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예순 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여 82살에 게임 앱을 개발한 할머니, 이른바 컴퓨터 할머니로 알려진 일본인 와카미야 마사코(若宮正子, 82살) 씨는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일약 스타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에는 아흔 살에 마라톤 현역이 있는가하면 아흔 살 시인이 있고 여든 살에 컴퓨터 게임 앱을 만드는 등 고령의 파워가 만만치 않다. 히나단이라는 인형놀이를 게임 앱으로 개발한 와카미야 마사코 씨는 평생 다니던 은행을 퇴직하고 늙은 노모 간병을 위해 집안에 들어앉았다. 어느 날 집에 있으면서도 컴퓨터가 있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컴퓨터 한 대를 산 것이 컴퓨터와의 인연이다. 와카야미야 씨가 예순 살 먹던 해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일이다. 그는 난생 처음 접한 컴퓨터를 거의 독학으로 익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타자치는 법부터 익혀 나간 그는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법도 익혔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정도 컴퓨터에 익숙해지자 노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멜로우 클럽’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인터넷과 IT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든 와카미야 씨는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컴퓨터 활용법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기상청은 6일, 큐슈 북부와 남부가 장마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이는 평년보다 약 6일 늦은 것으로 일본의 장마는 우리나라 보다 대개 1달 이상 빨리 찾아온다. 츠유(梅雨)라고 부르는 일본의 장마 소식과 함께 실린 사진은 보랏빛 ‘수국꽃’이다. ‘아지사이’라고 부르는 수국꽃은 장마=수국으로 인식될 만큼 장마철 일본의 정원을 수놓는 꽃 가운데 하나다.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 6월 6일치에는 수국꽃으로 아름다운 후쿠오카 하코자키신사(筥崎宮, 福岡県 福岡市 東区箱崎 소재)의 활짝 핀 수국꽃을 소개하고 있다. 1991년 신사 안에 정원(신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신원(神苑)’이라 한다)을 조성할 당시에 심어둔 수국꽃은 이제 하코자키신사의 명물이 될 만큼 자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코자키신사는 서기 921년에 세운 신사로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난해 8월 26일부터 9월4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이라는 특별전에 이 신사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코자키신사의 이름이 나오는 신안해저선은 1323년 원나라 저장성 경원(慶元, 현 닝보 '寧波')항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결코 화내지 아니하며 늘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 숲속 그늘에 지붕을 새로 이은 작은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주고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그 볏단을 져주고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 두라고 말리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위 닥친 여름에는 어찌할 바 몰라 허둥거리고 모든 사람에게 바보 소리를 들으며 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는 일본의 국민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년 8월 27일 ~ 1933년 9월 21일)가 지은 유명한 ‘비에도 지지 않고(雨ニモマケズ)’ 시다. 고향 이와테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겐지는 도쿄로의 진출을 꿈꾸다가 25살 때(1921년) 대도시 도쿄로 무작정 상경을 한다. 먹고 잘 곳도 없는데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상님들의 이름자만이라도 새겨진 족보들을 고국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 같아 기증하게 되었다. 일본에는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유물들을 소장하다가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지난 4월 21일(금) 재일동포 정아미(鄭雅美, 일본이름 마쓰무라마사미(松村雅美), 여 51살)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 등 고문서 7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며 남긴 말이다. 정아미 씨가 기증한 책은 《영산신씨파보(靈山辛氏派譜)》(2책, 1904년, 목활자본)와 《영산신씨세계(靈山辛氏世系)》(2책, 필사본), 《영산신씨가승(靈山辛氏家乘)》(1책, 필사본), 《개국정사좌명공신회맹문(開國定社佐命功臣會盟文)》(1책, 1791년, 목판본), 《종부지증(種付之證)》(1점, 1918년) 등 7점이다. 기증 자료는 기증자의 친정어머니 신애자(辛愛子)씨가 보관해오던 것으로 어머니는 경남 하동에서 살다 한국전쟁(1950년) 당시 아버지 신재호(辛在昊)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가지고 간 자료들이다. 두 분은 모두 고인이다. 《영산신씨파보》는 우리나라 어느 기관에서도 소장하고 있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몇 해 전 필자는 일제국주의가 저지른 남경대학살(1937~1938년, 중일전쟁 중에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 현장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인류의 비극인 남경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의 《남경의 강간, The Rape of Nanking》에 자세히 나와 있어 사족을 달 필요는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남경대학살 현장에서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 그것은 목이 잘린 중국인의 머리를 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고 입에는 담배꽁초를 물려 놓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진이 《일본잔혹사진사(日本殘酷寫眞史), 2006, 도쿄 사쿠힌샤》에 실려 있어 섬뜩했다. 《일본잔혹사진사(日本殘酷寫眞史)》란 다름 아닌 시모카와 코우시(下川 耿史, 1942~) 씨가 쓴 책으로 이 책 29쪽에 실린 목 잘린 남자의 사진은 필자가 남경대학살에서 본 사진과 흡사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대학살의 참상은 이미 일본 내에서 학습(?)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창업 10년 된 회사가 어떻게 해서 아프리카 굴지의 기업이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가 한권의 책 속에 들어있다. 책 제목이 좀 길지만 《아프리카의 초인기 일본기업 비포워드의 성공 철학》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비포워드를 창업한 아먀가와 히로노리(山川博功, 46살) 씨다. 그는 20대 때 중고자동차 매매업을 시작했는데 해외 비즈니스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여 실패를 거듭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주로 공략한 것은 현지의 유력한 조력자를 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비포워드와 손잡을 파트너 기업을 찾아서 고용을 창출하고 신뢰를 구축해 나간 것이 주효했다. 또한 아프리카의 SNS 환경이 일본 이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입소문에 의한 평판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야마가와 씨는 브랜드를 광고하기 위해 마우라이의 인기 축구팀을 사들여 팀 이름을 아예 비포워드라고 회사이름을 붙여 버렸다. 현재 비포워드는 매출이 500억 엔까지 성장했다. 28개국 지점에 52명의 외국인 스탭이 있는 등 국제적인 기업이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한 《아프리카의 초인기 일본기업 비포워드의 성공 철학》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오가와미메이(小川未明,1882-1961)의 작품 가운데 “찔레꽃” 이란 게 있다. 원래 일본말로는 노바라(野ばら)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찔레꽃” 또는 “들장미”로 번역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들장미”와 “찔레꽃”은 사뭇 다른 이미지로 다가서지만 일본말은 이 둘을 가리키는 말이 “노바라(野ばら)”다. 오가와미메이의 작품 ‘노바라(野ばら)’를 필자는 “찔레꽃”으로 번역하고 싶다. 가수 장사익은 찔레꽃 향기가 짙어 너무 슬프다고 했는가? 오가와미메이의 “찔레꽃” 줄거리는, 국경선을 사이에 둔 두 나라 병사가 전쟁이 없는 상황에서 친하게 되어 장기도 두고 말동무도 하다가 갑자기 한쪽의 병사가 전쟁으로 국경 수비대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긴다. 두 나라 병사는 한쪽이 노인이고 한쪽이 젊은이었다. 젊은이가 국경 수비대를 떠나기 전까지 두 병사는 날마다 마주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바로 찔레꽃 필 무렵이었다. 유독 가슴 시린 향기를 내뿜는 찔레꽃 주변에는 언제나 꿀벌들이 날아들었고 적이자 동지가 된 두 사람은 마치 친아버지와 아들처럼 친하게 되지만 결국 젊은이는 전쟁터로 배치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 사람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 최초다. 이때부터 1905년 8월 8일까지 56회에 걸쳐 하와이 땅을 밟은 사람은 7,291명에 이르렀다. 초기 이민선을 탄 사람들은 사탕수수 밭 노동을 위해 건너 간 사람들이다. 1905년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전체 노동자 48,229명 가운데 한인은 4,683명으로 9.71%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일본사람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언제일까? 일본인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30년대지만 본격적인 이민의 역사는 1868년이다. 이후 1902년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70%를 일본인이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그러나 1924년 일본인의 입국을 저지하는 이른바 배일이민법(排日移民法)이 가동되면서 하와이 이민자 수는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24년 7월 1일 미국의 이민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각국으로부터 하와이로 들어오는 노동자 수를 무제한 받아들이지 않고 연간 제한을 두는 법으로 배일이민법은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와이 사탕수수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왕조실록》은 의당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져야하지만 국운이 기울어져갈 무렵이어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가 이에 관여하는 바람에 상당부분이 일본의 입김에 왜곡돼 있다. 본문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모두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종실록》은 1863년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1907년 《고종실록》 부록 편찬위원을 보면 위원장은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이며 종3위(位) 훈1등인 법학 박사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맡고 있으며 부위원장(副委員長)을 한국인인 이항구가 맡고 있다. 부록 편찬위원 33명 가운데 일본인은 모두 10명이다. 그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제국대학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 감수위원 나리타 세키나이(成田碩內), 사료 수집위원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서무위원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 서무위원 시가 노부미쓰(志賀信光), 회계 위원 사토 아키미치(佐藤明道), 감수 보조위원 에하라 요시쓰치(江原善椎), 편찬 보조위원 하마노 쇼타로(濱野鐘太郞), 편찬 보조위원 미즈바시 후쿠히코(水橋復比古)〕, 사료수집 보조위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금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1관에서는 ‘윤동주 100년 생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윤동주 생애 100년이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1917부터 올해 2017년을 세어 100년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4월 6일(목) 필자는 “일본에서 부활하는 윤동주 시인 -부제: 일본인들은 어떻게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가?-”란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필자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 명동촌을 시작으로 하여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그리고 하숙하던 종로 누상동 집터와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둘러본바 있다. 또한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과 교토 도시샤대학 그리고 다카하라 하숙집터를 찾아갔으며 27살의 나이로 순국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그의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의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는 일찍부터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아 그의 불꽃같은 삶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주부에서 윤동주 시에 반해 평생을 윤동주 연구에 바치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를 비롯하여 북간도 용정에서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내고 그의 문학성을 널리 알리고 있는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학 교수. 그리고 1990년 일본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