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죽은 아버지의 유품이 71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면 어떤 느낌이들까? 올해 78살인 사사키 씨는 27일 71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 유품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사사키 씨 아버지의 유품은 대어기(大漁旗)로 출어시에 고기잡이배에 꽂는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인 그의 아버지 미우라 씨는 태평양전쟁 때 구일본군에 징용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군수송선겸 감시선용으로 자신의 배가 차출되자 기관장으로 전장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어선은 곧 침몰하게 되고 침몰한 어선에서 한 미국인이 이 깃발을 건져 보관해 오던 것을 미야자키현에 주소를 둔 미우라(三浦三之助)씨 딸인 사사키사요코(78살)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깃발을 보관해온 사람은 미국 오하이오주에 사는 전 미군사무원이자 화가인 피터 럿쉬 씨(93살)로 그는 태평양전쟁 중 침몰한 일본배에서 이 깃발을 회수한 지인을 통해 이 깃발을 입수하여 보관해왔다고 한다. 대어기(大漁旗)는 가로 190센티, 세로 140센티 크기인데 이 깃발에는 텐요마루(天洋丸)의 미우라(三浦三之助)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번에 그 가족의 품에 반환될 수 있었다. 럿쉬 씨는 이 깃발을 1942년 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우리에게 좀 낯선 말이지만 실심실학(實心實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실심실학자를 꼽는다면 양명학 연구를 발전시켜 사상적 체계를 세운 하곡 정제두 (鄭齊斗, 1649-1736) 선생을 꼽을 수 있다. 하곡 선생이 말하는 학문 곧 실심학문이란 외적인 남의 학설로 기준(定理)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내적인 기준(良知)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실심은 생명이 약동하는 실상과 원리(生理)를 참되게(眞理) 그대로 나타내는 마음이며, 그의 학문은 명분과 대의를 내세워 죽음으로 내모는 의리학(義理學)이 아니라 생명의 내실과 그 원리를 중시하는 삶의 학문(仁學)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일본에도 그러한 실심실학자가 있다. 도쿠가와시대의 인물인 구마자와반잔(熊沢番山, 1619-1691)과 미우라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을 들 수 있다. 구마자와반잔은 17세기 오카야마번에서 봉사하면서 치산치수 사업을 했는데 그는 산림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라는 신념으로 치산치수에 노력하였다. 구마자와는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무엇이나 배우는 정심수신(正心修身)의 자세로 실학을 실천한 실심실학자였다. ▲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간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將軍)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제2회 방문은 교토의 후시미(伏見), 제12회 방문은 쓰시마(馬)까지였으나, 그 밖에는 모두 에도까지 왕복하였고 제4회 부터 제6회까지는 닛코(日光)에도 방문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 이하, 화원(員)의원(院)역관(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큰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戶)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 3,000㎞에 이르는 긴 여정 길에 올랐다. 조선통신사는 정사 외에 곳곳에서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기도 했다. 여기서 1636년의 기록을 보자. 때는 인조 14년 8월 11일. 통신사 일행은 한강을 출발하여 수로와 육로를 거쳐 9월 6일 부산에 도착, 여러 준비를 거쳐 10월 6일 부산을 출발했다. 이후 대마도를 거쳐 10월 27일 후쿠오카에 도착한다. 이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시에 살다 보면 인구감소니 인구위기론 같은 말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침 출근시간의 교통지옥 속에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실감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웃나라 일본에 바로 그 심각한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앞 다투어 나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특히 중앙공론 2014년 6월호 등에는 이러한 인구감소가 예견되는 시정촌(市町村, 우리의 시읍면) 523곳을 발표하여 일본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홍수 같은 물난리가 아니라 인구가 빠져나가 도시가 폐허화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일본은 이미 중소도시의 인구감소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그 대책을 위한 작업에 머리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대책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 골칫거리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기업가를 응원하는 미디어인 Future League 지에 실린 이케다하야토 씨의 기고문이 눈길을 끈다. 이케다 씨는 오랜 기간 북적대는 동경에 살다가 은퇴 후 조용한 삶을 보내고자 동경에서 머나먼 고치현(高知)으로 이사했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케다 씨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정착한 마을의 쇠퇴보다도 대도시의 베드타운 도시를 걱정하고 있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5월 25일자 AFP 일본통신은 호주 멜보른 근교에서 희귀한 흰색 제비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조류전문가로 환경교육지도자인 밥윈터스 (Bob Winters) 씨가 어렵사리 흰색 제비를 찍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는 선천성색소결필증 제비라고 했다. 순백색의 제비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것으로 현지 언론은 2010년 영국에서 보고 된 것 외에 손에 꼽을 만큼 희귀종이라는 반응이다. 현대 조류학의 눈으로 보면 순백색 제비는 정상이 아닌 새지만 희귀성으로 보면 무척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발견된 흰색 제비 이야기를 듣자니 고대 일본의 흰 꿩 이야기가 생각난다. 흰 꿩이 등장하여 나라의 연호를 백치(白雉, 하쿠치)라고 한 왕은 효덕왕(孝德天皇)이다. 서기 650년 2월 9일 나가토(長門, 지금의 야마구치현) 지방에서 국사(國司)인 쿠사카베가 흰 꿩을 잡아 효덕왕에게 바쳤다. 백치 연호를 쓴 기간은 4년 정도뿐이지만 조정에서는 쿠사카베가 오노야마에서 잡아 헌상한 휜 꿩을 보고 조정에 상서로운 일이 일어 날 것으로 생각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 연호(일본에서는 원호라 함)를 백치라고 하였다. ▲ 효덕왕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서기 703년 5월 28일 종5위 신분의 신라대사 미노연정마려(美努連淨麻呂)와 학문승 의법(義法), 의기(義基), 자정(慈定), 정달(淨達) 등이 신라로부터 귀국했다. 이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일본의 승려들이 신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속일본기》에는 이 무렵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인들과의 교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발해사신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와 있다. 이 보다 앞서 1월 5일에는 신라에서 김복호(金福護, 신라관직 제8위)와 김효원(金孝元, 신라관직 제9위)등이 효소왕의 죽음을 알리러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4월 4일에는 종5위인 고려(고구려) 약광(若光)에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 고구려의 약광왕을 모신 신사가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 있는 고마진쟈(高麗神社)이다. 머나먼 2천 년 전 유구한 세월 동아시아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 여러 나라들의 맹공을 저지하는 강국이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지(英知)룰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나라. 먼 이국땅에서 넘어온 왕족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내일 모레 5월 15일은 교토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인 아오이마츠리 날이다.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마츠리로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렸다. 아오이마츠리 유래는 ≪가모신사유래기≫에 따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쳤는데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와 그 노여움을 풀기 위한 제례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노여움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제주(祭主)는 튼튼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 얼굴에 동물 가면을 씌워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례(마츠리)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일본의 마츠리는 대부분이 고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작 등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아오이마츠리 역시 풍수재해 예방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1693년까지는 가모마츠리(賀茂祭)로 불리다가 아오이마츠리(葵茂祭)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아오이란 하트모양의 콩잎 같은 풀 잎사귀가 행렬에 참여하는 우마차 장식에 쓰였다고 해서 붙이게 된 이름으로 지금도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머리장식에 빠지지 않고 푸른 아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어제는 일본의 어린이날(고도모노히, 子供の日)이었다.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어린의 행복을 꾀함과 동시에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날의 취지로 1948년 제정된 이래 6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날을 제정한 나라는 터키로 1920년 4월 23일이었고 이후 1925년 스위스제네바에서 6월 1일을 국제어린이 날 (International Children's Day)로 삼은 이래 1954년에는 유엔에서 11월 20일을 세계어린이 날(Universal Children's Day)로 정했다. 그러나 나라마다 어린이 날은 약간 씩 다르며 일본은 전통적으로 지내오던 단오날을 오늘의 어린이 날로 삼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 날을 탄고노셋쿠(端午の節句)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날은 남자 아이들의 성장을 축하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기원하는 풍습에 기인한다. 이날은 형형색색의 모형 잉어를 띄우는데 이를 고이노보리(こいのぼり)라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 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긴 장대에 모형잉어를 매달아 놓았지만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는 아파트 베란다에 모형잉어를 장식하기도 한다. 왜 하필 모형 잉어인가?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 후, 당일자로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은 즉각 호외를 발행했고 이튿날인 30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범인의 1인은 양복에 희끗희끗한 스프링코트를 입고 식대(式臺) 뒤에서 범인 2명이 동시에 1개씩 수류탄을 던졌고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할 때 부근에 있던 도시락 상자 중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있음을 발견했다. 범인 중 2명은 수류탄 파편으로 자신도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되고 중상을 입었다. 고 보도했다. 사건 직후 호외에서는 범인을 괴지나인(怪支那人)이라는 둥 갈팡질팡하던 일본 신문들이 5월 6일자 호외에서는 상해폭탄사건의 범인은 조선인 이라면서 군사당국이 5월 6일 오후 3시에 발표한 범인의 신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본적과 이름, 생년월일을 보도했다. 본적: 조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 현주소: 상해 불조계(佛租界) 파이롱로 도혹코구 30 윤봉길 명치 40년 5월 19일생 윤봉길은 4월 29일 오전 7시 45분 홍구공원에 들어가 관민합동의 축하회가 곧차 끝나려고 기미가요를 합창하고 있던 11시 40분 경 연단 후방의 군중 속에서 나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무라카미하루키(村上春樹, 66살) 씨의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지속적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을 두고 중국의 4,500만 명이나 되는 트위터들이 하루키씨를 칭찬하는 글을 올렸다고 일본의 인터넷 언론, 사-치나(サ-チナ, searchina) 신문이 4월 21일자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무라카미 씨가 일본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시 침략을 받은 국가에 대해서 이들 나라가 완전히 잊을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죄 받았으니 이제 되었다고 할 때 까지 반복해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을 전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를 칭찬하는 사-치나(サ-チナ, searchina) 4월 21일자 기사 또한 이 신문은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오른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인 무라카미하루키 씨의 발언에 대해 중국의 누리꾼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트윗에 올라 온 글을 소개했다. 역사를 존중하고 그것을 인정해줘서 고맙다 / 가장 사랑하는 일본의 소설가 중 한 명이다 / 일본에 모두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니다 / 무라카미 씨의 책을 사야겠다 / 그에게 노벨상을 주어야한다 / 그의 작품은 모두 멋지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