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청백리(淸白吏)! ‘청백’은 ‘청렴결백’을 줄인 말로,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맑고(淸), 깨끗한(白) 그 이름처럼 청백하게 살다 간 이들이 있다. 조선시대 수많은 이들이 벼슬을 거쳐 갔지만, 그 가운데 청백리로 뽑힌 인물은 200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청백리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예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예로부터 공직자의 으뜸 덕목은 청렴이었다. 지금이야 공직자도 재테크를 잘해야 기를 편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공직자가 가난한 것을 오히려 멋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공직자가 지나치게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백성의 고혈이 녹아있다 보았던 까닭이다. 임영진이 쓴 책, 《어린이를 위한 청백리 이야기》는 비교적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조선 시대 청백리들을 중심으로, 고려와 신라 때 청렴했던 관리들의 미담까지 모두 34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청백리의 미담을 읽다 보면 진정 어려운 길을 걸은 이들의 기백에 새삼 머리가 숙어진다. 자신이 조금만 손을 뻗으면, 조금만 눈을 감으면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자리가 올라갈수록 그런 유혹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난주 봄이 너무 빠르게 가고 있다는 한탄을 하며 감성에 빠지다 정신을 조금 차려보니 문득 한 해의 시곗바늘이 5월을 지나 내일모레 6월을 가리키려 하고 있다. 어이쿠 벌써 6월인가? 한겨울 춥다고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때가 언제였는데 이제 봄도 다 가고 일 년의 절반의 고비를 향해 시간이 달려가고 있음을 다시 느낀다. 이미 연한 봄기운을 벗어버리고 왕성한 젊음을 과시하려는 나무와 풀들 사이로 새들의 지저귐을 향신료처럼 맛보는 사이에 이제 6월이구나. 계속되는 고온과 때때로 알맞게 내리는 비로 우리들 대부분이 사는 아파트라는 거주 공간의 담벼락마다는 넝쿨장미가 제 세상인 듯 폼잡고 피어있다. 그 장미들이 너무 심하게 자기자랑을 하는 것은 아닌가? 찬란한 아침이면 족하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도 응어리진 채 떠난 수많은 이들에겐 짙은 녹음조차 부끄러운 나날인데 남은 자들은 여전히 들끓고 있다 게다가 어찌 모두 빨간 장미만 쫓고 있는가 그래도 묵묵히 황허한 골짜기를 지키고 있는 건 이름 모를 나무와 한결같은 바람인데 가슴을 저미는 것은 풀잎의 노래인데 유월에 들면 잠시라도 영혼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 임영준, <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사람 대부분은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는 원인을 내부적에서 찾습니다. 곧 내가 잘해서 일이 잘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일이 실패했을 경우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습니다. 곧 외부적인 여건이나 운, 예측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을 들어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잘 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지요.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면 내로남불인데 그것을 ‘자기 위주 편향’이라고 합니다. 자기 위주 편향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훌륭한 업무를 달성했는데 자기 능력이 아니라 운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유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다음에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좋은 결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작아집니다. 그러니 무의식적이라도 나의 공이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심리가 깔린 것이지요. 요즘 연예인들의 그릇된 행동이 연일 방송에 오르내립니다. 대부분 사람은 스크린 속에서 연출된 그들의 재능과 능력에 함몰되어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을 보내기도 하고 펜클럽을 결성하여 응원하기도 합니다. 그들도 하루 세 끼를 먹고 화장실도 가고 남들에게 알려지기 싫은 사생활이 있는데도 뭔가 꼬투리를 잡으면 그것이 삽시간에 인터넷에 도배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외세의 침략이 전혀 없었던 나라도 세월의 힘을 견디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갖은 침입에 식민지 시절까지 겪었던 경우라면 옛 유산을 잘 보전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실제로 많은 유산이 무관심 속에 잃어버리고, 도둑맞고, 팔려나갔다.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유산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물론 문화유산의 나라 밖 반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법한 경로로 판매된 것이라면 엄연한 소유권 이전으로 그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유산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때로는 난폭한 방식으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안민영이 쓴 이 책,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가 잃은 문화유산을 되찾아 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그리고 멋진 용기를 발휘해 돌려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빼앗긴 입장에서야 당연히 돌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반출 경로가 어찌 되었든 돌려주기로 하는 것은 큰 용기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는 한번 잃어버린 문화유산은 좀처럼 되찾기 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지고, 산벚꽃 철죽이 피고 지고, 아카시아 꽃도 피고 지고, 그다음엔 진한 향기의 찔레꽃이다. 뻐꾸기도 운다. 그 많은 꽃의 습격이 다 지나가고 연두색 봄날은 짙은 녹색으로 변하면서 이제 우리 곁을 떠나려 하는구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사람들, 특히나 중년 이상의 남성들은 봄이 좀 가면 막걸릿잔이라도 앞에 놓고 이 노래를 듣고 가사를 따라 부르곤 한다. 봄이 가는 것이 괜히 서글픈 까닭에서이리라. 가수 백설희 씨가 1953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작사가가 누군지 작곡가가 누군지는 상관도 없이 그저 이미 대한민국의 봄을 맞이하고 보내는 사람들의 심사(心思)를 대신하는 노래로 사람들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당시는 6ㆍ25전쟁으로 사회 전반이 혼란스럽고 힘든 시기, 이런 때에 봄날의 아련한 풍경이 전쟁에 시달린 사람들의 한을 살포시 담아서 풀어주었고 그것이 계속 사람들을 통해 계속 명곡으로 사랑을 받아온 이유라고 분석하던데 그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이제는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황희, 장영실, 김종서, 성삼문 … 세종시대에는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정말 인재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큼 인재도 많았고 업적도 많았다. 이는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잠재력이 충분한 인재들이 세종이라는 뛰어난 주군을 만나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이예의 이름은 퍽 낯설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도 들어본 적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예는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 포로를 찾아오고, 43년 동안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사절단인 통신사로 파견되어 양국의 평화로운 관계유지를 위해 활약한 외교관이었다. 이런 이예의 활약을 담은 최정희의 책, 《나는 조선의 외교관이다》는 세종시대 외교를 이끌었던 그의 집념과 노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세종은 언제나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예를 각별히 아끼고 신임했고, 한평생 외교에 헌신한 공로로 원래 작은 고을의 아전이었던 그는 종2품의 높은 벼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는 중인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던 시절, 그의 능력과 인품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보여준다. 한 해가 멀다 하고 험한 뱃길을 뚫고 일본을 드나들며 대일외교에 모든 걸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미국 볼티모어대학에 흑인 사회를 연구하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면접을 통하여 흑인 학생들을 만나러 다녔고 그가 만난 200명의 자료를 종합한 결과 "이들에겐 100% 희망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연구 결과물은 연구실 구석에 처박힌 채로 20년이 흘렀고 교수도 정년 퇴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방의 주인이 된 젊은 교수는 먼지 더미 속에서 20년 전의 연구물을 발견합니다. 젊은 교수는 그러면 지금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요. 그래서 수소문하여 180명을 찾아 면접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176명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100% 절망이 아니라 100% 희망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수는 그들의 성공적인 삶이 무엇에서 연유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난 여선생님이 저를 이렇게 변화시켰습니다." 다시 교수는 제자를 잘 길러낸 여선생님을 찾아갑니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었나요?” 여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삐띠기”라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사 올 때부터 벌써 그렇게 부르더랍니다. 커서 생각해 보니 우리 마을은 참 이사도 많이 오고 많이 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대를 진득하니 눌러사는 집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나루터가 있어 오기도 쉽고 가기도 쉬워 그런지, 언덕배기 강마을이라 논이 없어 그런지 우리 집안을 비롯해 서너 집안만이 4~5대 이어 살 뿐이었습니다. 삐띠기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것 같습니다. “배텃거리”와 “웃배기미” 다해서 스무나믄 집 정도 되는 곳이라 또래가 드물어 서너 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었지요. 삐띠기는 나의 두 번째 색시였습니다. 첫 번째 색시인 언년이도 나보다 세 살 많았지요. 차분하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프다는 얘기가 들리고 몇 달 뒤 언년이 엄마가 딸을 가슴에 묻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삐띠기는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동갑내기 금복이와 장표가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을에 어린애라곤 우리 둘밖엔 안 남았지요. 나이에 비해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삐띠기에겐 소꿉장난은 이미 시시한 놀이였는지도 모
[우리문화신문=얼이동식 인문탐험가] 얼마 전 존경하던 스님 한 분을 여의었다. 이 세상에 없으니 여의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그 스님은, 많은 스님이 그렇듯이, 소탈하고 명랑하고 맑으시며, 해학도 있어 만나면 즐겁고 기쁘고 깨우침이 있었다. 고승이라고 무게 잡으시는 일도 없고 방장이 되신 다음엔 선방에는 큰 거울을 걸어놓아 스님들이 스스로 들여다보라고 했고, 젊은 스님들이랑 밭에서 울력하면서 농작물을 거두어 세상에 신세를 안 지고 사는 삶을 이끄는 모범도 보이셨다. 스님으로 사신 지가 꼭 50년이란다. 이런 분이 있기에 우리 절은 많은 분에게 안식과 평온. 삶의 고통에서의 해방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꼭 부처님이 계셔서만이 아니라 이런 분들의 삶을 통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길을 현실에서 배우는 것이리라. 영결식 뒤 다비장으로 가면서 영정 뒤를 따르는 수많은 만장은 그런 신도들의 존경심과, 이제 가까이서 더 만나지 못한다는 아쉬움 또는 슬픔을 표현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일정 기간 살다가 무(無)로 돌아간다.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동안 모두가 잘 먹고 잘 사고 싶어 한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넘어 사후에도 마음이 편안하기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백범 김구 선생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어떻게 하든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평양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백범을 잘 모르는 무식한 극우파 가운데는 백범이 공산주의와 가까운 인물이었을 거라고 속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소원>을 읽다 보면 백범이 얼마나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는지를 실감합니다. 백범이 <나의 소원>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한 말을 들어볼까요? 백범은 민족보다 사상이 우선이라는 공산주의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새나라를 건설하려는 지식인들에게는 공산주의가 매력적인 사상으로 비쳤습니다. 사실 공산주의 사상은 언뜻 들으면 그럴듯한 사상으로 들리지요. 그러나 백범은 그러한 공산주의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