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식민지 지배하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재일동포들은 해방 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차별이나 격차에 시달리면서도 모국과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재일동포들이 요구하는 영주자의 지방참정권과 조선학교 무상화 등의 현안이 실현되는 것이 공생사회의 구축에 필수적이다.” 이는 어제(10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19층)에서 열린 <3.1만세운동 정신 확산 학술포럼 – 3.1만세운동 정신과 동아시아 평화->에서 오다가와 고(小田川 興) (전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장) 씨가 한 말이다. 오다가와 고 씨는 어제 학술포럼에서 제2세션 주제인 ’3.1만세운동의 법적 의의‘(발표 김창록 경북대 교수) 토론자로 나서서 ‘3.1만세정신과 공명이야말로 동아시아 비핵화 평화의 기초 –한일시민연대의 횃불을 평화헌법과 함께-를 발표했다. 이날 오다가와 고 씨는 1) ’3.1만세운동을 탄압한 일본의 강권통치‘ 2) ’제국회귀와 전후 보상문제 잘라내기‘ 3) ’핵 없는 세상을 미래세대에게‘라는 주제로 토론을 펼쳤다. 특히 “3.1만세운동 100돌을 맞는 우리들은 제국의 부활을 막기 위해, 다음 100년 후에 지금을 생각하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 치치부시(埼玉県 秩父市)에서는 12월 들어 마츠리를 여는데 그 이름은 ‘치치부요마츠리(秩父夜祭)’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치치부밤축제’라고나 할까? 역시 마츠리는 밤이 낮보다 화려하다. 이 지역에서 마츠리때 쓰는 가마, 창, 수레 등은 2016년 12월 1일,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바 있다. 치치부시의 12월의 명물인 ‘치치부요마츠리(秩父夜祭)’는 치치부신사(秩父神社)가 주관하는 축제로 교토의 기온마츠리(京都祇園祭), 히다의 타카야마마츠리(飛騨高山祭)와 함께 일본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다. ‘치치부요마츠리(秩父夜祭)’는 에도시대 관문연간(寛文年間, 1661~1672)에도 있었던 것으로 3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츠리다. 에도시대에는 마츠리와 함께 치치부에서 유명한 비단 시장이 서 치치부의 경제를 크게 윤택하게 했다. 당시에 비단 시장이 섰기에 이 마츠리를 ‘누에 축제’라고도 한다. 지금은 비단 시장은 서지 않지만 치치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축제는 1년을 총결산하는 자리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축제가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회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점차 지역민들과 밀착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눈을 뜨니 어젯밤 품고 잠들었던 카이로(懷爐, 품에 넣어 가슴ㆍ배 등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가 배 위에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유리창 넘어 하늘은 잿빛이고 창 넘어 내린 눈은 그대로였다. 목욕탕은 얼음이 꽁꽁 언 채 반질거렸다. 수도는 얼어붙어서 꼭지가 움직여지질 않는다. 방안이 너무 추워 발끝이 아플 지경이다. 글 좀 쓰려고 책상에 앉아 있으니 두 살배기 아들 녀석은 추위에 계속 칭얼대고 있다.” 이는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화로(火鉢, 히바치) 라는 작품 일부다. 원고지 6장짜리의 짧은 소설인 ‘화로’는 주인공이 나츠메 소세키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유신 1년 전인 1867년에 태어나 다이쇼(大正,1912~1926)기를 살다간 나츠메 소세키 때만 해도 방에 앉아서 발끝이 얼어버려 통증을 느낄 정도로 추웠다. 그런 서재에서 그는 글을 썼다. ‘화로’는 나츠메 소세키 당시 일본 가정의 겨울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집안의 지독한 추위가 ‘화로’를 탄생시킨 셈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도련님》 등으로 널리 알려진 나츠메 소세키는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일본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남의 시치고상(七五三)은 집 근처 신사에서 치렀으나 동생은 조금 색다른 곳에서 치루고 싶었습니다. 장남 때는 정보가 부족하여 동네 신사에 갔으나 동생 때는 유치원 어머니들로부터 여러 정보를 들어 조금 규모가 큰 신사로 정했습니다. 유명한 그 신사는 무엇이든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했으며 기도 시간에도 단체 기도만 있을 뿐 개인 기도는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네 신사에서는 시치고상(七五三)의 주인공에게 여러 가지 문구들도 선물해 주던데 큰 신사에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막내의 시치고상이 돌아올 때는 유명한 신사보다는 장남이 치렀던 동네 신사에 갈 생각입니다.” 이는 지난 11월 15일, 시치고상(七五三) 행사를 치른 어머니의 이야기다.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해마다 11월에 들어서면 어린이를 위한 ‘시치고상(七五三)’ 잔치를 위해 바쁘다. 이날 어린아이에게 입힐 기모노를 파는 가게, 머리 손질을 해주는 미용실,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 등도 덩달아 바빠지는 때다. 예전에는 11월 15일이 거의 정해진 날이었으나 핵가족에,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즈음은 ‘10월부터 11월 사이에 형편이 좋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뒷줄임) - 김구 ‘저의 소원’ -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 강은교 ‘숲’-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별 헤는 밤- 이것은 일본의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1957-2018) 씨가 한글로 쓴 서예작품 가운데 일부다. 그는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한글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명이라고 해야 좋을 이 한편의 시와 만남은 이후 나의 서예작업을 더욱더 풍요로운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다나카 씨는 48살 때부터 한글(조선어)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익힌 뒤부터 그의 서예작품은 주로 현대 일본에 드리워진 사회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일본의 민족차별문제나 공해문제 더 나아가 한일관계의 역사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윤동주, 송몽규, 안중근, 김구, 한용운 등의 어록이나 시를 서예작품으로 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300년 전 일본 왕실에는 고대 한반도 출신의 악사들이 즐비했다. 일본의 정사(正史)인 《속일본기(續日本紀)》 731년 7월 29일 기록만 봐도 “아악료(雅樂寮)에 속하는 악생(樂生)의 정원은 대당악(大唐樂) 39명, 백제악(百濟樂) 26명, 고구려악(高麗樂 ) 8명, 신라악(新羅樂) 4명, 탐라악(耽羅樂악) 62명...을 두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가하면 740년 12월 4일에는 "왕실에서 신라악을 연주하게 했다", 744년 2월 22일에는 "백제악을 연주하게 했다"는 기록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고대 한국 출신이 담당하던 음악은 고마가쿠(高麗樂, 고구려를 뜻함)라는 이름으로 현재 일본 전통음악인 아악에 전승되고 있다. 《속일본기》 보다 앞선 기록으로는 《일본서기》 570년 7월, 상락관(相樂館)에서 고구려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런가 하면 683년, 천무왕 12년(683)조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음악이 조정에서 연주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 왕실과 고대 한국은 잦은 음악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일본후기(日本後紀》에는 809년에 활약했던 고려악사 4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놀다가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하루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잘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이 시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 12월부터 1605년 3월까지 교토 흥성사에 머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나눈 시로 알려졌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는 ‘일본교토 흥성사(興聖寺,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遺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11월 17일까지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교토 흥성사에서 소장 중인 사명대사의 유묵을 영상 데이터로 제공 받아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9월 19일치 산케이웨스트(産経WEST)에 따르면 “송운대사(사명대사)는 풍신수길에 의한 조선출병시에 의승병(義僧兵)을 이끌고 일본과 싸웠다. 그 뒤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면회하고 국교회복과 조선인 포로를 귀국 시키키 위해 교섭에 진력을 다했다. 이후 1607년부터 시작한 조선통신사 기반을 구축했다.”고 사명대사를 소개했다. 일본에서는 송운대사(松雲大師)로 더 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2일) 일본 열도는 일왕 즉위식으로 떠들썩했다. 일왕이 살고 있는 도쿄 황거(皇居)에서 거행된 일왕즉위식은 국내외 2,000여명의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외국으로부터 찾아온 손님은 191개 나라에서 423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날 일왕즉위식은 낮 1시 5분, 위엄있는 전통복으로 갈아입은 일왕이 ‘국민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빌며 국민에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내용의 선언을 시작으로 약 30여 분 동안 즉위식이 이어졌다. 어제 등극한 나루히토 왕의 고조부는 122대인 메이지왕(明治天皇)이며 메이지는 61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증조부인 제123대 다이쇼왕(大正天皇)으로 단명하여 48살에 숨을 거두었다. 조부인 제124대 쇼와왕(昭和天皇) 시대를 거쳐 아버지 헤이세이왕(平成天皇)은 제125대다. 어제 제126대 일왕 즉위식을 한 나루히토는 원래대로라면 전 왕이 숨을 거두고 난 뒤 새 왕으로 등극해야했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전왕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일본에 천황제가 성립된 것은 7세기 후반의 일로 대보율령(大宝律令)에서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법제화했다. 그러나 일왕제도는 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마츠리의 나라다. 그 가운데서도 교토의 3대 마츠리는 이름난 것으로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을 수 있다. 해마다 10월 22일 열리는 지다이마츠리는 헤이안 천도로부터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환무천황(桓武天皇)을 제신으로 시작한 마츠리로 올해 124회째를 맞는다. 그러나 올해는 레이와 원년(令和元年, 새로 일왕이 된 나루히토의 연호)으로 황거(일왕이 사는 곳)에서 즉위식 행사가 있어서 26일로 날짜 변경이 예정되어 있다. 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가 가장 성대하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진행이다. 지다이마츠리의 백미는 형형색색의 옛 시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인데 시내를 행진할 때에는 각 시대별 곧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칸다타. 이 남자가 불지옥에서 허둥대고 있을 때 지상에서 부처님은 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부처님이 연꽃 향이 물씬 풍기는 연못 밑을 우연히 내려다보니 발아래 저 멀리 지옥이 훤히 보였다. 지옥은 아비규환 이었다. 서로 물어 할퀴고 뜯고 난리도 아닌 가운데 어디서 낯이 익은 남자 칸다타를 발견했다. 가만있자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그렇지 이 남자가 지상에서 거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일 뻔한 상황에서 이를 살려준 것을 부처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불쌍한 지옥의 칸다타를 위해 부처님은 은실로 된 거미줄 같이 가는 줄을 지옥으로 내려 보냈다. 칸다타는 기쁜 나머지 이 줄을 잡고 지상으로 오를 꿈에 젖어 잠시 행복했다.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움켜쥐다가 힘이 빠져 잠시 발아래를 보니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죄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한결같이 칸다타가 움켜쥔 거미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간 칸다타는 기겁을 했다. 이 많은 인간들이 거미줄에 매달리면 줄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영영 지옥에서 허덕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죄인들을 향해 고래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