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벚꽃의 명소로 도쿄 한 복판에 자리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이하 ‘야스쿠니’)는 일본 군국주의 상징의 현충시설이다. 이곳에서는 A급 전범(戰犯)뿐 아니라 우익의 원조이자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요시다쇼인과 이토히로부미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1910년 9월 15일 한국인에게 치욕스런 한국병합 봉고제(奉告祭)를 올린 곳이다. 야스쿠니에는 일제침략기 징용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가 숨진 한국인 21,000여명과 대만인 등이 합사(合祀)되어 있어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영령 추도시설이기도 하다. 야스쿠니는 총면적 93,356㎡(28,289평)로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사(神社)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1869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시작하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79년이다. 이곳에서는 에도막부 말기(1853)부터 명치유신(1868)을 거쳐,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저지른 국내외 전쟁에서 숨진 군인, 군속 등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한다. 야스쿠니에는 태평양전쟁 사망자 213만 3,915명, 중일전쟁 19만 1,250명, 러일전쟁 8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차별과 빈곤에 맞서온 인권 변호사 우츠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 73살) 씨는 요즘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의 피해회복이 문제의 핵심인데 당사자 없이 국가 간에 전부 결정을 내려 버렸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을 정부와 국민이 함께 해야합니다.”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는 지난 8월 24일 YTN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베정권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반발해 수출규제와 백색 국가 제외 조치를 단행한 이후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 들은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처럼 저마다 ‘아베정권의 철딱서니 없는 처사’에 강한 불만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에히메현(愛媛県)의 남서부에 있는 세이요시(西予市)에서 태어난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는 1946년생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패전으로 일본 전역이 폐허 더미였을 시기였다. 그가 태어난 고향 아케하마쵸(明浜町)는 반농반어(半農半漁) 지역으로 그는 9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오이타현(大分県)으로 이사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친일단체 가운데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贊會)’라는 것이 있다. 이 단체는 도쿄에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건립계획(1915)이 확정되면서 건축비 모금을 위해서 일본에 명치신궁봉찬회가 결성되자 조선지부로 1933년에 설립되었다. 이 보다 앞서 《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월 10일(1917) 기록에는 “양궁(兩宮)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봉찬회(奉贊會)에 일금 1만 2,000원을 기부하였다.(창덕궁(昌德宮) 7,000원, 덕수궁(德壽宮) 3,000원, 왕세자 2,000원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메이지신궁 건립에 조선의 돈이 일찍부터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궁봉찬(神宮奉贊)은 메이지신궁이 완성된 이래 곧 100년을 앞둔 지금도 유효하여 메이지신궁 누리집에는 “메이지신궁은 1921년 메이지왕과 부인소헌왕후를 모시는 사당으로 이제 곧 100년을 맞이합니다. 많은 봉찬(기부)을 바랍니다.”라고 써 놓았다. 기부금을 모으는 목적은 메이지신궁진좌100주년기념사업자금(明治神宮鎮座百年祭記念事業資金)이라고만 써 놓았을 뿐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밝혀 놓고 있지 않다. 금액은 불문하며 5천 엔(우리돈 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패전 뒤 일본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12만 명에 달했다고 현대비지니스 신문은 지난 8월 13일자 기사에서 밝혔다. 이 가운데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서 부랑아로 떠돈 어린이는 35,000명으로 추정된다고 《아사히연감(朝日年鑑, 1947년)》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 부랑아의 말을 빌려 “일본의 종전기념일(終戦記念日)은 1945년 8월 15일이다. 하지만 부랑아들에게는 그날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전쟁 말이다.”고 했다. 부랑아 대부분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겨울부터 여름에 걸쳐 생겼는데 도쿄, 센다이, 오사카, 아이치, 후쿠오카 등 미군의 공습으로 부모를 잃게 되어 생겼다고 했다. 특히 1945년 3월 10일, 도쿄대공습 때 도쿄가 불바다로 변했으나 아직 날씨가 쌀쌀하여 한기를 피하고자 수많은 부랑아들이 도쿄 우에노역 지하도로 몰려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우에노역에는 노숙자들이 몰려있지만 당시에 이곳에는 7,000명 정도가 지내고 있었다고한다. 부랑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에노역에는 너무나 사람이 많아 눕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그 비좁은 공간에서 해결해야했다고 하니 패전 후 일본 도쿄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틀 뒤 8월 9일은 74년 전, 일본의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날이다. 8월 6일의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는 상상할 수 없는 위력의 원자폭탄이 떨어져 두 도시는 쑥밭이 되었다. 당시 나가사키시의 인구 25만 명 가운데 14만 9천 명이 죽거나 다치고 건물은 36%가 파괴되었다. 해마다 일본은 원폭일(8월 9일)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하는 “피폭자 위문, 평화 사수” 같은 얘기를 언론들이 빠지지 않고 기사로 내보낸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는 “왜 피폭자가 생겼는가? 왜 원자폭탄을 맞아야 했는가?”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러한 보도는 전후(戰後) 74년간 지속되고 있다. 실제 나가사키에 있는 평화자료관에 가보아도 “원폭을 당한 이유”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일본인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만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러일전쟁ㆍ중일전쟁ㆍ세계 2차대전 등 온갖 전쟁을 일으켜 인류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내몰던 일본은 분명 전쟁의 가해자다. 그런데도 8월 9일 원폭일만 되면 갑자기 피해자의 입장으로 돌변한다. 또 한 가지 잊지말아야 할 것은 8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마가 개고 나면 30도를 넘는 불볕더위가 계속될 것이라고 기상청이 연일 보도하고 있다. 벌써부터 더위가 걱정이다. 이 불볕더위를 시원하게 해주는 상징물은 무엇일까? 에어컨 같은 전기제품 말고 여름철의 상징물을 꼽으라면 부채라든가 팥빙수, 시원한 수박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볕더위 속에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일본에 있는데 바로 풍령(風鈴, 후우린)이 그것이다. 풍령은 집안의 처마나 문 틀 위 같은 곳에 달아두는 데 바람이 살랑거리면 딸그랑딸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 마치 물방울 소리처럼 느껴져 시원한 느낌을 준다. 대개 풍령의 재료가 유리이거나 도자기 따위라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난다. 풍령(風鈴) 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1185- 1333) 말기에 만들어진 《법연상인행상회도(法然上人行状絵図)》라는 책으로 당시에는 풍령(風鈴) 보다 풍탁(風鐸)이란 말이 널리 쓰였으나 이 책에서는 풍령(風鈴)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풍탁(風鐸)이란 고대로부터 악귀를 쫓기 위한 것으로 주로 청동으로 만들었다. 고대에는 신을 부르거나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방울이나 종과 같이 소리를 내는 도구를 즐겨 사용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를 마지막으로 낭송한 사람들은 배우 김영철과 시인 우에노 미야코 씨였다. 지난 18일(금) 밤, KBS 공개홀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별 헤는 밤” 공개 녹화방송이 있었다. 이 녹화방송은 8월 15일 저녁 6시 30분부터 KBS에서 방송될 예정이다. KBS에서는 8월 15일 광복절 특집으로 윤동주 음악회를 마련했으며 이날 공개 녹화방송에 대미를 장식한 것은 바로 우에노 미야코 시인의 ‘서시’ 낭송이었다고 방청객들은 입을 모았다. 우에노 미야코 시인이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별 헤는 밤”에 KBS로부터 초대 받아 마지막 무대를 배우 김영철과 장식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왜냐하면 윤동주 시를 일본인에게 알리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우에노 미야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인 가운데 우에노 미야코 시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일본인의 평균 결혼 비용은 얼마일까? 주식회사 리크루트 마케팅 파트너인 ‘젝시결혼트렌드’ 조사에 따르면(2018년 10월) 평균 357.5만 엔(한화 약 3,900만 원)으로 밝혀졌다. 이 금액은 결혼식, 피로연 파티를 모두 포함하는 금액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식 비용은 2012년 조사 때 보다는 13만 7천 엔(한화 149만 원)이 증가한 금액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결혼 비용의 증가에 반비례하게 초대 손님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에 견주면 평균 69명이 줄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결혼식 관련 업계 소조(SoZo) 대표인 아츠미유리카 씨는 ‘드레스 비용과 음식’이 결혼 비용을 늘어나게 한 원인이라고 한다. “신부될 사람들이 SNS라든가 친구의 결혼식 등에서 결혼에 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좋은 드레스라든가 좀 더 좋은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전체 비용을 늘어나게 하는 요소”라고 한다. 신랑될 사람도 드레스 비용이 비싸더라도 신부가 기뻐한다면 문제없다는 의식이 깔린데다가 피로연의 음식의 경우 음식이 너무 초라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기에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그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마철이라지만 푹푹 찌는 된더위로 숨쉬기조차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7월도 중순으로 들어서고 보니 이제 꼼짝없이 된더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셈이다. 이러한 된더위에 일본인들은 안부편지인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를 쓴다. 쇼츄미마이는 대개 엽서를 보내는데 엽서에는 파도치는 그림이라든가, 시원한 계곡 그림, 헤엄치는 금붕어 등이 그려져 있어 엽서를 받는 사람이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게 배려한 것들이 많다. 그뿐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를 보내는 때는 보통 장마가 갠 뒤 소서(小暑)부터 대서(大暑) 사이에 많이 보내는데 반드시 이때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입추까지 보내면 무난하며 이때까지는 안부 편지 앞머리에 ‘맹서(猛暑, 된더위)’라는 말을 쓴다. 바쁜 일이 있어 이때 못 보내고 이 이후에 보내면 ‘잔서(殘暑, 한풀 꺾인 더위)’라는 말을 앞머리에 넣는다. 이것을 “잔쇼미마이(殘暑見舞い)”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쇼츄미마이는 여름 된더위가 시작되어 끝나가는 날까지 보내는 풍습인 셈이다. 안부편지는 나름의 어여쁜 편지지를 골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祇園祭),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는다. 오래된 순서를 꼽으라면 아오이마츠리 (567년), 기온마츠리(863년), 지다이마츠리(1895년) 순이지만 가장 화려하고 볼만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기온마츠리(祇園祭)다. 기온마츠리의 유래는 전염병이 확산 되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전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노미코토)의 노여움으로 알았다. 그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기온사(祇園社, 현 야사카신사)에서 병마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 66개의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가마 66개를 만들어 역병(疫病)을 달래는 “어령회(御靈會)”를 지낸 데서부터 기온마츠리는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스사노미코토가 신라의 우두신이란 기록이 있다. 《교토 속의 조선(京都の中の朝鮮)》을 쓴 박종명 씨는 서기 656년 가라쿠니(韓國)의 대사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가 일본에 건너올 때 신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