 전인 1938년에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고 한다. 이 책의 간기(刊記 판권지)에는 저작 겸 발행자가 방응모(方應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발행인을 저자로 기록하는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