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동우 이탁(東愚 李鐸, 1889-1930)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탁 선생은 평남 평원 출신으로 1908년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 만주 일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 이탁 선생 1919년 매국 7적을 응징할 목적으로 27결사대를 결성하여 서울로 잠입하였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서간도지역 임시정부 군사기구인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장과 임시정부 동삼성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 내한 때 3개 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토록 하였다. 1921년 상해에서 한중국민호조사를 조직해 문서과 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무간사로 선임되었고, 시사책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상해 대한적십자사 감사로 선임된 후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조직되자 서기로 임명되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19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김경천 [18881942] 선생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여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선생은 일제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20-30년대에 중등학교나 신문사에 적을 두고, 주로 신문과 잡지에 계몽성 짙은 역사 관련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선생은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호암 선생은 1910년대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또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新幹會)와 조선물산장려회에도 참여한 바 있다. 1920~30년대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깊고 다양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우리말과 역사를 억압하던 식민지 현실에서 우리 역사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선생의 생애와 학문 또는 저술에 관해서는 그간 자주 논의되어 왔으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부분을 강조하며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고, 학문도 언급하고자 한다. ▲ 역사학자요 독립운동가인 문일평 선생 1888년(고종 25) 5월 15일, 압록강 가까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호(金乎, 1884.5.25~1968.1.5) 선생은 1884년 5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선생은 1912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1914년 7월 25일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뉴욕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의 보증으로 미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10년대 초반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는 물론 시베리아, 만주, 수청(현재의 파르티잔스크) 등지에 국민회 지방총회를 설립하였으며, 멕시코지역에도 지방회를 설립하는 등 해외한인의 최고통일기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3년 6월 미국국무장관으로부터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인정받는 한편, 1914년 4월에는 캘리포니아주정부의 인허를 얻어 완전한 한인자치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입국하는 유학생과 한인들은 여권이 없을지라도 대한인국민회의 증서와 보증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 역시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미국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도미 후 노동에 종사하면서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대한인국민회 재정에 필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시원(趙時元, 1904. 10. 23 ~ 1982. 7. 18)은 1904년 10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서 아버지 이화제(理化齊) 조정규(趙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7남매 중 6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조정규 선생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성룡(趙性龍)의 외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신망이 높은 유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 슬하에 장남 용하(鏞夏, 1977 독립장), 차남 소앙(1989 대한민국장), 3남 용주(鏞周, 1991 애국장), 4남 용한(鏞漢, 1990 애국장), 딸 용제(鏞濟, 1990 애족장), 5남 용진(鏞晋), 6남 시원(1963 독립장) 등 6남 1녀 중 6명을 비롯하여 손자 시제(時濟, 1990 애국장, 소앙의 2남), 인제(仁濟, 1963 독립장, 소앙의 3남), 손녀 순옥(順玉, 1990 애국장, 선생의 장녀,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의 부인), 자부 이순승(李順承, 1990 애족장, 선생의 부인) 등 4명을 합하여 일가족 10명을 독립운동가로 육성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집안이다. ▲ 독립운동가 조시원 선생 조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중국 곤명에 위치한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 대한통의부에 가입해 항일무력 세력을 재정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한 결과, 1924년 정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오동진이 일제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정의부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 제1지대장 이준식 지대장 1928년 만주지역 3부가 통합해 조직된 국민부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29년에는 국민부의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이 창설되자,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및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노선대립 등으로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1년 상해로 옮겨 중국군 고급장교로 복무하면서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장사, 광주 등지로 이전하게 되자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지구 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병사를 모집해 훈련시키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차리석(車利錫, 18811945) 선생은 1904년 숭실(崇實)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성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소위 사내 총독(寺內總督)암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 3월 20일 석방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동년 8월 독립신문의 기자로서 조동호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뒤 1921년 6월경 김승학이 동사 사장이 되어 신문발행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편집국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교포들에게 독립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의장에 이동녕(李東寧)이 피선되고 그는 부의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며 김붕준김홍서와 함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의정활동에 참여하는 등 1933년 12월까지 의정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 1922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가하여 뜻을 같이 하였으며, 시사책진회(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응칠 역사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혹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씀드린다면,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에 쓴 자신의 자서전입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라면서 안응칠 역사는 또 뭐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응칠은 안 의사의 자(字)입니다. 안 의사의 배와 가슴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응칠 역사는 안응칠(중근) 개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직접 썼으니까 자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안 의사는 이 자서전을 1909. 12. 13. 쓰기 시작하여 사형집행 11일 전인 1910. 3. 15. 집필을 마쳤습니다. 안 의사는 자서전 집필을 끝낼 무렵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일제가 사형을 빨리 집행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서론만 쓰고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지요. 안응칠 역사 끝부분에 가면 안 의사가 평석(平石)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사형집행일을 예정보다 한 달 남짓 늦추어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평석 고등법원장은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헌주 선생(1880~1965) 은 대한제국 시기 관립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3년 무렵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06년 쯤 미국 본토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로녹대학 재학 중이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한국특사의 통역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이 미주에 알려진 직후 선생은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독립금 3만 5천 달러를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등에 사용하도록 지원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장직을 맡아 la에서 낙성식을 치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미주 한인사회를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송헌주 선생 1941년 선생은 재미 한인단체의 역량을 집중하고 항일운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국방과장을 맡아 맹호군으로 불리던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 한인국방경위대의 정위로 임명되었다. 1945년 광복 직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연합국 회의에 참가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선임되었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한 선
[한국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인천차이나타운 가까이에 있는 인천관동갤러리에서는 아주 뜻 깊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른세 분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기 위한 붓글씨 전시회가 그것이다. 이곳에서는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 안사람 영혼을 일깨운 춘천의 여자 의병대장 윤희순, 총칼에 날개 꺾였어도 굽히지 않은 항일정신 박자혜, 포탄 퍼붓는 전선도 두렵지 않은 광복군 지복영 지사 등 모두 서른 세분의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서전(詩書展)이 지난 7월 4일부터 오는 8월 2일까지 열리고 있다. ▲ 시서전 전시장 모습 ▲ 시서 작품 시는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이윤옥 시인이 쓰고 붓글씨는 제35회 원곡서예문화상을 수상한 청농 문관효 선생이 썼다. 일제국주의 침략을 당해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많습니다. 김향화, 문재민 처럼 기생의 신분이거나, 고수복, 이효정 지사처럼 열악한 방적공장의 노동 현장에서 또한 부춘화, 김옥련 지사는 해녀출신으로, 그런가 하면 최용신, 차미리사와 같이 분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셨지요. 한편