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오가와미메이(小川未明,1882-1961)의 작품 가운데 “찔레꽃” 이란 게 있다. 원래 일본말로는 노바라(野ばら)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찔레꽃” 또는 “들장미”로 번역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들장미”와 “찔레꽃”은 사뭇 다른 이미지로 다가서지만 일본말은 이 둘을 가리키는 말이 “노바라(野ばら)”다. 오가와미메이의 작품 ‘노바라(野ばら)’를 필자는 “찔레꽃”으로 번역하고 싶다. 가수 장사익은 찔레꽃 향기가 짙어 너무 슬프다고 했는가? 오가와미메이의 “찔레꽃” 줄거리는, 국경선을 사이에 둔 두 나라 병사가 전쟁이 없는 상황에서 친하게 되어 장기도 두고 말동무도 하다가 갑자기 한쪽의 병사가 전쟁으로 국경 수비대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긴다. 두 나라 병사는 한쪽이 노인이고 한쪽이 젊은이었다. 젊은이가 국경 수비대를 떠나기 전까지 두 병사는 날마다 마주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바로 찔레꽃 필 무렵이었다. 유독 가슴 시린 향기를 내뿜는 찔레꽃 주변에는 언제나 꿀벌들이 날아들었고 적이자 동지가 된 두 사람은 마치 친아버지와 아들처럼 친하게 되지만 결국 젊은이는 전쟁터로 배치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 사람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 최초다. 이때부터 1905년 8월 8일까지 56회에 걸쳐 하와이 땅을 밟은 사람은 7,291명에 이르렀다. 초기 이민선을 탄 사람들은 사탕수수 밭 노동을 위해 건너 간 사람들이다. 1905년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전체 노동자 48,229명 가운데 한인은 4,683명으로 9.71%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일본사람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언제일까? 일본인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30년대지만 본격적인 이민의 역사는 1868년이다. 이후 1902년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70%를 일본인이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그러나 1924년 일본인의 입국을 저지하는 이른바 배일이민법(排日移民法)이 가동되면서 하와이 이민자 수는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24년 7월 1일 미국의 이민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각국으로부터 하와이로 들어오는 노동자 수를 무제한 받아들이지 않고 연간 제한을 두는 법으로 배일이민법은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와이 사탕수수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왕조실록》은 의당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져야하지만 국운이 기울어져갈 무렵이어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가 이에 관여하는 바람에 상당부분이 일본의 입김에 왜곡돼 있다. 본문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모두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종실록》은 1863년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1907년 《고종실록》 부록 편찬위원을 보면 위원장은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이며 종3위(位) 훈1등인 법학 박사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맡고 있으며 부위원장(副委員長)을 한국인인 이항구가 맡고 있다. 부록 편찬위원 33명 가운데 일본인은 모두 10명이다. 그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제국대학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 감수위원 나리타 세키나이(成田碩內), 사료 수집위원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서무위원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 서무위원 시가 노부미쓰(志賀信光), 회계 위원 사토 아키미치(佐藤明道), 감수 보조위원 에하라 요시쓰치(江原善椎), 편찬 보조위원 하마노 쇼타로(濱野鐘太郞), 편찬 보조위원 미즈바시 후쿠히코(水橋復比古)〕, 사료수집 보조위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금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1관에서는 ‘윤동주 100년 생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윤동주 생애 100년이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1917부터 올해 2017년을 세어 100년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4월 6일(목) 필자는 “일본에서 부활하는 윤동주 시인 -부제: 일본인들은 어떻게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가?-”란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필자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 명동촌을 시작으로 하여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그리고 하숙하던 종로 누상동 집터와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둘러본바 있다. 또한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과 교토 도시샤대학 그리고 다카하라 하숙집터를 찾아갔으며 27살의 나이로 순국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그의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의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는 일찍부터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아 그의 불꽃같은 삶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주부에서 윤동주 시에 반해 평생을 윤동주 연구에 바치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를 비롯하여 북간도 용정에서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내고 그의 문학성을 널리 알리고 있는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학 교수. 그리고 1990년 일본 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 유년시절엔 ‘국화’라고 하면 가을이었고, ‘토마토’라고 하면 여름이 제격이라고 여겼습니다만, 요즈음은 비닐하우스가 잔뜩 생겨 꽃이든 야채든 과일이든 연중 어느 때라도 재배되고 있습니다. 또한, 도로를 만들고 건설을 하느라 강이나 논을 메우고 산림을 훼손하고 나니 새들의 소리도 멀어지고 나무의 녹음도 볼 수 없어 그때그때의 정취도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홋카이도 출신 작가 이시모리 노부오(石森延男, 1897~1987) 씨는 <일본인의 계절감>이란 수필에서 이렇게 썼다. 그의 집 울타리는 낙엽송으로 되어있었는데 키가 4미터나 되는 거대한 낙엽송이 20미터나 길게 늘어서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눈이 사라지고 봄이 찾아오면 낙엽송 산울타리도 동그랗고 자그마한 순을 틔웁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순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심코 낙엽송의 순을 따서 냄새를 맡으면 강렬한 냄새가 퍼져 콧속을 간질거립니다. 나는 봄을 확인하기 위해 순 몇 개를 따서 손바닥에 비벼보곤 했는데 이렇게 낙엽송의 순 냄새를 맡는 것은 나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와 들녘을 산책하게 되는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는 봄이여 / 새는 울고 / 물고기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이는 일본의 하이카이(俳諧, 5.7.5조로 이뤄진 일본의 정형시)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 芭蕉, 1644~1694)가 방랑의 길에 나설 때 도쿄를 떠나며 부른 노래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바쇼의 시 속에는 봄을 노래하던 새들도 울고, 심지어는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물고기들조차 가는 봄이 아쉬워 눈물을 흘린다. 이 노래는 가는 봄의 아쉬움과 함께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도쿄를 떠나는 아쉬움을 담고 있는 노래로 알려져 있다. 하이카이의 시성(詩聖), 하이카이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츠오 바쇼의 유명한 시 몇 편을 다시 감상해보자. “오랜 연못에 / 개구리 뛰어드는 / 물 텀벙 소리 한적하구나 / 바위에 스며드는 / 매미소리 말을 하려니 / 입술이 시리구나 / 가을 찬바람 잿속 화롯불 / 사그라들고 / 눈물 끓는 소리“ 5.7.5(일본어 기준)라는 글자 수를 맞춘 극히 절제된 노래 하이카이지만 간결함 속에서 계절이 주는 정서라든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이미지가 군더더기 없이 나름대로 잘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츠오 바쇼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부산이라던가 대구를 영어로 표기할 때 과거에는 PUSAN, TAEGU 였지만 지금은 BUSAN과DAEGU로 쓰고 있다. 이러한 것을 ‘로마자표기법’이라고 하는데 로마자표기법은 불변의 표기법이 아닌지라 PUSAN이 BUSAN처럼 바뀌는 것처럼 한국어에서 로마자표기법에 관한 논의는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에 대해 3월 21일 마이니치(毎日新聞)에서는 일본어 로마자 표기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는데 정부가 2020년부터 실시할 예정인 ‘학습지도요령개정’에서 초등학생의 로마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자 일선에서 “로마자표기 혼란, 교사들 단일화 요구”라는 제목을 달았다. 2020년부터 강화되는 로마자표기가 무엇이기에 교사들이 혼란을 호소하는 것일까? 일본의 로마자 표기는 훈령식(訓令式)과 헤본식(ヘボン式) 두 종류가 있다. 헤본식이란 미국인 제임스 커티스 헵번(James Curtis Hepburn, 1815~1911)이 일본에 선교사로 와서 일본문자의 로마자화를 고안한 사람으로 이를 가리켜 헤본식이라고 부른다. 훈령식(訓令式)은 명치(明治) 때 일본인 학자들이 만든 로마자 표기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오모리(青森)의 여름 행사로 유명한 네부타 마츠리 안내문이 인천관동갤러리에 도착했다. ‘아오모리 코리아 넷과 즐기는 네부타 축제’라는 제목의 한글판 안내문에는 “이번 행사는 한국을 사랑하는 아오모리 코리아 넷이 주축이 되어 한국인들의 아오모리 방문을 도와드립니다. 아오모리 코리아 넷은 한국어 공부, 영화 감상, 한국요리 배우기 등 현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민간단체” 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츠리 기간에 특별히 한국인들을 안내해 준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해마다 8월 2일부터 7일까지 6일 동안 아오모리 시내에서 열리는 네부타 마츠리는 센다이(仙台)의 칠석마츠리, 아키타(秋田)의 칸토(竿灯) 마츠리와 함께 일본 동북 지방의 3대 마츠리로 꼽힌다. 특히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츠리는 6일 동안 관광객 수가 무려 300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있어 비행기표도 동이 나고 숙박도 잡기 어려운 탓에 3월부터 숙박을 확보해야할 정도이다.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츠리 특징은 한밤중에 형형색색의 대형 등롱(燈籠)인형이 거리를 행진한다는 점이다. 이 인형들의 모습이 관람객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데 긴 칼을 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기노 긴코(萩野吟子, 1851-1913)는 일본의 의사 국가자격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여의사다.오기노 긴코가 여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임질(淋疾)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임질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 여자는 동시에 방광염을 일으키며 내부 생식 기관에 염증을 일으키고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오기노 긴코는 16살에 부잣집인 명주(名主, 묘슈)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지만 결혼 뒤 얼마 안 되어서 심한 임질에 걸려 이혼에 이른다. 지금 같으면 임질로 이혼을 할까 싶지만 당시는 부잣집 며느리로서 아마도 임신과 출산에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어 이혼을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기노 긴코는 이혼 뒤 도쿄로 나와 순천당의원에 입원하여 부인과 치료를 받게 되는데 당시 의사는 모두 남자뿐이었다. 임질 치료를 위해 하반신을 남자의사에게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라 오기노 긴코는 여자의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을 치료해주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의사의 길은 생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3월 3일은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의 잔칫날인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날이다. 히나마츠리를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른다.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 음력으로 3월 3일 날을 잔치로 잡을 때 유래한 말이다. 히나마츠리는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에서 히나인형을 장식하여 그 아이가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부터 해오던 풍습이다. 이러한 헤이안시대로부터 유래하는 잔치로는 히나마츠리를 포함하여 5개의 잔치(五節句)가 있는데 1월 7일의 나나쿠사가유(七草がゆ)라고 해서 7가지 채소로 죽을 쑤어 먹는 행사, 3월 3일의 히나마츠리, 5월 5일의 단오(남자아이들의 성장을 기원하는 행사), 7월 7일의 칠석, 그리고 9월 9일의 중양절(重陽)이 그것이다. 히나인형은 3월 3일 이전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히나인형 판매의 절정은 2월 한 달이다. 이때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일본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히나인형 판매 경쟁을 보게 된다. 히나인형은 가지고 노는 인형이 아니라 집안에 장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