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운서(韻書)에 이르기를 ‘동무(同舞)는 바로 마주 서서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동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쓴 백과사전 격인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나오는 말입니다. 이 “동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고 하여 언젠가부터 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이 글은 신경림 시인의 “산동네"라는 시 일부입니다. “걸음동무”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 곧 “동행”을 말하지요. 동무와 비슷한 말로 “벗”과 “친구”도 있습니다.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말하며,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뜻하지요. 김인호 시인은 <어깨동무>란 시에서 “태풍이 지나간 들 / 주저앉아 버린 벼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 대여섯 포기를 함께 모아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하는 벼들이 서로를 의지해 일어서는 들판”이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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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네 민속품 가운데는 쌀을 이는 도구로서 조릿대를 가늘게 쪼개서 엮어 만든 ‘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복조리’라 합니다. 복조리는 있던 것을 쓰지 않고 복조리 장수에게 산 것을 걸었는데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겼지요. 따라서 섣달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 사려.”를 외치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주부들은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진풍경을 이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복조리 장수가 집집마다 다니며 복조리 1개씩을 집안에 던지고 갔다가 설날 낮에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오는 지방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조리를 살 때는 복을 사는 것이라 여겨 복조리 값은 당연히 깎지도 물리지도 않았지요. 설날에 한 해 동안 쓸 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쓰면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복조리에는 실이나 성냥ㆍ엿 등을 담아두기도 했지요. 또 복조리로 쌀을 일 때는 복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었습니니다. 그런데 남정네들은 복조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남녘땅 제주에는 볼거리도 많지만 특이한 먹거리도 많습니다. 그런데 2013년 제주도에서는 자리물돔회, 갈치국, 성게국, 한치물회, 옥돔구이, 빙떡, 고기국수 등을 ‘제주도 7대 향토음식’으로 꼽았습니다. 이 가운데 메밀가루 부꾸미에 채 썰어 데쳐낸 무소를 넣고 말아서 만드는 빙떡은 제주도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하지요. 빙떡은 메밀 부꾸미의 담백한 맛과 무소의 삼삼하고 시원한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냅니다. 남원읍에서는 말아 놓은 모습이 흡사 멍석과 같다 하여 ‘멍석떡’이라고 하며, 3대 봉양을 제외한 작은 제사에서 약식으로 제물을 차릴 때 꼭 쓴다고 하여 ‘홀아방떡’ 또는 ‘홀애비떡’이라고 하고 서귀포에서는 ‘전기떡’(쟁기떡)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빙떡은 만드는 방법이 복잡하지 않아 빠른 시간에 적은 돈으로 많은 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떡인데 이웃이 잔치가 있거나 상을 당하면 ‘대차롱’(뚜껑이 있는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한 바구니씩 보냈습니다. 이때 부조를 받은 집의 여주인은 떡을 손으로 떼어내어 함께 쫓아온 귀신의 몫으로 밖으로 던져 잡신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한 뒤 모두가 함께 먹는데 남은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려는 일월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천문과 기상 현상을 관측한 기록을 대단히 많이 후세에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 475년 동안 일식과 월식이 각각 135건과 226건에 이르고, 심지어 맨눈으로 해의 흑점(黑點)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해성과 유성(별똥별)이 출현했다는 기록 또한, 많은 양에 이른다고 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조선시대의 천문도는 여럿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 시기의 천문도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동 권씨 수곡종택(樹谷宗宅) 소장품으로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수장되고 있는 ‘혼천요의(渾天要儀)’는 여러 면에서 고려시대의 진귀한 천문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한국 천문학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과학문화진흥원 나일성 이사장이 그의 책 《과학고서해제집》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혼천요의(渾天要儀)’는 종이에 그린 천문도로서 제법 큰 가로 82.5cm, 세로 72.5cm의 크기입니다. 다만 천문도 맨 위에 어색한 모양으로 ‘渾天要儀’라고 쓰여 있을 뿐 제작자 이름이 없고, 제작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일성 이사장은 혼천요의 오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위는 3.1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서의 일부분입니다. 1910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강제병합"을 당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9년 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 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뒤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 정부, 일본 국회 등에 보낸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나라 밖으로 파견된 사람을 뺀 실행위원 모두를 포함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특히 김마리아, 차경신 지사 등이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후 3.1 독립선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 프로기사 신민준 9단이 LG배 결승3번기 최종국에서 중국 순위 1위인 커제 9단에게 승리하여 세계대회 첫 우승을 달성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동안 세계 으뜸 기사라는 커제 9단에 열세였던 신민준 9단의 쾌거여서 바둑애호가들은 기뻐했습니다. 바둑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즐겼던 놀이의 하나로 한ㆍ중ㆍ일 세 나라가 모두 좋아합니다. 바둑은 선인(仙人)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던 나무꾼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를 정도로 세월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난가(爛柯)라는 말도 있다고 하지요. 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끼리라도 바둑을 두면 마음이 통한다는 뜻으로 수담(手談)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바둑판을 아끼는 이들도 많았고, 대단히 아름다운 바둑판도 전해져 옵니다. 특히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바둑판이라고 알려진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은 그 화려함이 대단하지요. 목화자단기국은 일본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인 나라 정창원에 보관 중인데 상아로 새겨진 옆면의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 일본 왕실 보물이자 으뜸 예술품으로 꼽힙니다. 그밖에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용과 호랑이 무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제는 봄이 선다는 날 입춘(立春)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춘 무렵 먹는 시절음식에 다섯 가지 매운맛이 나는 모둠 나물 ’오신채(五辛菜)‘가 있지요. 오신채는 파, 마늘, 자총이(껍질이 누런 자줏빛이고, 속은 흰색인 파보다 더 매운 파), 달래, 평지(유채), 부추, 파, 무릇(마늘과 비슷한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미나리 등의 푸성귀들 가운데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고 하얀, 오방색을 골라 무친 나물입니다. 노란빛의 나물을 가운데에 놓고, 동서남북에 청, 적, 흑, 백의 사방색(四方色)이 나는 나물을 놓는데 임금이 굳이 오신채를 진상 받아 중신에게 나누어 먹인 뜻은 사색당쟁을 타파하라는 화합의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일반 백성도 식구들의 화목을 상징하고 인(仁)ㆍ예(禮)ㆍ신(信)ㆍ의(義)ㆍ지(志)를 북돋는 것으로 보았으며, 삶에는 다섯 가지 괴로움이 따르는데 다섯 가지 매운 오신채를 먹음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지요. 옛말에 오신채에 기생하는 벌레는 고통을 모른다는 말도 있는데 오신채는 자극을 주는 정력음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절의 규칙인 ‘선원청규(禪苑淸規)'에 절간의 수도승은 오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허망하도다.(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이 말은 한말 호남의병 기삼연(奇參衍) 총사령관이 일본군에 잡혀 광주 감옥에 갇힌 뒤 남긴 시입니다. 선생의 꿈이 해를 삼키려고 했다는 것은 일제를 패망시키려는데 뜻을 두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기삼연 선생은 그렇게 체포된 다음 날인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피살되어 58살의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빨리 순국한 것은 추종하는 의병부대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가 재판도 없이 서둘러 학살한 때문이었지요. 선생은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특히 선생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장성군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을 모아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했으며, 그 뒤 호남일대를 무대로 본격적인 의병전쟁에 돌입했고, 1907년 9월 23일, 고창 문수사(文殊寺) 전투에서 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을 비롯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는 신축년(辛丑年) 소띠해입니다. 그래서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라고 하는 선종화(불교 종파의 하나인 선종의 이념이나 그와 관련되는 소재를 다룬 그림)가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도를 상징하는 소를 발견하고 길들이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잊고 초탈하는 과정을 그리는 이러한 그림은 지금도 절에서 그려지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 심우도와는 다른 조선중기의 문인화가 김식(金埴)의 그림 <우도(牛圖)>도 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소들의 평화로운 한나절을 그려냈는데 송아지는 어미의 젖을 정신없이 빨고 있고, 어미 소는 사랑스러운 듯 새끼의 엉덩이를 핥아주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에는 뾰족한 모양의 산이 무덤덤하게 있구요. 이 그림은 부드러운 몸매의 소와 송아지 가족을 통해 따뜻하고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김식의 이 그림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소의 모습을 통하여 군자의 마음가짐을 은유한 것이라고 하지요. 김식은 조선 중기의 권력가였던 김안로의 손자인데 소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소를 그릴 때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沒骨法)을 써서 소의 얼굴, 넓적다리, 엉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