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사실을 사실로서 처리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되는 일이므로 제국주의 입장에 불이익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간부들과 협의한 결과 (조선인의) 저항에 대한 살육 등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밤 12시에 산회 하였다. 이는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을 주도한 우츠노미야타로우 (宇都宮太郞,1861-1922)가 그의 일기에서 밝힌 내용이다. 우츠노미야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가장 잘나가는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군사령관 육군참의관으로 조선에 건너와 있었다. 그는 15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는 2007년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이란 3권짜리 책으로 일본에서 펴낸 바 있다. ▲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압사령관 우츠노미야의 일기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책 광고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에 대해 사건 이틀 뒤인 4월 17일치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수원, 진위, 안성 등지에서는 하세가와(長谷川)대위가 지휘하는 제1반(第1班)과 츠무라(津村)특무조장이 지휘하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50~60년대에 미국유학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두뇌 유출된 한국학자들에 대한 보도가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15세기 조선초에도 이런 두뇌 유출이 있었다. 불교나 도교 그림을 그리던 최고 수준의 승려화가들이 조선의 억불정책 아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당시에는 입국심사나 이민법 겉은 것은 없었다. 일본절에서는 조선의 승려화가들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으므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 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 일본미술사로 편입 되어 버렸다. 출가한 사람은 속가의 이름을 버리고 법명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림에 서명된 이름만으로는 그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어렵다. 이는 미술사학자인 코벨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 15세기 일본의 선묵화를 그린 사람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음을 그의 스승 후쿠이리키치 교수의 발표를 토대로 밝혔다. 그동안 일본 화단에서는 슈분(周文)이라는 일본 화가가 수묵화를 전부 그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1925년 후쿠이 교수의 조선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발음이 같은 슈분이라는 인물 가운데 조선인 슈분(秀文)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의 장승은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또는 절 어귀나 길가에 세워 잡귀와 나쁜 액운의 출입을 막거나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 신앙물이다. 이러한 장승을 마을에서는 수호신으로 믿기도 했다. 장승은 대부분 남녀로 쌍을 이루는데 남자를 가리키는 장승 기둥에는 천하대장군, 여자를 가리키는 기둥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도 이러한 장승이 있다. 도조신(道祖神, 도소진)이 그것이다. 일본의 장승은 대부분 돌장승이 많으며 한국처럼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교차로 등에 세우는데 이 장승을 마을신으로 받들고 나쁜 액운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길 가는 나그네의 안전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 나가노현에 있는 석비 형상이 장승 도조신(道祖神) 일본의 장승은 조각을 하여 어떤 형태를 만들기 보다는 자연석 상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석비 형상이나 5층탑 모양 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장승은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나 흥미롭게도 이즈모신화(出雲神話)의 고향인 시마네현에는 장승이 거의 없다. 아마도 강력한 신앙인 이즈모신사(出雲神社)가 장승신앙을 허락하지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는 일본 역사상 가장 문화가 꽃핀 시대라고 일컬어지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일본문자인 가나문자가 생겨났는가 하면 궁정문화가 농익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헤이안시대 391년 가운데 천황들의 수명은 후기로 갈수록 짧아진다. 전기의 평균 수명은 54살, 중기는 44살인데 견주어 후기에는 33살로 급격히 천황의 수명이 떨어진다. 후기로 오면서 천황의 수명이 짧아진 것은 정권의 불안정 속에 끝내는 사무라이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되는 원인에서 찾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연관 시키는 견해도 있다. 특히 헤이안 말기로 오면 승려들의 정치개입이 극심해지게 되는데 후삼조천황 집권기인 1072년에는 매사냥이 금지되고 1130년에는 살생금지령이 법률로 정해지게 되어 왕실의 식단이 푸성귀로 일색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에 그 원인을 두는 사람들이 있다. 왕실의 식단이 단백질 부족 등 영양결핍의 지경에 까지 이르러 이 무렵의 천황들의 수명은 안덕천황 전의 2조(23살), 6조(13살), 고창(21살)천황의 평균 수명은 19살로 생을 마감할 정도였다. 헤이안 말기 천황의 권력이 쇠퇴하는 한편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한국에는 남의 눈에 들보보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상대에게 닥친 큰일이라 하더라도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긴급하다는 얘기 일 것이다. 나는 왠지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겐자부로 (大江健三, 1935~)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소설가 오에겐자부로는 23살의 나이로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다카와상(第39回芥川賞) 수상을 시작으로 숱한 상을 받고 이어 1993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지적장애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손톱 밑에 가시인 아들을 둔 뼈저린 체험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개인적 체험을 낳게 하고 훗날 그 가시는 작가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의 삶도 바뀌게 했으니 본인에게는 고통스러웠겠지만 그 가시야말로 작가로 하여금 평범한 사람이 넘볼 수없는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겐자부로(왼쪽), 지적장애를 극복하고 작곡가가 된 아들 히카리의 음반 표지 오에겐자부로의 아들 히카리(大江光, 1963~)는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극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소아마비 소녀 미나코(美奈子)는 태평양전쟁으로 미군의 동경 대폭격이 시작되자 오사카로 내려갔다가 다시 산골마을 나가노 지방으로 피난을 하게 된다. 열 살의 나이로 신체장애자의 입장에서 겪은 전쟁의 참상은 어땠을까? 정상인도 아닌 소아마비 환자가 부모님과 떨어져 낯선 산골에 살면서 겪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그린 《치쿠마가와 강변에서 (千曲川のほとりで)》라는 동화집이 지난해 나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책을 감수(監修)한 다카모리(高林敏夫) 씨는 기자에게 동화책을 보내오면서 이 책이 일본에서 인권교육, 평화교육, 복지교육에 활용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책은 신문과 NHK방송 등 일본 언론에서 학동소개(學童疏開) 70주년이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소개(疏開)란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을 뜻하는 말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미군의 집중 폭격을 피해 주민과 학생들의 소개가 자주 있었다. 열 살의 가녀린 소아마비 소녀 미나코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헤어져 소개지(疏開地)였던 나가노현에서 동경의 장애자학교인 동경도립광명양호학교에 들어가 이 학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의 전통극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가부키이다. 가부키는 명치유신 이후에 발달했다고 일컬어지는데 여기서 발달이란 일반서민들의 볼거리에서 상류사회의 볼거리로 자리 잡은 것을 뜻한다. 가부키는 배우가 직접 대사를 말하면서 춤과 연기를 하는 연극이라면 죠루리(淨瑠璃)는 인형을 등장시키는 연극이다. 죠루리는 우리의 꼭두각시놀음처럼 사람이 인형을 조종하며 진행하는 연극으로 검은 옷을 입은 배우가 일본 전통옷을 입은 인형을 조종하면서 극을 이어가는 게 특징이다. 죠루리는 모두 남성이 연기하며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과 일본의 전통 악기인 샤미센을 연주하는 사람 그리고 연극의 대사를 말해주는 이른바 변사 역할을 맡은 세 가지 분업으로 연극이 이뤄진다 해서 이를 산교 (三業) 라고 부른다. ▲ 분라쿠인형(국립분라쿠극장 소장) 예전에는 하나의 인형을 한 사람이 조종했으나 1734년부터 세 사람이 하나의 인형을 조종하게 되었다. 유명한 인형극 작가로는 에도시대의 인물인 치카마츠몬자에몽(近松門左衛門, 1653~1725)이 있으며 그는 100작품 이상의 인형 극본을 쓴 것으로 알려졌고 이 가운데 20%는 세태를 나타내는 내용이고 나머지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곧 3월이다, 한국은 3월하면 3.1절이 떠오르고 유관순 열사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의 3월은 히나마츠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란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에서 장차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으로 이때 쓰는 인형을 히나인형(ひな人形)이라 한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날 치뤘다. 히나마츠리 열기가 얼마나 큰지 거리에는 붉은 색의 히나인형을 파는 곳이 많을뿐더러 크리스마스카드처럼 히나 카드도 인기다. 실제로 지난주에 일본 교토에 윤동주 순국 70주년 추도식에 참석하느라 잠시 다녀왔는데 나에게 커다란 히나인형 카드를 선물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카드를 펼치면 5단짜리 히나인형이 새겨진 카드는 값도 제법 나갈 법하다. 히나인형은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히나인형 판매의 절정은 2월 한 달이다. 이때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일본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히나인형 판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교토 동지사대학 교정의 매화는 이제 막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붉은 꽃, 흰 꽃송이가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곱게 피어났다. 매화꽃 교정을 거닐면서 나는 맑고 순수했던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행여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정문에서 도서관과 예배당으로 이르는 붉은 벽돌의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동지사대학 교정에는 홍매화가 가득 피었다. 교토 동지사대학 안의 예배당과 핼리스이화학관 사이에 있는 윤동주 시비는 이제 교토를 찾는 한국인들에게는 명소가 되었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1995년 2월 16일 윤동주시인 순국 50돌을 맞아 시비(詩碑)를 세운 몇 달 뒤의 일이었다. 그때는 시비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서 인지 학교 정문의 수위 아저씨에게 물어 보아도 시원하게 시비가 서 있는 위치를 잘 설명해주지 않아 여러 건물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쯤 뒤부터였을까? 동지사 정문 수위실에 “윤” 자만 말해도 한글판 “윤동주” 안내문을 내줄 정도로 윤동주는 동지사대학의 유명인이 되었고 나는 해마다 윤 시인을 만나러 동지사를 찾았다. 그가 떠난 교정에 검은 빗돌만 서있는 외로운 모습이지만 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에는 예전에 서당이 있어 아이들의 글공부를 전담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도 서당이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있다. 한국의 서당과 같지 않지만 일본에는 테라코야(寺子屋)라는 곳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테라코야(寺子屋)는 한자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절집(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유래한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이 글공부를 통해 과거시험을 치러 정계로 나갔지만 일본에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 (1192) 이후부터 명치 때까지(1868) 약 670여 년간 무사정권시대이다 보니 차분하게 글공부를 시킬 상황이 되지 못했다. 권력을 장악한 무사들은 자신이 싸워서 쟁탈한 정권을 빼앗기지 않게 늘 방어를 해야 했기에 일본의 670여 년간은 한마디로 사무라이들의 싸움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내전 상태였기에 글공부를 하고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붓 대신 칼의 시대였다. 그래도 글줄께나 하던 사람은 절집의 승려들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절에서는 아이들 교육을 맡아 했는데 여기서 테라코야(寺子屋)가 한국의 서당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일본의 테라코야의 시작을 흔히 중세의 절에서부터 잡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