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법륭사 금당벽화는 동아시아 불교미술사상 최고의 보물로 알려져 왔다. 그런 까닭에 명치 30년(1897) ‘고사사(古社寺, 오래된 신사와 절)보존법’ 시행직후에 금당이 특별보호건조물로 지정되자 벽화 보존은 대정(1912~1924) 연간에 법륭사벽화보존방법조사위원회의 조사를 시작으로 각종 대책을 검토하기에 이른다. 소화 9년(1934) 법륭사국보보존사업이 개시되자 정확한 현장기록 작성을 목적으로 한 금당벽화의 원치수분할촬영(原寸大分割写真撮影)이 기획되었으며 교토의 편리당이 이를 맡아 관리하였다. 그렇다면 금당벽화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금당은 동쪽 입구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벽화)으로 가기 위해 먼저 본존 앞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약사삼존불 앞에 왔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일렬로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오래된 불상과 검은 기둥 사이의 서쪽 벽에 아미타불이 밝은 모습으로 합장한 손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이는 것이었다. 동쪽 입구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아미타불이 이렇게 확실히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다본 벽화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뒷줄임)”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읽노라면 언제나 윤 시인의 고향집으로 가는 길목의 선바위가 떠오른다. 그 산모퉁이 언저리를 돌아 윤 시인이 태어난 북간도 명동촌과 윤 시인이 죽어 묻힌 무덤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 어제(10일) 도다 이쿠코(戶田郁子, 인천관동갤러리 관장) 씨는 나에게 윤동주 시인의 무덤에서 시낭송을 한 일본인들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이번 윤동주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은 평범한 일본 시민들입니다. 이들은 우에노 미야코 시인이 번역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들고 와서 각자 좋아하는 시를 낭송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낭송을 새겨들으며 아주 감동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도다 이쿠코 작가는 연변에서 10여년 가까이 지낸 경험이 있어 종종 윤동주를 그리는 일본인들을 안내하곤 한다. 누구보다도 윤동주 시인에 대해 잘 알뿐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한지라 일본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왜 고대사람들은 길 없는 사막을 헤쳐 인도로부터 《법화경》을 구해왔을까요? 머나먼 법화경의 여정을 따라 오아시스 도시 중국 둔황으로 떠나보실까요?” 막 상영되고 있는 동영상 화면에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뽀얀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법화경》 그림이 그려져 있는 중국 둔황의 막고굴 내부가 비쳐졌다. 지난 토요일(9월1일) 낮 2시 무렵, 나는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한 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법화경》, 평화와 공생 메시지(이하 ‘법화경’) 전시장에 있었다. 아침부터 빗줄기를 뿌리던 날씨가 좀 개길 기다려 점심을 먹고 광안리 해수욕장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니 해수욕장 바로 지척에 법화경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국SGI수영욱일문화회관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SGI’라는 것은 국제창가학회(國際創價學會, Soka Gakkai International)를 가리키는 말로 ‘창가학회’란 《법화경》 신앙을 중시하는 일본의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재가신도단체에서 유래한 종교단체를 말한다. 법화경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흰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입은 안내원들이 동영상실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토요일 오후라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느 날 한 마리의 타조가 살해되었다 누가 살해했나 타조를? 나는 아니다 참새가 말했다 살해자의 짓이다 살해된 것을 살해한 것은 그러면 누가 보았나 타조가 살해된 것을? 나는 아니다 파리가 말했다 살해자의 짓이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살해하는 것을 - 오사다 히로시 ‘누가 타조를 살해했나’ 가운데 - 타조를 살해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시는 이어진다. 참새, 파리, 물고기, 투구풍뎅이, 부엉이, 촉새, 종달새, 공작, 비둘기, 소리개, 굴뚝새, 개똥지빠귀, 소에 이르도록 타조를 살해한 범인을 본 자를 찾는 구절이 시어로 얽혀있다. 이 시는 오사다 히로시의 ‘첫 번째 질문’이란 시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시다. 최근에 강을 바라본 것은 언제인가? 모래 위에 앉아 본 것은, 풀밭에 앉아 본 것은? ‘아름답다’고 당신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꽃 일곱 가지를 말할 수 있는가? 당신에게 있어서 우리란 누구인가? - 오사다 히로시 ‘첫 번째 질문’ 가운데 - 후쿠시마 출신인 오사다 히로시(長田弘, 1939-2015)는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LA 리틀도쿄(일본거리)는 우리의 숙소였던 에지먼트 200번지 근처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5개 역을 지나 엘에이시청 (CITY OF LOS ANGELES)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다다르는 곳에 있었다. 8월 9일(현지시각)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리틀도쿄 거리에 도착했다. 말처럼 이곳이 일본인 거리라고 느껴질 만큼 일본어 간판이 즐비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변변한 간판 하나 안보여 ‘혹시 잘 못 찾았나?’ 싶을 정도였다. 두리번거리다가 리틀도쿄 안내소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미국에서 영어 실력이 딸리던 나에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나로서는 마치 친정집에 온양 이것저것 상황을 물을 수 있어 좋았다. “중심거리는 방금 들어오신 그 길입니다. 리틀도쿄는 3블록의 거리가 있어요. 첫 번째 거리가 가장 번화하고요. 두 번째 거리도 볼만합니다만 세 번째 거리는 안 가시는 게 좋습니다. 볼 것도 없고 약간 위험하거든요.” 일본인 안내원은 친절하게 리틀도쿄 지도를 꺼내어 볼만한 곳을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설명대로 나와 가장 번화하다는 거리를 걸어보았지만 이건 숫제 실망스러웠다. 라멘(라면)집 몇 개가 고작일 뿐이었다. 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림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선뜻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해주고 있는 화백이 있다. 후지시마 하쿠분(藤島博文, 77) 화백이 바로 그 사람이다. 열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지시마 화백은 고등학생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도쿠시마현전(徳島県展)에서 내리 3년을 입선하는 실력을 과시했다. 이후 일본 최고의 미술대학인 무사시노미술대학(武蔵野美術大学)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일본예술원회원이었던 스승 가나시마 케이카(金島桂華)의 제자로 들어가 독자적인 그림 세계로 몰입한다. “미의식에 의한 사람 만들기, 도시 만들기, 나라 만들기(美意識による人づくり・町づくり・国づくり)”. 이 말은 후지시마 화백이 꿈꾸는 궁극적인 미술세계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그는 머릿속에 지식만 잔뜩 들어있는 창백한 인간을 거부한다. 돈만 밝히는 인간, 권력만 지향하는 인간, 알량한 지식으로 잘난 체하는 인간을 거부하고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어디까지나 미의식(美意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도시도 그러하고 더 나아가 나라 또한 미의식은 중요하다. 너무나 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끼 정원으로 이름난 사이호지(西芳寺)는 교토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정원 바닥에는 천년의 이끼가 그 푸르름을 더하는 이곳은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정토를 보여주려고 만든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호지(西芳寺)가 관광객들로부터 점령된 것은 얼마 전부터이다. 절은 관광수입으로 부자가 되자 절문을 걸어 잠그고 3개월 동안 정진과 붓글씨 쓰기에 들어갔다. 이때는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에게만 정원을 보여준다. 이로써 3개월 동안의 휴식시간이 생겼다. 다행히 내가 교토에 살던 10년 동안에는 50센트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갈 수 있었다.(1984년 당시)” 이는 존 카터 코벨 교수가 쓴 《일본에 남은 한국 미술》에서 한 말로 그가 교토에 묵었던 1984년 당시 상황이지만 사실 일본의 절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볼거리를 만들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다. 교토의 경우만 해도 코벨 교수가 말하고 있는 이끼 정원 사이호지[西芳寺], 절의 전각을 금색으로 도금하여 그 이름을 날리고 있는 긴카쿠지[金閣寺), 크고 작은 돌(石庭)을 깔아 놓고 감상하는 정원으로 이름난 료안지[龍安寺), 일본 국보1호인 미륵보살반가상이 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 정말 덥다. 덥다는 말보다 용광로 앞에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아니 몸의 일부가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햇볕에 조금만 걸어도 그런 느낌이다. 우리나라도 30도가 넘는 폭염이 2주째 계속되고 있지만 이웃나라 일본 역시 된더위로 난리다. 어제 사이타마현에서는 일본 관측사상 최고로 더운 섭씨 41.1도를 기록하는 등 일본열도가 펄펄 끓고 있다. 일본 기상청에 따르면 23일(월) 낮 2시 16분, 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埼玉県熊谷市)의 기온이 일본 관측기록사상 가장 높은 41.1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 기록은 2013년 8월 12일 고치현 시만토시(高知県四万十市)에서 기록한 41.0도를 웃도는 기록이다. 사이타마현 뿐 아니라 도쿄, 기후현 등 일본 전역이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무더위에 일본인들은 안부편지인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를 쓴다. 쇼츄미마이는 대개 엽서를 보내는데 엽서에는 파도치는 그림이라든가, 시원한 계곡 그림, 헤엄치는 금붕어 등이 그려져 있어 엽서를 받는 사람이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게 배려한 것들이 많다. 그뿐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집에 찾아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서 흑자 찻잔을 텐모쿠(天目)라고 부르는데 국보로 지정된 료헨텐모쿠(曜変天目) 3점이 전해지고 있다. 텐모쿠(天目)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 절강서 천목산(天目山)에서 수행한 가마쿠라 시절의 승려들이 일본에 가지고 간데서 텐모쿠(天目)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일본은 당ㆍ송시대 유학생으로 건너간 승려들이 차를 들여와 절을 중심으로 송나라의 점차법(點茶法, 한국의 가루차 마시는 법과 비슷하다.)과 투차(鬪茶, 차를 마셔 그 종류를 맞추는 겨루기) 풍습이 유행했으며 이때는 건요(建窯), 길주요(吉州窯)에서 생산된 흑자 찻잔이 유행했다. 그러나 원나라 시절, 백자 찻잔이 유행하게 되자 일본은 13세기말부터는 세토(瀬戸) 지역 가마에서 흑자 찻잔을 만들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중국의 흑자 찻잔이 출토되는 지역은 하카타(후쿠오카), 가마쿠라, 오키나와 수리성 일대로 하카타와 가마쿠라 유적에서는 흑자 찻잔이 100여점 이상 발굴되었다. 한편 오키나와 수리성에서는 500여점의 차양요(茶洋窯) 흑자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쿤타이칸소우쵸우키(君臺觀左右帳記)>에는 ‘건요에서 만든 잔 가운데 최상품인 흑차 찻잔은 세간에는 없는 물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얼마 전 제7호 태풍 “쁘라삐룬”이 일본의 후쿠오카를 비롯한 서일본 지역을 강타하여 큰비를 몰고 오는 바람에 산사태가 나고 홍수가 나서 사망자만 100 명이 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런 어수선한 가운데 교토에서는 연중 최대의 여름 축제인 ‘기온마츠리(祇園祭)’ 준비로 한창이다. 이번 큰비로 인한 집중 타격은 받지 않았지만 가까운 지역이 물난리로 야단법석이다 보니 예년 같은 축제분위기는 덜할 것 같다. 기온마츠리는 일본의 여타 마츠리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여름 축제다. 보통 7월 한 달 내내 축제가 이어지는 판에 이 무렵이 되면 교토 일대는 호텔방 구하기가 쉽지 않다. 기온마츠리 유래는 전염병이 확산 되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전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노미코토)의 노여움으로 알았다. 그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기온사(祇園社, 현 야사카신사)에서 병마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 66개의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가마 66개를 만들어 역병(疫病)을 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