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季冬漢江氷始壯 (계동한강빙시장) 千人萬人出江上 (천인만인출강상) 丁丁斧斤亂相斲 (정정부근란상착) 隱隱下侵馮夷國 (은은하침풍이국) 斲出層氷似雪山 (착출층빙사설산) 積陰凜凜逼人寒 (적음늠늠핍인한) 朝朝背負入凌陰 (조조배부입능음) 夜夜椎鑿集江心 (야야추착집강심) 晝短夜長夜未休 (주단야장야미휴) 勞歌相應在中洲 (노가상응재중주) 短衣至骭足無屝 (단의지한족무비) 江上嚴風欲墮指 (강상엄풍욕타지) 高堂六月盛炎蒸 (고당육월성염증) 美人素手傳淸氷 (미인소수전청빙) 鸞刀擊碎四座徧 (난도격쇄사좌편) 空裏白日流素霰 공(리백일류소산) 滿堂歡樂不知署 (만당환락불지서) 誰言鑿氷此勞苦 (수언착빙차노고) 君不見道傍暍死民 (군불견도방갈사민) 多是江中鑿氷人 (다시강중착빙인)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얼자 많고 많은 사람들 강 위로 나와서는 쩡쩡 도끼질로 얼음 찍어내는데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가 닿겠네 깎아낸 두꺼운 얼음은 눈 덮인 산처럼 보이는데 차갑게 쌓인 음기 사람에게 닥쳐온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로 들어가고 밤마다 망치와 끌 챙겨서 강 복판에 모인다. 낮 짧고 밤은 길건만 밤에도 쉬지 못하고 주고받는 노동요 소리만 모래톱에 울린다. 정강이가 드러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춘천 서면에 가면 〈붓 이야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장인 정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박물관이지요. 붓을 만들기 위해서는 100번 이상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연암 박지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깁니다.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칼날을 만들되 끝이 대추 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 담갔다가 꺼낸다. 종횡무진 멋대로 치고 찌르되, 세모 창처럼 굽고, 작은 칼처럼 날카로우며, 긴 칼처럼 예리하고 가지창처럼 갈라졌으며, 살처럼 곧고 활처럼 팽팽해서, 이 병장기가 한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호질’에서 붓을 형상화한 글입니다. 붓은 결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붓의 힘은 칼보다 강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노예해방을 이끈 것은 북군의 총과 칼이기도 하지만 스토우 여사의 ‘엉클 톰스 캐빈’이라는 소설의 영향이 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체제공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깁니다. "붓아! 너를 잘 사용하면 천지 만물의 이치와 운명도 모두 묘사할 수 있지만, 너를 잘 쓰지 못하면 충신과 간신, 흑과 백이 모두 뒤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파원군 윤평이 숙신옹주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3월 4일 세종 17년인 1435년 3월, 윤평과 숙신옹주가 혼인을 올렸다. 이 혼인은 무척 특별했다. 조선 왕실에서 친영례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처음으로 왕가의 혼인을 친영례로 치른 것이다. 친할 친(嚫), 맞을 영(迎)으로 된 말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와서 혼례를 치른 뒤 곧바로 시집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친영례는 명나라의 풍속이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랑이 혼례를 치른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지내는 ‘처가살이’ 전통이 강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줄곧 조선의 혼인 풍속을 문제 삼았고, 조선 왕실에서는 성리학에 따라 생활 예법을 중국식으로 바꾸며 친영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명나라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숙신옹주가 혼인을 올린 뒤에도 친영례는 한참 동안 일반화되지 않았다가, 무려 200년이 지난 17세기에 가서야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니까 17세기 때까지만 해도 ‘시집간’ 여인보다는 ‘장가간’ 남성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 책, 《옹주의 결혼식》은 조선 첫 친영례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한병철님의 《사물의 소멸》이라는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제 땅과 하늘이 아니라 구글 어스와 클라우드에 거주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다른 사람)와 마주치지 않는다. 우리는 탈사물화한 세계, 정보가 지배하는 유령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설파한 글입니다. 슬기말틀(스마트폰)은 절대적 기능을 하는 디지털 성물이 되어가고 있고 누리집마다 사람을 꼬드기는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우린 널려있는 주변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세상을 살고 있고 먼 이야기들이 검색어를 통해 눈 앞에 펼쳐질 때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달아 놓은 댓글에 함몰되어 스스로 판단력을 내려놓고 암묵적 지지자가 되기도 합니다. 검색 단어 몇 개만으로 그 사람의 취향을 파악해 버린 빅데이터의 영향으로 같은 주제 같은 색깔의 데이터만 물어다 주는 디지털 편향인 세상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자기 아집을 더욱 공고히 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본인은 변고를 겪은 뒤 놀람과 걱정이 병이 되어 신하들을 이끌고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부득이 둘째 아들 혼(광해군)에게 국사를 섭정하고 영토를 보존하도록 명했고, 본인은 적에게 쫓겨 저희 땅에는 몸 둘 곳이 없으니 스스로 식구 몇 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시 (황제에게) 아뢰어 실행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소방은 부모를 따르듯 대국을 받들고 있습니다. 자식이 위기에 처하면 부모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혹시 황제의 허락이 내려오지 않더라도 적의 예봉이 날로 닥쳐오면, 본인은 (압록)강을 건너 명(命)을 기다리겠습니다. 급히 처리해주기를 바랍니다. (김영진 《임진왜란》에서 재인용) 선조가 요동도사에게 보낸 자문(咨文, 조선의 대중국 외교 관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외교문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북상해오자 서울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은 선조는 평양도 위험해지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 압록강 변 의주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대동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선조는 자기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들어갈 테니 제발 자신을 받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문학과 음악 분야에서 세계적 거장의 자리에 올랐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가 지난 3월 3일과 28일, 각각 세상을 떠났다.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탈원전, 반핵 운동 등 사회운동도 앞장섰으며, 대표적 친한파로서 한국에서도 양심적 지식인으로 존경받아왔던 두 사람의 별세 소식이라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이들의 대표작을 통해 거장들의 고뇌와 깊이를 다시 한 번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문화정보실 자료 제공-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1935.1.31~2023.3.3 (향년 88세)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 만엔원년의 풋볼,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체인지링, 책이여 안녕 등 【작품 1】 《동시대 게임(同時代ゲーム)》 주인공 ‘나’는 멕시코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강사다. 멕시코 체재 중, 신관(神官)이었던 아버지의 직업인 ‘마을=국가=소우주’의 신화와 역사를 쓰는 일을 이어받기로 결심한다. ‘나’의 고향인 ‘마을=국가=소우주’는 도쿠가와 시절에 권력에서 도망쳐 탈번(脱藩)한 사람들이 시코쿠의 산속에 창건하였다. 메이지 유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니, 궁중의 옛일부터 국가 제도, 다른 집 족보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한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서 질문하면 하나하나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혜경궁지문」, 《순조실록》, 1816년 1월 21일 / 20쪽 혜경궁 홍씨. 정조의 어머니이자 순조의 할머니인 그녀는 죽은 다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총명하다고 해서 ‘헌’, 늘 조심스러웠다고 해서 ‘경’이라는 글자를 썼다. 칠십 년 가까이 계속된 그녀의 궁중생활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런 살얼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열 살에 입궁한 혜경궁은 빨리 어른이 되었다. 1744년 가례를 올리고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약 18년 동안 이어진 불안한 혼인 생활,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외척 척결에 따른 친정의 몰락, 그리고 마침내 손자 순조가 즉위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칠십 년 궁중생활이었다. 정병설 작가가 쓴 이 책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새벽 장거리 산행을 하기 위하여 세 시쯤 집을 나섭니다. 아무리 빨리 새벽을 맞아도 길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은 아직 꿈속에 헤맬 거로 생각하겠지만 언제나 세상은 나보다 빠릅니다. 도시에서는 새벽이슬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밤새 맺힌 이슬이 이른 아침의 햇살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새벽이 살아있음을 이슬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슬은 밤새 뿌리가 흡수한 물이 밖으로 빠져나온 것입니다. 넘치기 전에 비우는 것이 좋습니다. 비움을 실천하지 못하면 욕심을 부리게 되고 결국 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이 들면서 기상 시간이 조금씩 앞당겨짐을 느낍니다. 새벽 시간이 좀 더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안온한 이불 속에서 실컷 게으름을 구가하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은 행복입니다. 새벽의 어둠은 한밤중의 어둠과 그 깊이가 다릅니다. 새벽은 밝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슴푸레한 사물이 점점 뚜렷하게 다가올 때의 환희를 생각합니다.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도연명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인생은 단품입니다. 영산홍 꽃떨기도 봄 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는 한국의 어린이날이었다. 일본도 이날은 ‘어린이날(고도모노히 , 子供の日)’이다. 일본의 어린이날을 ‘탄고노셋쿠 (端午の節句 )’라고 하는데 원래 이날은 남자 아이들의 성장을 축하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비손하는 풍습에서 유래했다. 이날은 형형색색의 모형 잉어를 띄우는데 이를 “고이노보리 (こいのぼり)”라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 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긴 장대에 모형잉어를 매달아 놓았지만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는 아파트 베란다에 모형잉어를 장식하기도 한다. 왜 모형 잉어인가? 중국 《후한서 (後漢書)》에 보면 황하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에 용 (龍)이라 불리는 폭포가 있었는데 이 폭포를 향해 수많은 물고기가 뛰어오르려고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잉어란 놈만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잉어를 입신출세의 상징으로 여겼다고 전해지는데 일본에서도 잉어는 입신출세와 건강의 상징으로 믿어왔다. 일본의 단오풍습은 에도시대 (江戶時代.1603-1868)에 무사집안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입신출세란 ‘덕천가강 (도쿠가와이에야스)’ 같은 씩씩한 장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이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갑옷과 투구 등을 현관에 장식으로 걸어두고 아이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효백 교수가 《한국 진달래 오라》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표지에는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일본 무궁화 가라’가 적혀있고, 또 표지 윗부분에 ‘어느 경솔한 자가 진달래를 놔두고 궁벽한 무궁화를 조선의 꽃이라고 불렀는가’라고 적혀있습니다. 표지에 적혀있는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강 교수는 ‘일본 무궁화를 왜 우리나라 국화로 하느냐? 그보다는 한국 진달래를 국화로 해야 한다’라고 목청껏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궁화는 일본 열도 전체에 자생함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금북정맥 이남에서만 자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일본에는 무궁화에 대해 많은 자료가 있음에 반하여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강 교수는 이런 무궁화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는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로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전에 펴낸 책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자세히 얘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책의 끝에 그럼 무궁화 대신 어느 꽃을 국화로 봐야 할지에 대해 여러 후보 꽃을 들면서 그 가운데 진달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했습니다. 그렇게 강 교수는 그 책에서는 진달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하고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